2005년 4월 25일 화창한 봄날이었다.
나카무라 미치코(40세) 씨는 남편과 아들의 출근길과 등굣길을 챙긴 뒤 어머니와 둘이서 운영하는 인쇄소로 출근하기 위해 후쿠치마야선의 쾌속 전동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출근길 러시아워가 채 끝나지 않은 시간이라 많은 승객이 타고 있었다. 전동차를 꽉 채운 승객 중의 한 명인 대학생 가즈와키(18세) 씨는 학교에 가는 중이었다.
바로 전에 정차했던 이타미 역에서 전철이 승강장을 벗어나 서는 바람에, 전철은 다시 뒤로 움직여 문을 여닫았다. 승객들 사이에서 불만 섞인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열차가 출발하고 속도를 높이자 수군거림은 이내 잦아들었다. 다음 정차 역인 아마가사키 역을 얼마 남기지 않은 곡선 선로에서 열차가 오른쪽으로 살짝 기우는 듯했다. 승객들은 곡선 주행에 따른 일시적 쏠림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 열차의 왼편 바퀴는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공중에 붕 떴다. 선로를 이탈한 전동차는 선로 옆 전차선 지지용 철제 기둥을 쓰러뜨린 후 앞으로 돌진해 그대로 선로 변에 있는 맨션아파트에 충돌했다. 일본 최악의 철도 사고 중 하나인 후쿠치마야선 탈선 사고가 일어난 순간이었다. 이 사고로 107명이 희생됐고 562명이 다쳤다. 나카무라 미치코 씨는 끝내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가즈와키 씨는 다행히 생명을 건졌지만 중상을 입은 채 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즈와키 씨는 몸의 장애뿐만 아니라 사고 당시의 충격으로 깊은 마음의 병도 얻었다.
철도 왕국이라고도 불리는 일본. 유럽의 철도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 최고의 철도 기술력을 자랑하는 일본에서 왜 이토록 끔찍한 철도 사고가 발생했을까? 지금부터 하나씩 그 원인을 찾아보도록 하자.
지난 2012년 5월, <매일노동뉴스>는 창립 20주년 특별 기획 중 하나로 일본 철도 민영화를 다루게 되었다. 나는 가이드 자격으로 취재팀에 합류한 덕분에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며 일본 철도 민영화를 조사할 기회를 얻게 됐다. 이 취재 일정의 일환으로 5월 12일 일본 오사카에서 후쿠치마야선 사고 피해자 유족 대표 두 분을 만났다.
온화한 얼굴에 기품 있는 미소로 취재팀을 맞아준 후지사키 미츠코 씨는 72세(당시 나이)의 할머니였다. 사고 당일 후지사키 씨는 딸과 함께 운영하던 작은 인쇄소에서 출근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 딸을 기다리던 중 사고 소식을 들었다. 인터뷰 당시 7년이 지났지만 사고가 났던 날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는 후지사키 씨의 눈은 금방 촉촉이 젖어들었다. 함께 나온 니시오 히로미(54세) 씨의 아들은 중상을 입었다. 사고 후 7년이 지나 25세의 청년이 되었지만,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들을 볼 때마다 그는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후쿠치마야선 열차 참사는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의 대도시에서는 철도가 없으면 도시 기능이 마비된다. 그 정도로 철도는 일본에서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수많은 이용자가 몰리는 철도에서 하루아침에 100명이 넘는 사람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커다란 문제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사고 조사를 담당했던 일본 국토교통성은 2007년 발표한 최종 보고서를 통해 '과도한 수익 위주의 기업 체질과 노동자의 인권을 무시하는 기업 환경'을 사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았다. 현재 한국에서 국토부가 앞장서 추진하는 철도 정책의 핵심 가치가 일본 국토교통성이 발표한 후쿠치마야선 사고의 원인이라는 사실은 꽤 서글픈 일이다.
일본의 철도 민영화는 어떻게 이뤄졌나
일본 철도는 왜 수익 위주의 경영을 추구했고, 노동자 인권조차 무시하는 환경을 만들어냈을까? 바로 철도 민영화 때문이었다. 경쟁을 통한 효율화와 경영 개선이 철도 회사의 가장 중요한 이상이 되는 과정에서, 재앙으로 가는 열차는 서서히 준비되고 있었다.
후쿠치야마선 사고를 일으킨 열차는 JR서일본 주식회사의 다카라츠카 발 도시샤마에 행 상행 쾌속 전차 제5418M 열차로, 7량이 연결되어 있었다. 2005년 4월 25일 월요일 오전 9시 16분 10초경 이타미 역을 출발한 급행 전철은 이나데라 역을 통과한 후, 쓰카구치 역을 9시 18분 22초경 통과했다. 그 후 속도를 높이며 메이신 고속도로의 남쪽에 있는 반경 304미터의 곡선을 주행하던 중, 운전실이 있는 첫 번째 객차가 9시 18분 54초경 왼쪽으로 넘어지듯 탈선하였고, 뒤따라오던 객차들이 차례로 탈선했다. 맨 뒤 7번째 객차는 9시 19분 04초경 정지했다.
JR서일본은 1987년 일본 국철이 7개의 회사로 분할 민영화되는 과정에서 분리된 여객 철도 회사다. 약 5000킬로미터의 영업 거리를 뛴다. 주 수입원은 큐슈의 후쿠오카와 연결된 고속철도인 산요 신간센, 그리고 게이한신 지역이라고 불리는 오사카 중심의 광역 철도망이다.
한국의 국토부에서는 한국 철도의 115년 독점 체제를 종식하고 경쟁 체제를 도입해 철도 역사의 새 장을 만들겠다며 수서발 KTX를 분리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세계적으로도 철도가 경쟁하는 곳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철도가 경쟁하기 위해서는 출발지와 도착지에 서로 다른, 독립적인 노선을 건설해야 한다. 거대한 인프라에 중복 투자하는 것은 사회적 낭비일 뿐 아니라 경쟁사들에 모두 득이 되지 않는다.
철도는 태생적 특수성으로 인하여 경쟁이 성립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세상일에 예외는 있는 법. 오사카를 중심으로 운행되는 철도 노선의 상당수는 국철을 승계한 JR서일본이 운영하고 있지만 사철로 불리는 민간 회사의 철도망도 다수 섞여 있다. 전국의 간선 철도망과 대도시 주요 철도망은 1987년까지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는 국철 체제로 운영되었다. 일부 도시와 지방에서 민간 기업이 세운 철도 회사는 사철로 불렸다. 국철이 JR 7개 회사로 분리 민영화된 이후 소유권에 따른 국철과 사철의 기준은 사실상 무너졌다. 그러나 오래된 관습 때문에 민영화된 JR 철도 회사들과 사철은 구분되고 있다. 물론 JR서일본의 철도 노선과 사철의 노선은 서로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운영된다. 오사카는 도쿄에 버금가는 일본의 대표적인 도시다. 오사카시 인구는 250만에 약간 못 미치지만 오사카부라고 불리는 인근 권역을 합치면 900만, 좀 더 광역화한 오사카-간사이 권역을 포함하면 2300만에 이르는 인구가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1876년 오사카에서 교토를 잇는, 지금은 JR철도회사가 계승한 관영 철도가 생겼지만, 철도 붐에 따라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철도 회사도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1899년 7월 셋츠전기철도 주식회사에서 한신전기철도 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꾼 민간 기업이 1905년 4월에 오사카의 데이리바시와 고베의 산 노미야 간 영업을 시작했다. 한신전기철도 주식회사는 일본의 유명한 프로 야구단인 한신 타이거즈의 모회사이기도 하다. 한신 타이거즈의 성적에 따라 한신 철도 회사의 주가가 오르내리기도 할 정도였다. 이외에도 케이한전철 주식회사, 한큐전철, 긴데쓰 철도라고도 불리는 긴키니폰철도 주식회사, 난카이전철 주식회사 등 여러 사철 회사들이 오사카와 주변 지역에서 철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회사와 상당 부분 노선이 유사한 JR서일본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경영 목표로 세웠다.
"철도 경쟁 체제가 제 딸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사고가 난 후쿠치야마선은 오사카 서북부 방면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시민들이 이용하는 철도 노선이었다. 사철인 한큐전철과 경쟁 관계였다. JR서일본 경영진은 사철과 벌이는 '전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전에 계획된 열차 운전 시각표에서 1초라도 늦으면 사철에 승객을 빼앗기게 된다며 기관사들을 압박했다. 게다가 열차 운전 시간을 개정해서 가뜩이나 빡빡한 열차 운행 시간을 단축하기도 했다. 알짜배기 고속철도 노선을 JR동해와 JR동일본 회사에 뺏기고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낮은 산요신간센을 갖게 됐던 JR서일본의 경영진은, 부족한 부분을 오사카 광역 철도의 수익으로 회복하고자 했다.
JR서일본 경영진이 사용한 방법은 채찍이었다. 열차가 제시간보다 늦으면 초 단위로 따져서 기관사들에게 사유서를 쓰게 하거나 징계를 내렸다. 회사는 승객 서비스 강화를 목적으로 '정시 운행 준수' 지침을 내렸고 열차의 도착과 출발 시각을 15초로 정해 이를 초과할 경우 1초 단위로 보고하도록 했다. 열차 운행 편수가 많은 대도시 광역 전철망에서 운행 시간을 칼같이 지킨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승객들은 승강장으로 통하는 계단 쪽으로만 몰렸다. 한두 곳의 열차 출입문에 승객들이 집중되면 출발은 지연되기 일쑤다. 기관사들이 열차 운행 과정에서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사실 많지 않다. 가장 흔한 방법은 선로가 허용하는 최고 속도로 달리다가 정차역에 가까워지면 제동 레버를 높은 단수로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는 운행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게 해서 피로도를 높이게 된다. 그러면 실수할 가능성도 많아진다.
JR서일본의 기관사들은 회사 측의 압박에 수시로 제한 속도를 넘기는 운행을 했다. 수천 명의 승객이 타고 있는 열차에서 속도 위반이 관행처럼 일어났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열차 운행 밀도가 높은 대도시 권역 전철임에도 불구하고 사고 노선에서는 구형 신호 체제인 ATS-S 방식을 쓰고 있었다. 신형인 ATS-P 방식이 달리는 열차의 속도를 판별해 비상 정차를 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ATS-S 방식은 단순 경고만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안전 차원에서는 매우 취약한 체제였다. 수익성 위주의 경영 목표 아래에서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시스템 개선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버렸다.
후지사키 씨는 직접 사고를 경험하진 못했지만, 그녀의 딸이 열차 맨 앞칸에 서 있다 사고를 당했다는 생각에 7년이 지나도록 열차의 맨 앞 칸에 타지 못한다. 후지사키 씨에게 시간은 약이 아니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사고 당시의 일들이 더 생생하게 기억나 고통스럽다고 했다. 후지사키 씨는 사망자 유족들을 중심으로 한 '4·25 네트워크'라는 이름의 시민 단체를 만들어 죽은 딸을 대신해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나섰다. 후지사키 씨는 잊혀서는 안 될 중요한 사건을 '한때의 사고'로 얼른 덮어버리려는 일본 사회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해 시민 단체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했다. 희생자 가족으로서 당연한 의무라는 것이다. 후지사키 씨는 눈물로 충혈된 눈에 힘을 주고 단호하게 말했다.
"과도한 철도 경쟁 체제가 내 딸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철도 민영화가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이지요."
유족 대표들과 우리 일행은 사고 현장을 찾았다. 오사카 역에서 JR고베선을 타고 사고 열차가 도착할 역이었던 아마가사키 역으로 갔다. 아마가사키 역에서 사고 현장까지는 걸어서 20여 분 거리. 역 주변의 대형 빌딩들을 지나자 전형적인 일본풍의 집들이 왕복 2차선 도로를 끼고 이어졌다. 5월이었지만 머리 위의 태양은 뜨겁게 대지를 달궜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때쯤 사전 조사로 이미 낯이 익은 한 동짜리 맨션아파트가 보였다. 이 맨션아파트에는 사고 이후 아무도 살지 않는다. JR서일본이 입주자들에게서 이 맨션아파트를 사들였기 때문이다. 아파트 입구는 JR서일본 소속의 청원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입구를 지나 마당으로 들어가면 사고 현장이 있는데 앞에는 분향소가 설치되어 있고 양복 정장을 입은 JR서일본 직원들이 방문자들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절을 올렸다.
사고 현장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지만, 아직도 그 흔적은 선명히 남아 있다. 아마가사키 역으로 달리던 전철이 들이받은 맨션아파트와 선로 간의 거리는 6미터에 불과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는 일본 도시 철도의 특징이기도 하다. 곡선에서 선로를 이탈한 열차는 주차장으로 쓰이는 1층 벽을 들이받았다.
아파트와 철도 노선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시멘트 경계 블록에는 사고 과정에서 생긴 바퀴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다. 지금 이 바퀴 자국 위에는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투명 아크릴 판으로 보호관을 설치해 놨다. 사고를 지우기 위해 노력하는 JR서일본은 몰래 바퀴 자국들을 지웠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유족들이 JR서일본 측에 항의하고 더 이상의 사고 지우기 행위를 못하도록 했다. 사고 아파트를 구매한 JR서일본이 사고의 트라우마를 되새기게 한다며 아파트 철거 의사를 공공연히 내비치는 것도 사고 지우기의 일환이라고 유족 대표들은 말했다.
준비한 꽃을 바치고 고개 숙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중에도 바로 옆 철길에서는 전철이 굉음을 내며 사고 현장을 끼고 돌아나갔다. 사고 현장의 선로는 아파트를 아치형으로 감싸고 있다. 아마가사키 역을 향해 오른쪽으로 꺾여 있는 곡선 철길이다. 철도에는 곡선에 따른 제한 속도가 있고 기관사들은 이 제한 속도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선로의 등급에 따라 곡선에서 낼 수 있는 속도가 모두 다르다.
'철도 왕국' 일본에서 철도는 어떻게 재앙이 됐나
기관사들은 신입 부기관사들에게 달리는 열차에서 가끔 이 열차 곡선에 따른 제한 속도에 대한 퀴즈 문제를 낸다. "경부선 곡선 반경 400에 대한 제한 속도는 몇이지?" 또는 신설한 선과 구 선로가 혼합되어 있는 노선인 장항선을 달리기 전 "장항선 구 선로 곡선 반경 300에 대한 속도는?" 같은 식이다.
철도에서 곡선 반경이라 함은 곡선을 이루는 원호에서 중심까지 이어진 반지름에 대한 연장거리를 말한다. 숫자가 적을수록 급한 곡선이다. 고속철도 경부선의 최소 곡선 반경은 7000미터로 거의 직선에 가까워 곡선에 따른 속도 제한을 받지 않고 최고 속도를 낼 수 있다. 사고 현장의 곡선 반경은 300미터이다. 급한 곡선은 철도 부설이 쉽지 않은 산악 지형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300미터정도의 급한 곡선은 평지의 대도시 권역에서 흔치 않은 선로다. 사고 열차는 해당 노선 곡선 반경 300의 제한 속도인 시속 70킬로미터(k/h)를 훨씬 넘긴 시속 116킬로미터로 진입했다. 기관사는 왜 목숨처럼 지켜야 할 제한 속도를 무시하고 속도를 올렸을까?
사고가 일어나기 몇 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운전 경력 11개월, 23세의 젊은 초보 기관사는 이타미 역에 진입하면서 승강장을 지나치는 일명 '오버런'을 했다. 전철을 운전하는 기관사가 정차 위치를 못 맞추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승강장 정차 위치에 맞추기 위해 열차를 후진시키는 동안 기관사의 눈에 하늘은 노랗게 보였을 것이다. 1초 단위로 지연 사유에 대한 보고를 해야 하는 실정에서 회사로부터 당할 문책 생각 때문에 기관사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열차를 후진해서 문을 여닫고 다시 출발하는 동안 2분이 지연됐다.
이 지연된 2분을 만회하기 위해 기관사는 출력을 최고로 높였다. 2분 정도 지연된 것 가지고 왜 그렇게 무모한 운전을 한 것이냐는 비판이 있었지만, JR서일본에는 단 30초의 지연도 죄악시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타미역을 출발한 기관사가 속도를 올리도록 압박한 또 다른 요인도 있었다. 사고 열차는 다음 역인 아마가사키 역에서 JR고베선을 달리는 열차에 승객이 환승할 수 있도록 연결 시간표가 짜여 있었다.
사고 열차가 2분이나 지연되었기에 JR 고베선 열차는 환승객을 위해 2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되면 사고 기관사가 JR 고베선의 지연 운행까지 책임 추궁을 당하게 된다. 지연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는 운전을 철도에서는 회복 운전이라고 부른다. 선로의 조건에 따라 계속 변하는 최고 속도와 차량이 허용하는 속도를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회복 운전에 돌입할 경우에는 운전에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기관사의 머릿속은 온통 오버런의 책임을 어떻게 면할 것인가에 쏠려 있었다.
기관사는 이타미 역에서 맨 뒤 운전실에 승차한 차장에게 연락해 자신이 승강장을 지나친 오버런 거리가 70여 미터였지만 8미터로 회사에 보고하도록 사정했다. 영국 철도 민영화 이후에도 지적된 문제지만, 경쟁 체제와 민영화의 폐해 중 하나는 이토록 책임 회피성 사고 은폐가 수시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차장이 기관사의 오버런 거리 축소 요청 전화를 받고 있을 때 승강장에 서 있던 승객이 차장에게 질문했다. 차장은 전화를 끊었다. 차장은 관제실에 오버런 거리가 8미터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기관사는 차장이 자신의 요구를 거부했다고 생각하고 더 위축되었을 것이다. 이타미 역을 출발한 5418M 열차는 쏜살같이 내달렸다. 기관사가 출력을 제어하는 주간 제어기 레버를 최고치로 올렸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도 기관사는 운전에 집중하기보다 관제실과 차장의 무선 교신에 집중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실수에 대한 문제들이 무선 교신으로 보고되는지 신경을 썼던 것이다. 열차의 맨 앞에 탔다가 기적적으로 생존한 사람들의 목격담(일본의 전철은 객차 안에서 기관사를 볼 수 있다)과 운전 기록 장치에 의하면 급커브길에 진입하기 바로 전 관제실과 차장의 무선 교신이 이루어지는 40초 동안 기관사는 어떤 운전 조작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무선 교신 내용을 메모지에 적으려고까지 했다.
기관사가 이렇게 병적으로 자신의 실수에 집착하게 된 원인은 JR서일본의 반인간적 노무 관리 때문이었다. 업무 과정에서 작은 실수를 하면 바로 인사고과에 반영시키고 자존심까지 짓밟는 일들이 일상화됐다. 기관사들은 열차 다이아그램이라고 불리는 운행 시간표에 따라 출퇴근을 하는데, 작은 실수라도 한 기관사는 일근 교육을 시킨다. 승무를 하지 않고 일정 기간 사무실 근무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근 교육은 사고 재발을 방지한다는 미명 아래 회사 측의 관리자들이 프로그램을 집행한다. 사실상 징벌과 마찬가지다. 일본 철도 노동자들은 일근 교육을 한국 군사정권 시절의 삼청교육대를 생각하면 맞을 것이라고 했다. 모욕적 언사는 기본이다. 온종일 회사의 경영 목표 같은 것들을 수십 쪽씩 노트에 쓰게 하고 검사를 했다. 일근 교육은 보통 한 달을 시킨다. 기관사들은 수치심은 물론, 승무수당 삭감과 성과급 삭감도 감수해야 했다. 승진에서 배제됨은 물론이다.
교토역에서 50초를 늦췄다고 일근 교육을 받은 하토리 기관사는 2001년 9월 자살했다. JR서일본에서 굴욕적인 일근 교육을 못 견뎌 자살한 사람이 20명이나 됐다. 이들 대부분은 열차에 뛰어들거나 차량 기지에서 목을 맸다. 이렇게 목숨을 끊은 것은 회사에 대한 노동자들의 마지막 항의였다. 열차 사고가 일어나기 6개월 전 국회에서 일근 교육의 문제가 지적되었으나 민간 회사의 고유한 경영에 대한 영역이라며 무시되었다.
사고 열차의 기관사는 이미 일근 교육을 3번이나 받은 전적이 있었다. 끔찍한 일근 교육을 모면하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달리도록 회사가 부채질을 한 셈이었다. 사고 1주년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제에서는 사망자 107명 중 106명에 대한 추모식만 열렸다. 무모한 운전을 한 기관사를 제외했기 때문이다. JR서일본 측에서도 사고 기관사는 살인자이지 희생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악명 높은 노무 관리…한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지난 2012년 1월 서울에서 천안까지 이어진 경부선 전철 노선의 오산대역에서 기관사의 착각으로 정지 위치를 200미터 지나서 열차가 섰다. 이런 오버런 사고는 철도를 운행하는 나라라면 어디에서든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특히 한 노선에 수십 개의 역이 있고 2~3분에 한 번씩 정차와 운행을 반복하는 도시 광역 전철이나 지하철 같은 경우에는 아차 하는 순간에 정차 위치를 벗어나거나 아예 통과하는 일도 벌어진다. 이런 오버런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기술적 장치나 기관사의 주의를 각성시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2012년의 오산대역 통과 사고는 회사의 분위기나 경영진의 마인드가 어떤가에 따라 노동자가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잘 보여주는 사고다. 당시 철도공사의 사장은 허준영이었다. 평생을 경찰에서 보낸 사람이 어느 날 철도공사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정권의 수장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의 공기업 정책은 '공기업 선진화'의 이름을 달고 진행됐다. 철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사장으로 취임시키는 것이 어째서 '선진화'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하산을 막을 수는 없었다. 허준영 사장이 취임하자마자 철도 현장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일벌백계주의'였다. 아무리 사소한 사고라도 사고 유발자에게 엄격한 책임을 물어 중징계를 내림으로써 사고를 예방하겠다는 것이었다. 허준영 사장의 엄벌은 예외 없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사고 관계자에게 중징계를 내려도 사고가 줄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징계를 피하기 위한 은폐 시도도 일어났다.
오산대 역을 통과한 기관사는 허준영 사장 체제의 엄벌주의 분위기 속에서 지연된 시간을 만회하고자 오산대 역으로 후진을 했다. 이렇게 운행 중 후진을 하는 것을 퇴행 운전이라고 하는데 관제실의 통제에 따라 뒤 열차는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안전거리에서 대기하게 된다. 일부 언론의 "위험천만한 역주행" 같은 보도는, 철도 운행 시스템을 아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저널리즘의 가벼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산대역으로 후진해 승객들을 내리고 태워야 하는 기관사는 애가 탔다. 어떻게든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려고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열차가 정상방향으로 진행할 때와 달리 비상조치로 퇴행 운전을 할 경우 엄격한 제한 속도가 있고 이를 위반하면 차장이 비상 제동을 걸거나 열차의 자동 정지 장치가 동작하게 되어 있다. 후진을 하던 열차가 속도가 높아지자 비상 제동이 걸렸다. 열차는 다시 섰다. 비상 제동이 걸리면 이 제동이 풀리는 시간은 일반 제동 시보다 더 오래 걸린다. 그만큼 기관사의 속은 타들어 갔다. 이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되었고 열차는 예정 시각보다 3분이 늦게 됐다.
기관사는 운행을 마친 후 바로 직위 해제를 당했고, JR 서일본의 일근 교육과 유사한 정신교육을 받았다. 독방에서 운전 규정을 노트에 베끼고 죄인처럼 지내며 해고에 대한 걱정으로 시간을 보냈다. 한 달 후 열린 징계위원회에서 감봉 3개월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과거에 비추어 보면 이례적인 중징계였다. 사고 기관사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같은 사업소 동료들에게도 경고가 내려진 것이었다. 자책감과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로 승무에 나서는 일이 지옥 같았다. 기관사는 운전 업무가 힘들다며 전직 신청을 했으나 쉽게 처리되지 않았다. 결국 기관사는 오산대역 사고 5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후쿠치야마선 사고를 만든 환경이 한국에서도 무럭무럭 피어나고 있었다. (관련 기사 : 자살한 기관사의 마지막 기록, "미친 듯이 지적 확인")
후쿠치야마선 사고를 낸 기관사는 철도 경력 11개월의 23세 청년이었다. 한국 철도의 경우라면 불가능하다. 인력 구조조정 문제로 젊은 인력을 거의 뽑지 않아 왔던 면도 있지만, 한국에서 기관사가 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철도 경력과 다년간의 부기관사, 그리고 차장 승무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JR서일본은 민영화 과정에서 효율화의 명분으로 인력을 대폭 감축했다. 또 다른 JR 회사들과 달리 장기간에 걸쳐 정년 퇴직이 발생할 때 신규 채용을 실시하여 숙련된 운전 기술을 가진 베테랑 기관사들이 적었다. 이래저래 민영화 과정은 철도 안전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하나하나 해체하는 과정이었다.
사고가 난 뒤에야 JR 서일본은 압축했던 열차 시각표를 느슨하게 조정했다. 승무사업소 복도까지 들렸던, 기관사들에 대한 관리자들의 폭언도 없어졌다. 악명 높았던 일근 교육도 바뀌었다. 인력 부족으로 기관사들이 피로를 호소했음에도 꿈쩍하지 않던 회사가 1.5배의 인력을 충원했다. 비로소 기관사들은 충분한 휴식을 한 뒤에 열차 운전에 나설 수 있었다. 수익을 최고의 가치로 둔 민영화된 일본 철도는,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을 보고 나서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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