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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독식' 연봉제를 한국GM이 '손 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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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승자독식' 연봉제를 한국GM이 '손 본' 이유

[박점규의 동행]<27> 한국지엠 사무직, 15년 만에 연봉제 폐지 합의 의미

노동 소식이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노동조합의 사회적 힘이 미약하고 노동을 천대하는 나라에서 보수 언론의 '노조 때리기' 기사가 아니라 노사 간 합의가 신문 1면을 차지하는 일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지난 4일 한국지엠 노사가 연봉제를 폐지하고 호봉제로 전환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한겨레>와 <경향신문> 1면을 차지했습니다. '조중동'과 공중파 방송은 외면했지만 연봉제 폐지 합의의 파장은 작지 않았습니다.
노사 합의 직전 고용노동부는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을 발표하며 전체적으로 연공급 대신 직무·성과급을 늘리는 방식을 제안했는데 거꾸로 연봉제를 없앴으니 한국지엠 사무직 노동자들이 박근혜 정부를 멋지게 한 방 먹인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를 멋지게 한방 먹인 한국지엠 사무직
세간의 관심보다 현장의 열기는 더 뜨거웠습니다. 지난 9일, 점심을 마치고 나오는 사무직 노동자들의 손에는 노사 잠정합의 내용이 실린 노조 소식지가 하나씩 들려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소식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삼삼오오 모여 연봉제 폐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연봉제 폐지 합의의 주역인 금속노조 한국지엠 사무지회 이창훈(44) 지회장은 1995년 대우자동차 엔진개발부에 입사했습니다. 말단 사원 시절 구제금융사태가 터졌습니다. 잘 나가던 대우그룹이 부도가 났고, 대우자동차는 생산직 노동자 1750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정리해고를 했습니다. 2001년 내내 대우차 부평공장은 전쟁터였습니다.
생산직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는 뜨거운 관심사였지만 3000명에 가까운 사무직 노동자들은 세간의 무관심 속에 공장을 떠나야 했습니다. 일도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임원들의 비위를 맞추지 못했던 그의 사수 선배는 사무직도 노동조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회사를 떠나갔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어 2002년 지엠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하고, 정리해고를 당했던 생산직 노동자들이 차례로 공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사무직 노동자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지엠은 1999년부터 과장급 이상에서만 시행하던 연봉제를 2003년 전체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확대했습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사무노동직장발전위원회(사무노위)를 만들어 권리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노동3권이 없는 조직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생산직노조(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는 사무직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2005년 사무직 노동조합을 만들었지만 생산직노조 규약에 사무직도 가입 대상이기 때문에 복수노조 금지 조항으로 합법 노조가 될 수 없었습니다.

ⓒ연합뉴스

대우그룹 부도, 말없이 공장을 떠나간 사무직 노동자들
회사는 2008년 지엠 부도를 이유로 만만한 사무직 노동자들의 시간 외 수당을 삭감해 연봉을 10% 줄였습니다. 2010년에는 북미식 임금 체계인 '베리어블 페이'(Variable Pay)라고 불리는 연봉제를 시행하면서 전체 사무직을 5등급으로 나눠 최하 등급은 임금을 동결하고, 최상위 등급은 20% 인상했습니다. 입사 동기 사이에 연봉이 1000~2000만 원씩 차이가 나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는 노사 협상에 따라 지급되는 성과급까지 차등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 회사는 생산직노조와 합의한 성과급 700만 원 중 사무직 노동자들에게는 200만 원만 지급했습니다. 언론보도를 본 부모님은 물론 아내도 200만 원밖에 받지 못했다는 얘기를 믿지 않아 자존심마저 뭉개지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입사 동기들은 차장을 달고 있지만 이창훈 지회장은 대리입니다. 노조 활동을 이유로 2010년과 2011년 임금이 동결돼 2011년 연봉이 채 4000만 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근속연수의 생산직 노동자들보다 월급이 적었고, 높은 등급을 받은 동기와는 2000만 원 정도 차이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임원들이 몇백 명씩이나 되는 직원들의 인사 고과를 매긴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고, 아무런 기준과 원칙도 없이 학연과 지연, 친소 관계에 따라 정해지는 등급은 사무직 노동자들의 자존심을 짓밟았습니다. 굶주림보다 더 참기 힘든 상대적 박탈감을 견디다 못해 회사를 그만두는 노동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연봉제가 수시 구조조정의 수단이 된 것입니다.
구조조정의 수단이 된 연봉제
사무직노조 700명의 조합원들은 6년 동안 법외노조로 온갖 탄압을 받으며 고난의 시기를 견뎌냈습니다. 2011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7월 1일 복수노조 시행으로 노동3권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직노조는 성과급 차등 지급에 맞서 싸우면서 대대적인 노조 가입 운동을 벌였고, 사무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창훈 지회장은 2011년 9월 생산직 노조지부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을 만나 사무직과 생산직이 하나의 노조로 뭉치자고 제안했습니다. 11월 28일 마침내 한국지엠지부 대의원대회에서 1사 1조직 규정 개정안이 통과됐습니다. 사무직노조는 한국지엠지부 산하 사무지회로 편제됐고, 생산직노조의 울타리가 생기자 사무직들이 대거 노조에 가입했습니다.
2012년 노사 협상에서 사무직노조 가입 범위를 임원과 팀장, 노무 인사를 제외한 사무직원으로 확대하는 합의를 이뤘습니다. 전체 사무직 5900명 중에서 4600명이 가입 대상이 됐고, 현재 90%에 육박하는 4050명이 사무지회 조합원으로 가입했습니다.
한국지엠지부 사무지회는 금속노조는 물론 제조업 내에서 가장 큰 사무직노조가 됐습니다. 공장 밖에 있었던 노조 사무실은 노동조합 건물 3층에 어엿한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7명밖에 없었던 상근 간부는 27명으로 늘어났고,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노조 활동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생산직 1만 명과 사무직 4000 명의 통합은 노동조합의 힘을 배가시켰습니다. 조직력과 투쟁력을 가진 생산직노조와 회사에 대한 정보력과 정책적 능력을 갖춘 사무직노조가 만났기 때문입니다.
생산직노조와 통합, 사무직 90% 노조 가입
연봉제라는 악마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무직 노동자들의 꿈은 2013년 협상에서 이뤄졌습니다. 사무지회는 회사와 공동으로 비조합원까지 연봉제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80%가 넘는 노동자들이 성과 중심 연봉제와 평가 및 승진 제도를 '불신한다'고 답했고, 새로운 임금체계로 연공급제를 선호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노조는 이를 근거로 교섭에서 회사를 끈질기게 압박했습니다. 자동차산업은 혼자만 잘해서 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인사평가 틀이 없는 상태에서 평가자 주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으며, 차등을 심화하게 되면 협업 구조가 무너지고 장기적으로 볼 때도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연봉제라는 무기를 쉽게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생산직과 같이 20일 동안 파업을 했습니다. 생산직과 달리 사무직은 파업을 해도 개인의 업무를 집에 가서라도 해야 하지만 파업의 경험은 사무직 노동자들을 단련시켰습니다.
마침내 2013년 '인위적인 정리해고를 하지 않는다'는 고용 안정 협약과 함께 연봉제 폐지와 호봉제 실시라는 합의를 이뤄냈습니다. 이후 노사는 8개월 동안 30여 차례의 논의를 거쳐 지난달 31일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합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 ⓒ연합뉴스

20일 파업 연봉제 폐지·고용안정협약 합의
노조는 조합원 설문조사를 토대로 "전체 사무직이 연공급제를 기초로 임금인상을 이루고, 그동안 차별 때문에 확대된 직급 간 임금 격차를 축소하는 등 왜곡된 임금체계를 바로잡는 것"을 사무직 임금체계 개편의 목적으로 정했습니다. 기존 임금이 축소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했고, 인사 평가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동일 직급과 연차의 노동자들이 받던 개인 기본급의 평균을 '기준 기본급'으로 정해, 승급 및 임금 인상액을 결정하는 기준을 삼았고, 생산직 노동자들의 호봉 승급분처럼 매년 기준 기본급의 1.38%가 인상돼 최소한의 생활임금을 보장하도록 했습니다.
조합원들의 설문조사 결과 "연공급제를 기초로 하되, 일정 부분 성과를 반영하는 임금체계"를 원했기 때문에 임금인상과 승급·승진은 기준 기본급을 기준으로 하되, 성과급, 휴가비, 수당 등은 기존에 받던 개인 기본급을 기준으로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노사 간에 5% 임금 인상 합의가 이루어져도 낮은 평가를 받은 사무직은 임금이 동결되고, 높은 평가를 받은 사무직은 20% 임금 인상이 되는 일은 사라지게 됐습니다. 올해부터는 5% 임금 인상이 합의되면 전체 인원의 80% 이상인 '기대 수준 달성' 직원은 5%가 인상되고, 전체의 15% 이내인 '기대 수준 초과 달성' 직원은 6.38%, 전체의 2%인 '기대 수준 부분 달성' 직원은 4.32%의 임금인상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외에도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한 방안, 평가의 공정성을 제고하기 위한 방안, 승진 제도 개선 방안 등이 합의됐습니다. 현재 사무직노조는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진행하고 있으며 오는 16~17일 찬반 투표에서 통과되면 한국지엠 사무직은 15년 만에 연봉제를 폐지하게 됩니다.
15년 만에 연봉제 폐지
연봉제는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야만적인 자본주의의 상징이었고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회사는 연봉제를 통해 사무직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스스로 회사를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통상임금을 축소하기 위해 3월 19일 장기 근무자의 임금이 오르는 연공급을 폐지하고, 상여금을 능력별 생산성에 따라 차등화하고 성과급도 차등 지급하라는 임금체계 개편안을 발표했고, 경총은 완전 연봉제 형태의 임금체계를 가이드라인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려는 총공세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지엠 사무직 노동자들의 연봉제 폐지, 호봉제 도입은 거대한 물줄기의 흐름을 바꾸는 소중한 합의입니다.
한국지엠 사무지회는 "성과연봉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많은 기업과 경제계에 한국지엠 사무직의 새로운 사례가 노동자와 기업의 동반 성장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창훈 지회장은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는 사업장의 노조들과 힘을 합쳐 비인간적인 연봉제를 없애는 운동을 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려고 합니다. 일터를 전쟁터로 만들고, 동료와 선후배를 적으로 만드는 성과 연봉제를 확산시키려는 정부와 자본에 맞서 인간다운 일터를 만들기 위한 운동입니다.
비인간적인 연봉제 없애는 사회적 운동으로
4월 한 달 동안 부평 2공장은 20일 중 13일만 근무합니다. 유럽 수출 물량이 철수하면서 일감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회사는 1공장에서 소형차와 중·대형차의 혼류 생산을 흘리고 있습니다. 한국지엠 세르지오 호샤 사장이 1월 9일 외국인 투자기업 오찬에서 한국 철수설을 부인했지만 노동자들은 조만간 현실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생산직과 사무직 노동자의 단결은 시나브로 다가오는 위기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15년 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사태 때는 회사의 구사대가 되어 생산직 노동자들과 맞서야 했고, 결국 토사구팽당했던 사무직 노동자들이 생산직과 하나의 노조로 뭉쳐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창훈 지회장은 "사무직 노동자들의 연봉제 폐지를 발판 삼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생산직 노동자들의 월급제 실시와 전체 직원의 고용안정을 위해 싸워나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지엠 사무직 노동자들은 회사의 꼭두각시 노릇을 거부하고, 당당한 노동자로 노동조합으로 단결해 10년의 세월을 싸웠습니다. 15년 동안 유령처럼 일터를 지배해 온 승자독식의 연봉제를 바꿔낼 수 있었던 힘이 바로 민주노조였다는 사실을 전국의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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