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
<7>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8> 10월유신 41년…더 무서운 괴물이 솟아나고 있다
<9>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
<10> 러시아혁명의 교훈, 대중을 외면하면 진보도 없다
<11> 전태일과 박정희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12> 미국이 한국 독립 낙점? 유영익의 기묘한 이승만 띄우기
<13> 개화파의 역사적 과오, 안중근이 씻어 내다
<14> 망령 되살린 수구의 '종북' 칼춤…6.29의 저주 풀어야
<15> 억압과 저항의 '선사 시대' 넘어 '민중기원'은 온다
프로야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나는 야구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고 특정 팀의 팬도 아니지만 프로야구 경기 중계는 즐겨 보는 편이다. 누군가의 말이 아니라도 야구 경기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 잘 친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가는가 하면 빗맞은 타구가 안타가 된다. 잘 던진 투수가 타자들의 도움을 받지 못해 패전의 멍에를 뒤집어쓰는가 하면, 난타 당한 투수나 한 개의 아웃 카운트만 책임진 구원투수가 승리의 영예를 안기도 한다. 다른 모든 경기에서 공이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 무효가 되는데 유일하게 야구에서만 그것이 득점으로 인정된다. 그것도 때로는 4점을 한꺼번에 불러들이는 '대박'이 된다. 질질 끌려가다가도 한 방에 역전시킬 수 있는 그 비합리성은 우리 인생을 닮았다.
프로야구는 이 모든 우연과 비합리성의 발현을 세세한 부분까지 수치로 표현해 흥미를 유발한다. 그렇게 표현된 수치를 적절히 종합하면 결국은 더 나은 선수가 더 나은 성적을 내고, 더 나은 팀이 우승하게 마련이라는 '합리적'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면 팬들은 마음을 놓고 프로야구에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를 보낼 수 있게 된다.
1982년 3월 27일 한국의 프로야구가 개막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를 '3S'의 하나로 비판했다. 3S란 섹스(sex),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로, 전두환 독재 정권이 대중의 저항 의식을 호도하기 위해 조장한 탈정치적이고 선정적인 문화를 가리키는 조어(造語)였다. 프로야구 개막 경기에서 전두환이 시구를 하는 장면만으로도 이 말은 타당성을 입증받기에 충분했다. 막 시작된 컬러텔레비전 방송 덕분에 프로야구는 특유의 역동적인 매력에 더해 요란한 의상과 액세서리로 치장한 치어리더들의 율동이 어우러진 색채의 향연까지 선사하며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프로야구는 자신을 정권 유지 수단으로 악용한 독재 정권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몇 차례 위기를 겪기는 했으나 매년 관중 동원 기록을 경신하며 국민 오락으로 굳건한 자리를 굳혔다. 개막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프로야구를 3S라는 낡은 조어로 인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음부터 대성공을 거둔 지역 연고제의 흡입력에다 '각본 없는 드라마'로 일컬어지는 흥미진진한 승부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프로야구는 현대 한국인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는 블록버스터로 앞으로도 오랫동안 건재할 것이다.
독재 정권보다 오래 살아남은 한국 프로야구
한국 사회가 개방 일로를 걷기 시작한 20세기 말에는 프로야구도 국제화되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뛰며 국위를 선양하는 한국 선수까지 나타나 팬들의 즐거움은 배가되었다. 메이저리그에서 덩치 큰 외국 선수들과 겨루며 특급 투수 반열에 오른 박찬호는 IMF 위기로 상처받은 국민의 가슴에 커다란 위안거리를 안겨 주었다. 최근에는 추신수, 류현진이라는 거물급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를 휩쓸며 매일 인터넷과 신문 지상을 풍요로운 이야깃거리로 수놓고 있다.
프로야구의 성장 덕분에, 그리고 한국인 메이저리거의 활약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고 있는 걸까? 이전에는 취미로 미국 야구 잡지를 뒤적이던 마니아들이 유명 해설자가 되어 한국인 메이저리거는 물론 메이저리그의 모든 팀과 선수들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고 있다. '야구 여신'으로 불리는 미녀 아나운서들이 매일 밤 안방의 시선을, 심지어는 야구팬이 아닌 시청자들의 시선까지 끌어모으는 일도 어느덧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어 버렸다. 구체적인 수치는 모르겠으나 프로야구와 관련된 시장이 초창기보다 몇 십 배나 몇 백 배 팽창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경기 자체만이 아니라 야구 경기장 안팎에서 흘러나오는 가십거리와 풍문도 야구를 즐기는 대중에게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의 원천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언론들은 앞다투어 야구 선수들의 훈련, 부상, 연애, 결혼, 때로는 추문까지 낱낱이 들추어내며 조회 수와 구독 수를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 경기 외적인 즐거움의 요소 가운데 하나가 '스토브리그'이다. 경기가 없는 겨울철에 난롯가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겨루기 정도로 풀이하면 될까? 그것은 한마디로 돈을 놓고 벌이는 줄다리기이다. 미디어는 그것까지도, 아니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중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소재가 된다면서 필사적인 취재 경쟁을 펼친다. 구단과 선수들은 (주로 구단이겠지만) 그러한 언론의 관심을 협상 전략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노릇이다. 작은 회사에서도 동료 직원들이 연봉을 얼마나 받는지 궁금한 게 인지상정인데, 대중의 사랑을 받는 야구 선수들이 어느 정도의 대가를 받는지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 궁금증을 덜어 주려는 언론의 노력은 가상할 뿐 아니라 고맙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런 정보들이 공개되면서 벌어지는 현상은 실망스러움을 넘어 분노를 안겨 준다.
메이저리그에서 자유계약(FA) 선수가 된 추신수의 연봉 협상은 지난겨울을 뜨겁게 달군 스토브리그의 백미였다. 7년에 1억3000만 달러라는, 가늠하기조차 힘든 거액으로 막을 내린 이 협상 '전쟁'은 그 과정에서 조그만 정보만 새어나와도 모든 언론에 '특필'되었다. 그 전쟁이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자 언론은 1억3000만 달러가 얼마나 큰돈인가, 추신수가 한 번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얼마를 버는 셈인가 등등 온갖 흥미로운 계산을 내놓기 시작했다. 추신수가 그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렸는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인가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들도 양산되었다.
최저 임금 노동자의 1000배가 넘는 연봉이 당연? 이건 미친 짓이다
그런데 언론들은 대중이 추신수의 '초대박 드라마'를 그저 흐뭇하게, 가슴 벅차게 받아들이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대중이 프로야구의 명승부를 보고 즐기는 마음으로 추신수의 대형 계약을 보고 즐긴다고 생각할까? 또는 대중이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한국과 미국의 소득차를 감안하더라도 대중을 위로하고 즐겁게 하는 슈퍼스타라면 최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1000배가 훌쩍 넘는 연봉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동종 업계의 평범한 선수들에 비해서도 100배 넘게 버는 것이 정의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건 완전히 미친 짓이다. 한 사람의 뛰어난 영웅과 수많은 평범한 민초들 사이에 이처럼 심연과도 같은 간극을 만들어 놓고, 당장 하루하루 살아갈 일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입을 떡 벌리고 그 영웅을 숭배하고 찬양하게 만드는 광란극이다.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메이저리그도, 그런 미친 짓을 마치 정정당당한 야구의 승부와 동급이나 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보도하는 언론도, 그런 상황을 자연의 질서이기나 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일부 대중도 (그런 이가 있다면) 미쳤다.
언젠가 출판 강연에서 출판계 종사자와 프로야구 선수를 비교한 적이 있었다. 프로야구에서는 받는 돈의 액수에 합당치 않은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잘하는 선수가 더 많은 돈을 버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출판계에서는 반드시 뛰어난 작가나 편집자가 더 많은 돈을 벌지는 않는다. 그러니 돈 버는 베스트셀러 좇지 말고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힘쓰자는 '고상한' 소리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프로야구의 그 '합당치 못한 차이'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억 소리 나는 그 천문학적 차이는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차이이다. 추신수에게 거액을 안겨준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주는 오히려 비교적 싼값에 대선수를 얻었다는 평까지 들었다. 메이저리그 자본은 냉정한 계산에 의거해 추신수가 창출할 수 있는 시장 가치에 걸맞은 연봉을 산출하고, 눈물 젖은 식빵으로 끼니를 때운다는 마이너리그 선수에게는 그가 창출할 수 있는 시장 가치에 맞는 비용을 지급한다. 아니, 어쩌면 수많은 마이너리그 선수에게 지급되는 쥐꼬리 연봉은 시장 가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생존을 유지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복지 비용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따지면 박찬호든 추신수든 그들 때문에 5000만 한국인과 전 세계 야구팬이 메이저리그 자본에 안겨주는 이윤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돈을 받은 셈이다. 세계 최고의 연봉을 받는 축구 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자신을 가리켜 노예라고 했다가 언론의 십자포화를 맞은 적이 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파악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추신수도 메이저리그 자본과 벌여야 했던 도박 같은 협상 과정을 술회하고 '먹튀'가 될지도 모른다는 인간적인 부담감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최선을 다해 최고의 반열에 오른 그가 왜 그런 도박판에 휘둘리고 부담감에 시달려야 하는가?
추신수나 호날두에게 지급되는 거액의 '파이트머니'는 대중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들 덕분에 그들의 거액 연봉보다 훨씬 더 많은 자산을 갖게 된 자본가들 역시 그 돈을 대중으로부터 거둬들였다. 그들은 깎아지를 듯이 높은 곳에 정점이 있는 피라미드를 만들어 그 정점에다 추신수 같은 대스타를 올려놓고 춤추게 한다. 피라미드를 기어오르는 개미떼 같은 대중은 그들을 올려다보며 잠시 현실을 잊기도 하고 목이 뒤로 꺾여 떨어져 내리기도 한다. 이런 장면이 일상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연출되면서 현대의 파라오들은 피라미드의 영속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가증스러운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나날이 무너져 내리는 대중은 고사하고 추신수인들 마음 편하게 운동만 할 수 있을까? 그런 비극적인 상황, 그런 불편한 생각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언론이 경기 외적인 보도, 특히 스토브리그의 '광기 어린' 보도를 자제하면 될까? 격화소양(隔靴搔癢)일 뿐이다. 문제는 피라미드를 파괴하는 데 있다. 피라미드를 깎아내려 평평하고 널따란 운동장을 만들면 호날두는 그곳에서 노예라는 자괴감 없이 마음껏 공을 찰 것이고, 추신수는 '먹튀'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없이 마음껏 치고 달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안하게 피라미드에 매달려 있던 대중들이 구김살 없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마음껏 열광할 것이다.
그때 이 피라미드를 고안한 파라오들은? 우리 중의 하나가 되어 운동장에서 뒹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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