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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 사람들'이 폭도? "극우의 터무니없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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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 사람들'이 폭도? "극우의 터무니없는 얘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6> 해방과 분단, 열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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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분단, 열 번째 마당] 북한은 왜 전면전의 유혹에 빠져들었나

프레시안 : 일각에서 ‘대구 폭동’이라 부르는 10월항쟁(1946년), 그리고 1948년에 일어난 4.3사건과 여순사건에 대해 엇갈리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예컨대 '대구 폭동과 여순사건은 소련의 지령과 자금 지원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서중석 : 이 시기 자료를 관심 있게 살펴왔지만, 그런 내용을 담은 자료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 연구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나고 몇 년 후, '구소련의 비밀 해제 자료에 의하면 그 사건들은 소련의 지령과 자금 지원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이야기가 어느 일간지에 크게 난 적이 있다. 구소련이 (비밀) 문서를 무지하게 팔아먹던 때였다.

(그 신문을 본 후) 소위 근거로 제시된 소련 쪽 자료를 쭉 읽어봤지만, 그런 주장을 명확히 입증할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신문사에 전화까지 했다. 담당 기자를 불러가지고, 근거를 제시해보라고 했다. 머뭇거리면서 말을 잘 못하더라. 그래서 내가 '어떻게 이런 식으로 견강부회해서 낼 수가 있느냐. 현대사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알아야 할 때인데 이런 식으로 하면 되겠느냐'고 항의한 게 생각난다.

10월항쟁 이 부분은 브루스 커밍스도 연구를 통해 잘 밝혀놓았고 정해구 교수라든가 여러 사람이 아주 구체적인 연구를 해놨다. 그런 것들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그건 자연 발생적인 것이었다.

프레시안 : 자연 발생적이었다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사주를 받은 것이라면 한날한시에 봉기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경북에서 먼저 일어났다가 조금 있다가 경남에서 일어나고 한참 있다가 충남 일부, 충북 일부, 강원 일부에서 일어나고 또 그러면서 서울 부근, 개성 부근에서도 일어났다. 그러다 나중에 가서 전라도에서 일어나는데, 전라도에서도 처음에 일어나는 지역과 나중에 일어나는 지역이 또 다르다. 지령에 따른 것이라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일어날 수 있었겠나.

그래서 나도 내 책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개성 지구까지 포함해 서울 주변에서 일어난 것은 공산당 측의 지시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각 지역에서 다른 시간대에 일어난 것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건 지금까지 여러 연구가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4.3에 대한 오랜 왜곡

프레시안 : 4.3사건과 여순사건은 어떠한가.

서중석 : 4.3사건, 여순사건에 대해서도 얼마나 많은 연구가 이뤄졌나. 이 두 사건은 특히 (연구가) 많이 이뤄졌다. (그러나) 남로당 중앙당의 지시라고 할 만한 자료를 어디서도, 어떤 귀신도 못 찾아냈다. 이건 없는 것이 확실한 것이다.

다만 그전 역사 교과서에 그런 지시를 받은 것처럼 기술돼 있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제주 4.3에 대해 새로운 연구가 이뤄질 때 이 부분을 밝히는 데 굉장히 초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도대체 이것을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냐, 어디다 근거를 두고 이런 이야기를 했느냐(가 관심을 모았다). 그러면서 박갑동 쪽으로 넘어간 거다.

프레시안 : 해방 공간에서 남로당 지하 총책을 지냈다고 하는 박갑동은 1973년 <중앙일보> 연재를 통해 '4.3사건은 남로당 중앙당의 폭동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중석 : 박갑동 자신은 남로당 중요 간부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급 간부다. 남로당의 어떤 명단을 봐도 안 나오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중앙정보부에 포섭돼 있었다. 그러면서 해방 초기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에 대해서 참 많은 글을 신문에 쓰고 책도 내고 그랬다.

그래서 (6월항쟁 이후 4.3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던 이들이) 도쿄에 있던 박갑동한테 (중앙당 지령설에 대해) 알아봤다. 그런데 박갑동이 '나도 근거는 모른다'는 식으로 나왔다. 모처에서 나온 것이라는 식으로 주장했다. 그야말로 어이없는 주장이 되고 말았다. (<제민일보>는 1990년 박갑동이 전화 인터뷰에서 "중앙 지령설은 내 글이 아니고, 1973년 신문에 연재할 때 정보 기관에서 고쳐서 쓴 것"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여러 극우 인사들을 당황스럽게 만든 보도였다. 오랫동안 왜곡됐던 4.3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제민일보>의 노력은 <4.3은 말한다> 시리즈로 묶여 나온다. <편집자>)

프레시안 : 박갑동의 주장은 "4.3사건은 (…) 북의 지령으로 일으킨 무장 폭동 내지 반란"이라고 한 남재준 국정원장의 발언을 떠오르게 만든다. 지령을 내렸다는 주체를 남로당 중앙당이 아니라 북한으로 규정한 점을 제외하면, 박갑동의 주장과 닮은꼴이다. 다른 것을 하나 짚었으면 한다. 당시 무장 수준은 어느 정도였나.

서중석 : 미국 국무부 관리를 오랫동안 한 존 메릴이 많은 자료를 활용해 구체적으로 밝혔고 제주도 현지에서도 수많은 증언을 토대로 밝힌 것처럼, 당시 무장 부대라는 건 기껏해야 500명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대개 죽창으로 무장했다. 제일 좋은 무기라는 게 (낡은) 일본 99식 총이라는 건데, 그걸 가진 사람은 몇 명 안 됐던 걸로 자료에 나온다. 이런 걸 가지고 무장 폭동을 조직적으로 하려고 했다고 크게 강조하는 건 문제가 있다. 4.3에 대해선 오히려 다른 걸 물어봐야 한다.

▲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 ⓒ<지슬> 공식 페이스북

학살이 무서워 도피한 사람들…"극우 세력, 이들을 무엇으로 몰아대는 건가"

프레시안 : 어떤 것인가.

서중석 : 왜 4.3이 그렇게 장기간에 걸쳐 이어졌는가 하는 거다. '몰지각한 일부 청년들이 남로당의 지시를 받고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고 한다면 이건 불과 며칠 또는 한두 달 안에 다 진압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심지어 여순사건은 군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는데도 바로 진압됐다. 14연대 병력이 (여수와 순천에서 패퇴해) 지리산에 들어갈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지 않았나. 제주도도 그랬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항쟁이 그렇게 오랫동안 이어지고 학살이 그렇게 큰 규모로, 오랫동안 존속한 것은 그만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 아니겠나. 육지 사람과 섬사람의 대결이란 측면도 강하고, 섬을 완전히 봉쇄해놓고 작전을 편 것도 상당한 논란이 될 수 있다.

영화 <지슬>이 작년에 관심을 많이 모았는데, 얼마나 많은 제주도 사람이 (4.3사건 당시) 숨죽이며 도피해야 했는지가 그 영화에도 잘 나오지 않나. 중산간으로 도피한 이 사람들을 극우 세력, '(4.3은) 무장 폭동'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무엇으로 몰아대고 있느냐 이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4.3은 말한다> 같은 여러 자료를 좀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런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10월항쟁이건 4.3이건 여순사건이건 간에 모든 연구에서 동일하게 나오는 게 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친일파, 특히 친일 경찰에 대한 강한 반감이다. 여순사건과 10월항쟁은 (이것과) 아주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그런 것에 대한 강한 반감과 함께 단정 운동과 단정 세력에 대한 반발도 작용했다. 4.3도 단정에 대한 반발과 관련돼 있다는 것이 자료에 많이 나오지 않나.

통일 정부, 독립 정부를 빨리 세우지는 못하고 친일파가 날뛰는 것, 단정 세력이 단독 정부를 세우자는 운동을 막 펴는 것들에 대한 상당히 강한 두려움, 불안감, 반발 같은 것이 그런 일들이 생긴 것과 관련이 있다. 이와 함께 이 시기 남로당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프레시안 : 어떤 것인가.

서중석 : 4.3사건, 여순사건(의 발생)은 누가 보더라도 남로당과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중앙당의 지령에 따라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현지에 있는 남로당이 일으킨 것이다. 예컨대 4.3도, 지금까지 나온 모든 자료를 살펴봐도 현지 남로당에서 일으킨 것이다. 상부인 전남도당에서도 이걸 몰랐다. 더군다나 중앙당은 전혀 몰랐다. 여순사건은 누구나 지창수 상사가 일으킨 것이라고 하지 않나. 실제로 그랬다. '여수군당이 알았을 가능성은 있다'는 게 최근 여러 증언 등을 통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지만, 적어도 '전남도당이 알았다'는 건 어떤 자료에도 안 나온다.

이런 사실들은 남로당이 참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얘기해주는 것이 아니냐. 뭐냐 하면 4.3이건 여순사건이건 사실 남로당에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앙당의 어떤 지시도 받지 않고 지방 하부에서 자기들끼리 상의해서 일으켜버렸다. (그런 점에서도) 남로당이 참 문제가 있는 당 아니었느냐, 바로 이런 점을 중요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스물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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