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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전면전의 유혹에 빠져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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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전면전의 유혹에 빠져들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5> 해방과 분단, 열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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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분단, 아홉 번째 마당] 한국의 친미는 어쩌다 미국을 들이받았나

프레시안 : 분단 정부 수립을 이야기한 대표적인 사례로 이승만의 정읍 발언(1946년 6월 3일)이 꼽힌다. 통일 정부 수립이 여의치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같은 것을 수립하자는 주장이었다. 이와 달리, 일각에서는 이승만보다 김일성 쪽에서 먼저 분단을 획책했다는 주장을 편다.

서중석 : 그런 주장은 과거엔 별로 안 나왔다. 그런데 (1987년) 6월항쟁 이후 서서히 고개를 내밀더니만 특히 뉴라이트가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2005년 무렵부터 많이 부각된 게 아닌가 싶다. 박정희 정권 시기까지는 분단 책임 문제가 별로 논의조차 안 됐다. 전두환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 6월항쟁 이후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이뤄지면서 그런 주장이 많이 나왔다.

우선, 이승만이 분단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봐도 단정 운동 하면 이승만을 떠올리는 것 아닌가. 그건 뉴라이트도 똑같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까지 억지를 부린다면 할 말이 없다.

(분단에 관한 미국의 책임과 별개로) 미국과 미군정이 처음부터 한국을 분단하려 했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간에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가 우려했던 대로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반소·반공적임과 동시에 친일파와 강하게 유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한국 지도자로는 너무 빠르게 1946년 1월에 이미 단정 노선을 지향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승만은 1946년 1월 21일, "자기의 정부를 자기가 조직"하여 정부를 세운 후 북쪽을 소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 및 북진 통일 노선이 1946년 초에 이미 형성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편집자>) 그러다 (제1차) 미소공위가 실패로 돌아가자마자, 지방 순시 같은 걸 하면서 여러 곳에서 그런 것을 간접적으로 피력하다가 유명한 6.3 정읍 발언을 하는 것 아닌가.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이승만은 분단에 책임이 없다?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

프레시안 : 정읍 발언 후 이승만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정읍 발언 후 처음엔 단정 운동에 대한 강한 반발 때문에 주춤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해 가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노골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아주 강하게 단정 운동을 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승만은 1946년 12월 도미(渡美) 외교란 것을 한다. 미국 현지에 달려가 미국의 보수 반공 세력한테 '한국에 자유 정부, 그러니까 단독(분단)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강력하게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승만 측은) '하지는 공산주의자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까지 펴가면서 단정 운동을 아주 강하게 펴지 않았나. (이승만 측은 미국에서 "하지는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주장도 했다. <편집자>)

그리고 제2차 미소공위(1947.5.21.∼10.21)가 어떻게 보면 마지막으로 실낱같은 희망을 품게끔 하는 것 아니었나. 통일 정부를 세우는 데 굉장히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었지만, 미국이 마지막으로 소련과 협력해 해결해보려고 하니까 (미소공위가) 열린 것 아닌가. 그런 상태에서 민족적 지도자라면, 최후의 시도일 테니까 (동의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잠시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승만 측은) 아주 심하게 제2차 미소공위에 대한 반대 공작을 벌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야 할 점이 또 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미소공위가 잘될 때 신문에 이런 내용이 보도됐다. '임시정부가 들어서면 김규식이 수반이 될 거다.' 난 이승만이 이런 것의 영향을 받은 걸로 보고 있다. '미군정이 (좌우 합작을 지원해) 김규식을 전면에 내세워 키우려는 것 아니냐', (이승만의) 이런 두려움도 작용했기 때문에 (단정 운동을 강하게 펴는) 그런 일이 일어난 걸로 본다.

이승만은 분단 정부가 들어서면 미국이 분명히 자기를 지지할 것이라는 강한 신념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제1차 미소공위가 파열되자마자 강한 단정 운동을 하면서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였던 거다. 하지 쪽에서 '(이승만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 병적인 상태'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제2차 미소공위가 실패로 돌아갈 것 같은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하지가 미국 정부에 보낸 문서에는 이런 말까지 나온다. '말을 물가까지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 단정 세력이 너무나도 강하게 미소공위를 파열시키려고 하는데, 사실 미국으로서는 이승만을 비롯한 친미 세력이 모두 임시정부에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임시정부를 뭐하러 하려 하겠는가. 미국이 (반탁 투쟁에 이어) 또 하나의 엄청난 딜레마에 부딪힌 데다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심화되면서, 한국이 분단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분단을 먼저 획책한 건 이승만이 아니라 김일성?

프레시안 : 이제 단정 운동에 앞장선 이승만 쪽보다 북한에서 먼저 분단을 획책한 것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 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단정 운동에 앞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2월 8일 만들어지지 않았나. 그러니까 북한에서 먼저 (분단을) 획책한 것 아니냐', 이런 주장을 근래 많이 하는 것 같더라. 그런데 '(1945년 9월) 미군이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미군정을 설치하면서 한국은 이미 분단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주장도 꽤 있지 않나. 그런 것과 비슷하게 난 얼토당토않은 주장으로 비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미국이건 소련이건 점령 지역에서 일정한 통치 행위를 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군정을 설치할 수 있는 것이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같은 것도 생길 수가 있는 것이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계속해서 분단 책임을 돌리는데, (그에 대해) 두 가지 얘기를 할 수 있다.

하나는 소련이 38선 북쪽에서 간접 통치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남한에 군정을 설치해 직접 통치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데 사실 미국은 전쟁에 책임이 있는 나라인 패전국 독일이나 일본에 대해서는 간접 통치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참 억울하다', 그 당시에 이렇게 얘기하는 게 나온다. 어쨌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간접 통치 방식의 산물로 이해해야 하는 면이 있다. 그다음에 북쪽에서 통치 기구와 행정 기구의 얼개가 짜이는 과정을 보면 이게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1945년 8월) 맨 먼저 평양으로 안 가고 함흥으로 가지 않았나. 그래서 '(미군 사령관) 하지만 한국을 전혀 몰랐던 게 아니라 치스차코프도 한국을 전혀 몰랐던 것 아니냐. 그러니까 함흥으로 간 것 아니냐', 이런 주장을 일부 학자가 하고 있다. 어쨌든 여기에서 함흥 방식이라는 게 나왔다.

(미군이 점령 초기에 조선총독부 관리들을 유임한 것처럼) 치스차코프도 처음엔 함흥에 있던 일본인 도지사에게 치안을 맡겼다. 건준 지부에서 바로 항의했다. 그러자 치스차코프는 '그러면 건준 지부와 조선공산당 측, 이 두 군데에서 반반씩 나와 정치위원회 같은 것을 구성해라. 그리고 위원장은 건준 쪽이 맡아라', 이런 유명한 함흥 방식을 채택한다. 치스차코프는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평양에도 두 조직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건준 평남 지부, 그리고 현준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조직이었다. (치스차코프는) 두 단체를 불러서 '(함흥과 마찬가지로) 반반씩 구성하되 위원장은 건준 쪽으로 해라', 이렇게 한다. 그래서 조만식이 위원장을, 현준혁하고 건준 지부 쪽 오윤선(기독교 장로)이 부위원장을 맡는다.

그런데 이렇게 되니까 각 도가 따로따로 노는 식이 돼버렸다. 예컨대 평양에서 원산까지 철도로 갈 경우 지역(을 관할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북조선)5도행정국이 (그해 가을) 만들어진다. 교통국에서 북쪽 지역 교통을 전체적으로 통할하는 식이었다. 5도라는 건 북한의 5개 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이전보다는 체계적이었지만) 이것도 중앙 집권적인 행정을 하기엔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민위원회 체제가 북한에서 짜임새를 상당히 갖춰 가니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하자', 이렇게 합의하게 된 거다. (여기에는) 곧 열릴 미소공위에 대비하는 측면도 있었을 거다.

프레시안 :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서 실시한 토지 개혁(1946년 3월)을 비롯한 조치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서중석 : 토지 개혁이 분단으로 가는 길 아니었느냐는 공격을 일부 학자, 특히 뉴라이트에서 강하게 했다. 그런데 (북한에서) 토지 개혁을 실시한 사정은 그 당시 미군정 자료에 잘 나온다. 미소공위를 앞두고 북한이 우위를 점하려고 (한 것이다). 북한 주민 대다수가 농민이니, 토지 개혁을 하면 이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을 수 있지 않나. 그러면 미소공위에 임하는 소련 측의 입장이 훨씬 더 강화되는 것이다. 그 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당시 한민당이 토지 개혁에 대해 얼마나 비난을 퍼부었나. '토지를 강탈한다는 건 지주를 역적시하는 것 아니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거세게 반발했다. 그렇지만 그럴 때에도 '이건 분단으로 가는 거다. 분단 정부를 세우려고 이런 짓을 하는 것이다', 이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프레시안 : 1947년 말 북한에서 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만든 것도 북측에서 먼저 분단을 촉진했다는 근거 중 하나로 거론된다.

서중석 :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나. 한반도 전체에 걸쳐 총선거를 실시한다, (유엔)임시위원단을 파견한다, 미국과 소련 양군은 조속히 철퇴할 것을 권고한다는 유명한 3개 항을 결의했다. (유엔에서) 그 결의를 하자마자 북한이 불과 며칠 사이에 '그러면 우리는 헌법을 만들겠다'고 나온 거다. 그야말로 장군 멍군인데, 이것을 '북한이 먼저 분단 정부를 만들려고 획책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1946년 12월에 발족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1947년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갔을 때 미군정이 지시했다고 할까, 강력히 요구한 게 있다. 보통선거법을 빨리 만들어 확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걸 두고 많은 사람이 '이건 좀 문제가 있지 않느냐. 보통선거법을 왜 그렇게 빨리 만들려고 하는 것이냐. 분단 정부 수립을 획책하는 것 아니냐'고 당시에 주장하고 그랬다. 그런데 미군정이 정말 무엇을 의도하고 (그렇게) 했는지 확실히 알려주는 자료는 또 없는 것 같다.

어쨌건 북한에서 유엔 총회 결의 직후 헌법 초안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한 것을 가지고 '이건 단정으로 가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보통선거법도 그런 것 아니냐. 그것(북한의 헌법 제정 움직임) 이전에 한 것 아니냐', 이런 주장을 피하기 어렵지 않겠나.

프레시안 : 북한에서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을 창설한 것도 분단을 촉진한 움직임으로 꼽힌다.

서중석 : 북한에서 분단 정부 수립과 관련해 좀 구체적인 게 있다면 군대 창설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북한에서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이걸 명확하게 밝혀줄 자료는 지금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군대 창설 직후(1948년 2월 11월)부터 (임시)헌법 초안을 전 인민의 토의에 부친 것으로만 돼 있다. 남쪽에 분단 정부가 들어서면 그 뒤를 이어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게 작용한 것 아니었겠나.

그런데 (그해) 3월에 가면 연석회의를 (4월에) 하자고 주장하는데, 이때는 그만큼 헌법 초안은 뒤로 미뤄진 것이다. 사실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헌법 초안은 남북 전체에 걸친 헌법(의 초안)이다', 이런 주장을 했다. 분단과 상관없다고 강조했다. 북한에서 이게 통과되는 건 9월 8일이다. 9월 9일에 북한 정부가 들어서는데, (바로 전날인) 8일에 최고인민회의를 통과한다.

이 시기의 모든 자료가 구체적으로 얘기하듯이, (북한은) 소련군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시기(1948년 2월)에는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다고 누구나 얘기한다. 다만 군대만 창설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당시 인민위원회에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하던 사람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이 사람의 비망록을 보면 심지어 연석회의에 대해서도 상당히 구체적인 것까지 '지시'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 점으로 봐도 이 시기에 분단 정부가 들어섰다고 얘기할 어떤 근거도 찾아낼 수 없다. 다만, 남쪽에서 (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가 그보다 먼저 생기긴 했지만 인민군 창설은 국방경비대보다 더 강한 의미를 갖는 것 아니겠느냐는 생각은 든다. (남조선국방경비대는 1946년 1월 탄생했다. <편집자>)

난 여기서 분단 문제와 관련해 아주 중요한 두 가지를 논의해야 한다고 본다.

▲ 창건 75주년(2007년 4월 25일)을 맞아 평양에서 열병식을 하고 있는 조선인민군. 북한은 1948년 2월 8일 인민군을 창건하고 1977년까지 이날을 건군절로 기념했으나, 1978년에 창건 기념일을 4월 25일로 바꿨다. 4월 25일은 김일성이 1932년 항일 빨치산 부대를 조직한 날로 전해진다. ⓒ연합뉴스

분단 논리로 귀결된 민주 기지론…"북한, 아주 잘못된 판단을 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하나는 민주 기지론이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민주 기지론이 언제 나타나느냐에 대해선 학자마다 설이 구구하지만, 명백하게 민주 기지라는 단어를 쓰는 건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가 실패로 돌아가고 나서 얼마 후부터다. 그때 아주 심할 정도로 미국을 제국주의 세력으로 몰아붙이면서 '민주 기지를 북한에 건설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면서 (북한에서) '민주 3법'이라고 주장하는 산업 국유화법, 남녀평등법, 노동 관계법을 만든다.

민주 기지론과 같은 사고방식, 전략이 분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 아니냐, 이 점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민주 기지론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1946년부터 강렬하게 전개된 단정 운동과는 정반대처럼 보인다. 민주 기지론은 북쪽을 먼저 민주 기지로 만들고 나서 남쪽까지 그렇게 하겠다는 거다. 즉 2단계 통일론이다. 통일을 위한 방법으로 민주 기지론을 제시하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민주 기지론에 따라 남쪽이 사회주의화한다? 그건 기대할 수 없었던 건데, 북한에서 아주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본다. (그 논리대로라면) 전쟁을 빼놓고는 사회주의를 남쪽에 전파한다는 건 누가 봐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1946∼1948년 정치 과정을 봐라. 남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 눈곱만큼도 그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니 결국 전쟁에 호소하는 방식밖에 없었던 건데, 그게 얼마나 큰 잘못인가. 이건 예전에도 이야기한 바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 기지론은 그것을 주장한 사람들의 주관적 의사와는 상관없이 분단으로 가는 논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제1차 미소공위 실패 직후 민주 기지론을 주장했던 북한은 미국이 다시 미소공위를 열기 위한 협상을 하자고 하니까 또 '우리도 미소공위를 여는 데 찬동한다'며 그리로 기울어지기는 했다.

프레시안 :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서중석 : 왜 분단 세력은 이승만의 단정 운동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면서도, 분단에 대해선 '이승만 잘못이 아니고 다른 쪽에 책임이 있다', 이런 식으로 자꾸 돌리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일관성 있게) '우린 처음부터 분단만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왜 떳떳이 주장하지 못하는 건지 이것도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 추종자들의 상당수는 민족한테 세 가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얘기할 수 있다. 학살이 그보다 더 큰 잘못이라고 보지만 (그걸 별개로 하면,) 하나는 친일이다. 특히 일제 말에 민족 말살 운동과 군국주의 침략 전쟁에 적극 편승하고 가담한 것이다. 그다음은 분단 정부를 세우기 위해 아주 강한 페이스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승만 독재에 적극 협력한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에서 이승만을 높이 평가하는 식의 서술을 하는 거라든가, 뉴라이트가 이승만을 띄우는 작업을 한다든가, 수구 언론에서 그렇게 이승만을 살리려는 활동을 벌이는 것도 바로 이 세 가지 문제의 어떤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승만 추종자들의 상당수가 친일, 분단, 독재 협력,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이승만을 미화하는 것이다. '해방 직후에는 그랬다'는 식으로 만들어버리면 저절로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니냐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래서 해방 직후부터 이 세력이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여운형과 (좌우) 합작 운동, 남북 협상을 그렇게 공격했던 것 아닌가. 그런데 단정 운동 세력을 정말 화나게 하는 것이 당시에 나타났다.

프레시안 : 어떤 것인가.

서중석 : (예컨대) 남북 협상은 엄청난 성원을 받았다. 김구와 김규식이 안 가려야 안 갈 수 없게끔 만들었다. (이에 반해) 단정 운동 세력은 (1946년) 정읍 발언이 나올 때부터 '반민족 세력'으로 굉장히 강한 비판을 받았다. (초기에 협력했던) 김구와 이승만은 나중에 아주 강한 라이벌이 돼 버렸는데, 남북 협상에 관한 이런 분위기는 이승만 추종자들에겐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김구는 결국 그쪽 세력에게 암살당하지 않나. 그때 김구를 추도하는 인파가 얼마나 많았나. 미국 대사관 자료에 딱 50만 명이라고 나오지 않나. 우리 역사상 전무(前無)하고 상당히 오랫동안 후무(後無)한 것이다. 1971년 대선까지는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인 적이 없었다. 전국 각지에 분향소를 차리고 다 같이 애도했다. 이렇게 국민적인 성원을 받으니, 단정 세력이 얼마나 화가 났겠나.

또 (1948년) 4.3사건, 여순사건 때 극단적 반공주의를 펴면서 1949년에는 국가보안법 피해자라든가 사상범으로 감옥소를 가득 채웠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반공으로 몰고 갔는데, 1950년 5.30선거는 어땠나.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이 참패하고)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약진하지 않았나. 애국자, 통일을 위해 애쓴 분들에 대한 지극한 심정이 5.30선거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분단 세력은 또 얼마나 쓰라렸겠나. 이런 것 때문에도 더더욱 '우리는 분단 세력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억지 논리를 펴는 것 아니겠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스물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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