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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미국이 준 선물? 그들은 점령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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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미국이 준 선물? 그들은 점령군이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7> 해방과 분단, 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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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네 번째 마당] "애가 부모에게 수류탄 던졌다"? 무서운 이승만
[학살, 다섯 번째 마당] 일본도로 국민 목 친 학살자가 이순신과 동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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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일곱 번째 마당] 박정희 세력은 왜 합동 묘지를 파헤쳐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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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8.15를 해방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고 광복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서중석 : (용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할 얘기가 하나 있다. 뉴라이트가 수년 동안, 특히 2004~2005년부터 '해방은 정치적 혼란만 불러일으켰다'는 식으로 많이 주장하더라. 그러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고 그게 위대한 거다, 이런 식으로 많이 주장한다. 말하자면 해방을 그만큼 깎아내리고 평가 절하하면서 이승만의 소위 '건국'이란 걸 대단히 중요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게 구체적인 현실과 얼마나 거리가 먼 주장인지를 해방, 광복(에 담긴 뜻)과 관련해 충분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해방이나 광복이나 다 좋은 말이다. 2005년 정부에서 광복60주년기념사업회를 띄웠는데, 그때 나는 광복이건 해방이건 좋은 말이라고 여러 강연에서 얘기했다. 그런데 수업 시간이나 강연 때 학생들에게 해방과 광복의 차이점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아무도 대답을 못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렇게 많이 사용되는 단어인데 왜 양자를 구별 못 할까? 참 이상하더라. 이렇게 말하는 선생도 봤다. "해방은 소극적인 것 아닙니까? 광복은 적극적이잖아요." 이것도 참 이상한 주장이다. 예컨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중국 인민해방군 같은 사례도 그렇고 수많은 지하 조직도 (이름에) '해방' 자가 붙은 게 굉장히 투쟁적인 성격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어째서 해방을 소극적인 것, 광복을 적극적인 것으로 보는 건지 이상하다고 애기하고 그랬다.

프레시안 : 광복은 어떤 맥락에서 쓰였나.

서중석 : 광복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19세기에 와서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게 됐는데, 그 이전엔 황제가 자리를 빼앗겼다가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뜻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면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을 침탈당하게 되자, (광복은) 국권 회복을 뜻하게 됐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에는, 빼앗긴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의미로 사용됐다. 1930년대 이후, 광복군에서도 드러나듯이, 일제를 패망시키고 새로운 우리나라를 세우겠다는 뜻으로 광복을 사용했다고 보면 맞다.

그래서 1945년, 1946년에는 일부 식자층에서 '광복은 우리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군정 치하에서는 광복됐다고 얘기하면 안 되는 거다', 이렇게까지 학문적으로 설명하고 그랬다.

프레시안 : 해방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됐나.

서중석 : 해방은 그것(광복)과 뜻이 많이 다르다. 사실 해방 3년기엔 다 해방이라고 썼다. 유신 초기인 1974년까지도 국사 교과서에 해방이라고 썼다. 유신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국정 교과서가 나오지 않나. 첫 번째 국정 교과서까지도 그렇게 썼다. 그러다 두 번째로 나온 국정 교과서부터 광복이라고 많이 불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그만큼 중시해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교과서에서 그 부분을 담당한 이들이 그렇게 한 것 같다. (해방 직후 8.15는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해방절로 불렸다. '1948년 8월 15일 해방절에 해방 3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고 보도한 기사도 있다. 1949년 10월 정부에서 4대 국경일을 정할 때, 해방절이 광복절로 바뀌었다. 해방절은 북한에서도 사라졌다. 북한에서 8.15는 '민족 해방 기념일'로 불린다. <편집자>)

해방은 부자연스러운 것, 묶여 있는 것, 억눌린 것, 잘못된 것에서 풀려난다(는 것을 뜻한다). 일제 때나 해방 직후나 '봉건적 사고와 인습에서 해방돼야 한다', 이런 말을 참 많이 썼다. 여성 해방이라는 건 여성이 남성한테 부당하게 억눌리는 상황에서 동등한 인격적 권리를 갖자는 의미 아닌가. 민족 전체가 제국주의자들한테 억눌려 노예 취급을 받던 데서 자유를 찾는 것, 이게 민족 해방이다. 그러니까 해방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성격을 두루 지니면서 잘못된 상태, 억눌린 상태에서 자연스러운 상태, 자유스러운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해방은 연합국의 선물? 독립 투쟁과 한국인의 노력, 안 보이나

프레시안 : 앞에서 뉴라이트 이야기도 했지만, 역사적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 중에는 해방 하면 혼란을 떠올리는 이가 적잖다.

서중석 : 해방 3년기의 그 중요한 변화를 어떤 식으로 잘못 가르쳤는가 하는 것과 직결되는 문제다. 이와 관련해 서너 가지를 얘기하고 싶다. 우선 '해방은 연합국의 선물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방 공간에서도) 이승만과 한민당은 물론이고 조선공산당의 박헌영도 '해방은 연합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얘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거라고 본다.

프레시안 : 무엇 때문인가.

서중석 : 경성콤그룹이 일제 말기에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지하투쟁을 한 조직이라고 얘기들을 한다. 그러나 1941년 무렵 (다수의 구성원이) 체포된다. 그러면서 학생·청년 일부 조직을 제외한 나머지는 감옥소에 들어가 있거나 피신하게 된다. (경성콤그룹을 이끌던) 박헌영도 광주에 있는 벽돌 공장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해방을 우리가 싸워서 맞았다고 말하기 난처한 점이 있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해방은 연합국에 의해 이뤄졌다는) 그런 주장을 조선공산당 일부에서 한 것 아닌가 한다. (경성콤그룹은 1939년 결성된 사회주의 단체로, 해방 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추를 이룬다. <편집자>)

(이와 달리) 여운형이나 김구는 아주 강하게 주장했다. 연합국이 일본을 패망시키는 데 중요한 노력을 한 것에 감사하지만, 우리도 해방을 위해 일제 강점기 내내 싸웠고 일제 패망에 대비했다고.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김구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을 준비를 하지 않았나. 연합국의 노력과 함께 우리가 끊임없이 항일 독립 투쟁을 하고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이하려는 노력을 한 것이 결합해 해방이 이뤄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교육하느냐에 따라 (해방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차이가 난다. 여운형, 김구의 주장이 해방 후 교육에서 묵살됐기 때문에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이와 관련해 적잖은 정치학자들의 견해도 우려스럽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많은 정치학자들은 '해방 후 우리가 누리게 된 자유는 미국이 선물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획득한 것이 아니라, 미군이 진주하면서 준 것이라는 식이다. 이 점과 관련해 해방의 역사적 의의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한국사 최대 변화 초래…해방은 혁명이었다

프레시안 : 해방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서중석 : 해방은 수천 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획기적인 대변화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1919년) 3.1운동도 굉장히 중요한 게 틀림없고 (그것을 통해) 중요한 역사적 전환을 이뤘던 것이지만, 해방처럼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없다.

해방은 정치 혁명이었다. (해방을 통해) 우리가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한국은) 수천 년간 군주 국가였고 그런 속에서 근대적인 정치적 자유가 있었다고 얘기하기 어렵지 않나. 더군다나 일제는 어떠한 정치적 자유도 허용하지 않았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도 없었다. 그건 (3.1운동 이후) '문화 통치'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모든 언론이 검열을 받았다.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모두 정치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우익 정당은 말할 것도 없고, 해방 직후에 제일 셌던 조선공산당도 그랬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해방 직후가 우리 전 역사를 통틀어서 그런 자유를 가장 만끽할 수 있었던 시기다. 특히 해방 초기에 아주 자유로웠다.

해방은 경제적 혁명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한국에 있던 주요 기업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큰 기업은 (거의) 다 일본인 것이었다고 봐도 틀림없다. 그게 우리 것으로 돌아오면서 한국인들이 경제의 주체가 된 거다. 그뿐만 아니라 시기상 약간 차이가 있지만 남한이나 북한이나 농지 개혁, 토지 개혁을 했다. 그러니까 '수백 년 숙원 사업이 해방으로 인해 풀리게 됐다. 농민이 토지로부터 해방됐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다.

프레시안 : 해방은 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줬다.

서중석 : 그렇다. 해방은 문화적 혁명도 가져왔다. 해방 후 교육열이 엄청났다. 한글이 국민 문자가 된 것도 사실은 해방이 되면서다. 1443년에 한글을 만들었다고 우리가 배우고 있지만, 그게 국민적인 문자로 사용됐다고는 안 보지 않나. 한말에 <독립신문> 같은 게 한글로 나왔지만 그건 소수만 봤다. 일제 강점기에 나온 신문도 국한용 혼용이었다.

해방 후 (사람들이) 한글을 열화와 같이 배웠다. 그러면서 한글로 된 교과서가 조금 있다가 바로 나오는 걸 볼 수 있다. 이건 조선어학회(오늘날 한글학회)가 그 수난 속에서도 계속 활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것도 준비다. 해방이 되자마자 교과서를 한글로 낸 것은 문화적으로 우리가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준비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세로쓰기가 아니었다. 일본은 지금도 세로쓰기를 하지 않나. 우리는 바로 가로쓰기로 바뀌었다. 이처럼 언어생활과 문화생활에서 혁명적 변화를 해방이 가져다준 거다. ('말의 해방'을 상징하는 일 중 하나가 <조선말큰사전> 발간이다. <조선말큰사전> 편찬 작업은 1929년에 시작됐다. 1942년 초고가 완성됐지만, 일제가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편찬위원들을 옥에 가두고 원고를 빼앗아가면서 위기에 처했다. 해방 후 지금의 서울역 창고에 방치돼 있던 원고를 극적으로 찾으면서, 1947년 <조선말큰사전> 간행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편집자>)

프레시안 : 해방은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서중석 : 해방은 사회 혁명이기도 했다. 수많은 노동자 조직, 농민 조직, 문화인 단체가 생겨났다. 음악은 음악대로, 미술은 미술대로, 무용은 무용대로, 연극은 연극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각자 다 조직을 만들었다. 청년 단체도 많았고 여성 단체도 참 많이 생겼다. 이와 같이 여성이건 청년이건 노동자건 농민이건 문화인들이건 단체를 만들면서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들이 자유스럽게 조직 활동을 하는 것도 해방이 되면서 처음 있는 일인 거다. 그런 면에서 엄청난 사회 혁명이었다. 그런 걸 통해 한국 사회가 엄청나게 평등화된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분위기였기에) 해방 직후엔 지주 세력이 꼼짝 못했다. 한국에서 부르주아 세력은 원래 약했던 거고.

정리하면 한국은 해방을 통해 시민 혁명이자 정치 혁명, 사회 혁명, 경제 혁명, 문화 혁명을 맞았다. 그야말로 유사 이래 이렇게 큰 변화를 순식간에, 한꺼번에 맞이하게 됐다는 것, 이건 정말 대단한 거였다. 젊은 사람들은 '마치 공기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해방도) 자연스럽게 왔네',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어떤 식으로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게 됐는가와 연관시켜서 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해방이 이렇게 중요한 것인데도) 뉴라이트는 해방을 참 폄하한다.

▲ <조선말큰사전> 원고. <조선말큰사전> 간행은 '말의 해방'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점령군을 점령군이라 부를 수 없던 기막힌 시절

프레시안 : 그런 태도는 '미군이 들어와 우리에게 자유를 줬다'는 식의 인식과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중석 : 미국에 의해 자유를 획득했다? 그렇지 않다. 미군이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해 9월 9일 서울에 들어와 보니까, 한국인이 전부 자유스럽게 활동하고 있는 거다. 수많은 조직과 단체가 움직이고 있었고. 미국도 민주주의 국가인데 '너희들, 이제부터 활동하지 마. 우리 명령만 들어야 돼', 이러면서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중지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다만 미국은 정치적 자유에 부분적으로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질서를 말하면서 친일 경찰들을 다시 경찰서에서 일하게 했다. 그러면서 달라진 풍경이 많이 생기긴 했다. 예컨대 미국은 지방에 있던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 전술 부대가 각 지방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미군 진주 후) 좀 달라졌다고 얘기할 수 있다. (어쨌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비롯한 기본적 자유는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해방을 맞이하면서 획득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해방된) 바로 그날부터 그런 자유를 누리지 않았나.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를 인수해 우리 스스로 <매일신보>를 내는 식으로 하고 그랬다. 이게 나중에 <서울신문>으로 바뀌는 거다. (이렇게) 미군이 들어오면서, 있다면 조금 제한이 있었던 것이지 미국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 게 결코 아니다. 이 점을 정확히 인식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프레시안 : 미군이 당시 점령군으로 온 것인지, 해방군으로 온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서중석 : 미군을 점령군이라고 부른다든가 건준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려 하면,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으로 처벌하는 사례가 있었다. 한마디로 '건준에 대해선 얘기해선 안 되고 미군은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이라고 불러야 한다', 오랫동안 그렇게 이야기한 거다.

미군이 (1945년 당시) 비행기에서 뿌린 포고 제1호, 제2호를 봐라. "점령군"이라고 스스로 딱 못을 박았다. 그러면서 '질서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우리 지시에 따라라', 이렇게 돼 있다. 그런데도 왜 점령군이라고 하는 걸 불온하게 여기고 단죄하려 한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거꾸로 소련군을 해방군이라고 부르면 또 잡혀갔다. 그건 점령군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세상에, 미·소 양군이 똑같은 자격으로 한반도에 진주한 건데도 그랬다. 이런 희한한 역사를 우리가 상당히 오랫동안 가졌다. 건준에 대해선 입도 열지 못하게 한 적이 있었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에서 언제부터 건준에 다시 주목하게 된 건가.

서중석 :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1980년 5.17쿠데타로 집권하면서 학교에서 많은 교수들이 쫓겨나지 않았나. (그중 한 명인) 강만길 선생이 1984년에 <한국 현대사>, <한국 근대사>를 창비에서 냈다. 쫓겨난 게 전화위복이 된 건지, 시간이 나니까 그런 저술을 하실 수가 있게 된 거다. 그런데 <한국 현대사>를 건준으로부터 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좀 놀랐던가 보다. 1984년만 해도 그럴 시점이다. 그때 내가 <신동아>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신동아> 편집위원 중 고(故) 민두기 교수(서울대 동양사학과)가 '이런 게 있네. 강만길 교수가 이렇게 썼더라'라고 편집회의에서 얘기하면서 토론회를 열자고 했다. 그래서 고 정창렬 교수(한양대 사학과), 신용하 교수(서울대 사회학과) 등 몇 분이 모여 토론했다. 내가 담당했는데, 4시간인가 굉장히 긴 토론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서 다 '강만길 선생이 쓴 것이 좋다. 옳다.' 하면서 그걸 부연 설명했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더라. 해방 후 역사가 건준에서 시작됐다고 그때부터 쓰게 된 거다. 그전엔 불온하게 여겼다. 참 기가 막힌 일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열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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