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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친미는 어쩌다 미국을 들이받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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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친미는 어쩌다 미국을 들이받았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4> 해방과 분단, 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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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38선이 어떻게 그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서중석 : 마(魔)의 선, 가슴을 도려내는 단장의 선이라고 불린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38선은 한국인한테 너무나도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해방 직후는 물론이고 1960~1970년대까지도 ‘한국의 모든 비극은 38선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38선을 그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 오랫동안 영향을 끼친 주장이 있다. 얼토당토않은 주장이었는데도 굉장히 오랫동안, 강력하게 한국인에게 영향을 끼친 주장이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이승만이 해방 직후부터 주장했던 건데,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열린) 얄타 비밀 회담에서 38선이 그어졌다는 주장이다. 제1차 미소공위 회담이 1946년 3월 20일 열리기 바로 전에도 <동아일보> 등에 대문짝만하게 ‘얄타 비밀 회담 때 한반도가 분할됐다’면서 그 책임이 소련에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1946년 3월 13일 <동아일보>는 ‘폭로된 얄타 비밀’이라는 기사를 통해, 얄타 회담에서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요구했으나 미국은 한반도 북부 지역만 주기로 했고 그 때문에 미국이 38선 문제에 대해 애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편집자>) 이게 1940년대뿐 아니라 1950년대에도 정설처럼 먹혀들었다. 주입됐다고 해야 할까. 1960~1970년대에도 안 없어졌다. 1980년대 이후 많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말도 아닌 게 됐다.

해방 직후 한 기자가 ‘얄타 비밀 회담에서 그런 협정이 있었다는 주장을 어디서 들었는가’ 하고 이승만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다만 러시아인인가로부터 그런 애기를 들었다고 했다.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거다. 1960~1970년대 이후에도 얄타 비밀 협정으로 38선이 그어졌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이 찾아봤는데, 어디에서도 그 근거가 나오지 않았다. 이승만 추종자들은 ‘이승만은 국제 정세에 밝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는데, 사실 이승만이 주장한 것엔 억지 주장, 일방적인 주장이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이 얄타 비밀 회담 얘기라고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1945년 7월에 시작된 포츠담 회담에서 38선이 결정됐다는 견해도 있다.

서중석 :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같은 분들이 그런 주장을 했다.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안 나와도 그걸 시사하는 자료는 나온다는 논리를 펴면서 논문을 쓰고 그랬다. 그러면 지금까지 포츠담 회담과 관련해 그렇게 얘기할 만한 자료가 구체적으로 나온 게 있느냐? 아무도 발견해내지 못했다.

다 알다시피,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한국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회담 중간에 ‘미국에서 핵 실험 성공’이라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한국 문제에 대해 소련과 구태여 타협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탈린도 그 회담에서 한국 문제를 먼저 꺼내려고 하지 않았다. 소련은 미국에서 생각한 것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독일과 동부 유럽에 배치된 부대들을 아주 신속하게 시베리아, 연해주, 소련-만주 국경으로 이동시켜 엄청난 숫자를 배치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탈린은 ‘뭐하러 내가 먼저 말을 꺼내나’, 이런 식이 된 것이다.

한국 문제는 포츠담 회담에선 사실상 논의되지 않았다. 카이로 선언에 있었던 것을 반복하는 정도로 한국 문제를 처리하고 넘어간 것이다. 한국 문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리한다는 것은 포츠담 선언이 나올 때까지도 결정된 것이 없다. (미국, 영국, 중국은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선언에 합의하고 12월 1일 소련의 동의를 얻어 이를 발표했다.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을 자주 독립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즉시 독립’의 길을 차단한 ‘in due course’는 중경 임시정부 구성원을 비롯한 적잖은 한국인들을 실망시켰다. <편집자>)

또 일부 학자는 한국을 독일이라든가 오스트리아처럼 네 나라가 분할 점령하는 방안을 미국 국무부에서 논의했다고 말한다. 그건 사실이다. 자료에 나온다. 그런데 한반도는 너무 작아서 그렇게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봐서 바로 취소하고 만다.


▲ 한국전쟁 발발 59주년을 이틀 앞둔 2009년 6월 23일 한밤중에, 한 장병이 휴전선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지인 육군 백두산부대 최전방 초소에서 북녘을 응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얄타 회담 때 한반도 분할? 38선 그은 건 미국

프레시안 : 38선은 어떻게 탄생했나.

서중석 : 38선을 어떻게 그었는지는 딘 러스크 회고록을 비롯한 여러 자료에 그대로 나온다. 1945년 8월 11일에 (미국의) 러스크 대령하고 본스틸 대령이 명령을 받고,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건가에 대해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 양군이 점령하는 방식이 좋겠다’는 것을 링컨 준장한테 올렸다. 링컨 준장이 미국 육군성 장관에게 보고했고, 육군성 장관에게서 그걸 받은 국무장관이 일반 명령 제1호 초안으로 대통령에게 그걸 올린 거다. 트루먼 대통령이 그걸 일반 명령 제1호로 확정하고 나서, 한 부는 스탈린에게 보내고 한 부는 맥아더 사령부에 보내게 된다.

8월 16일 스탈린이 일반 명령 제1호에 대해 회답했는데, 한국 문제 관련 사안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도 수많은 학자들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를 연구했다). 왜냐하면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기에 아주 유리한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 군대는 이미 8월 9일에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그와 동시에 그날 0시를 기해 두만강을 넘기 시작했다. 8월 11일 나진에 있는 일본 사단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면서 청진 쪽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남쪽까지 내려올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에 대해 많은 학자가 의문을 품었다).

프레시안 : 왜 그랬던 것인가.

서중석 :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일본을 점령하는 데 소련이 개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미국 등과 함께) 독일,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것처럼 홋카이도 등을 ‘여긴 우리가 점령하겠다’(는 식으로). 미국은 이걸 용납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또 하나는 스탈린은 만주를 중시했다(는 것이다). 한반도는 만주만큼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에 만주에서 소련의 권익을 지키는 데 더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세 번째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스탈린은 유럽에서건 동아시아에서건 일본 점령 문제 하나만 얻은 게 없지 나머지 부분에서는 소련이 상당히 얻어냈다(고 본 거다). 한국 문제 가지고 공연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를 그렇게 넘어간 것 아니겠느냐는 주장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본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면, 1945년 미군 진주 직후는 말할 것도 없고 1970년대까지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한 것’이라는 속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물론 그건 미군 제24군단을 이끈 하지 사령관이 그렇게 설명했기 때문에도 그런 거다. 미국 정부도 그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커밍스가 <한국전쟁의 기원> 1권에서 명료하게 지적했듯이, 그럴 거라면 소련 측에 한반도 점령을 다 맡겨도 되고 다만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것만 확실하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미국이 오키나와에 있던 제24군단을 전속력으로 (한반도로) 보냈는가는 아주 간단한 문제다. ‘점령만이 국가 이익을 실현하는 데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런 점에서 38도선을 경계로 양군이 진주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이승만·친일파와 미국의 분단 책임 문제

프레시안 :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 분단에 적잖은 책임이 있지만, 어느 쪽에 더 큰 책임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서중석 : 해방 직후부터 미국의 전통주의적인 주장은 소련에 많은 책임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분단된 이래 계속해서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한반도가 분할된 것이다’, 그러면서 두 나라에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1960~1970년대 이후 극우 단정 세력을 제외하면, 소련과 미국 중 누가 더 책임이 크냐고 했을 때 소련보다는 미국 책임이 더 큰 것 아니냐는 사고가 상당히 있었다. 왜 그런 주장이 나오고 특히 1980년대 이후엔 더 강하게 나왔느냐 하면, 북쪽 지역에선 소련에 의해 친일파가 청산됐고 토지 개혁처럼 한국인들이 열망했던 개혁 조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는 단정 운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지 않았느냐. 심지어 (남한에 미군정이 있던 것과 달리) 북한에는 소군정도 없었다. 간접 통치만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까지 주장하는 학자가 나오고 그랬다. 그것에 비해 미국은 분단과 관련해 너무나도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프레시안 : 어떤 문제인가.

서중석 : 제일 큰 것은 하지의 딜레마, (즉) 미국의 딜레마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신탁 통치는 미국이 1942년, 1943년 무렵부터 줄기차게 한반도에 적용하려 했던 것이고 (1945년) 모스크바3상회의 때도 번즈 미국 국무장관이 강력하게 편 주장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신탁 통치 문제가 남한에서 국론을 양분하는 데 굉장한 역할을 했다. 그 점에서도 미국이 신탁 통치를 실시하려 했던 건 문제가 큰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반탁 투쟁을 친미 세력이 일으켰다는 것이다. 미국이 신탁 통치를 하자고 주장했는데, 친미 세력은 반탁 투쟁을 일으키며 정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그 과정에서) 친일파는 (신분을) 세탁해서 애국자로 둔갑했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에선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이행해야 한다’는 지침을 하지에게 계속 보내니, 하지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1946년) 제1차 미소공위가 열리는 과정에도 그런 점이 적지 않게 작용하지 않았겠나.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과 친일파 문제에서도 미국의 책임을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맥아더 사령부에서) 이승만의 귀국을 돕고, (미군정이) 이승만을 아주 위대한 지도자로 한국인한테 내세운 것도 분단에 영향을 준 것 아니겠나. (하지는 1945년 10월 20일 연합군 환영회에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쳐 해외에서 싸운 분”이라며 이승만을 한껏 치켜세웠다. <편집자>) (맥아더나 하지와 달리) 사실 미국 국무부는 이승만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해방 전) 이승만이 활동을 재개했을 때 미국 국무부가 이승만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건 ‘너무 반소·반공적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국무부는 미국이 추축국에 맞서 소련과 협력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고 봤고, 한반도 문제도 결국 두 나라가 협력해서 처리해야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 패망 후 이승만이 빨리 귀국하려 했는데도 (미국 국무부에서) 못 가게 막은 것이다. (미국 국무부는) 이승만이 한반도에 들어온 후에도 이승만에 대해 상당히 우려를 표했다.

이승만 이분에게선 자기 쪽 사람만 중요하게 여기고 비판 세력은 다 적 비슷하게 사고하는, ‘추종자 아니면 적’이라는 양분법적인 면이 상당히 보인다. 그런 것은 해방 직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매우 적절치 않은 것이다. 해방 직후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이어졌는데, 미국이 그런 이승만을 내세워 남한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이승만을 통해 한국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처음에 생각했던 것은 상당히 큰 잘못이 아니냐는 주장이 또 있는 거다.

그것 못지않게 미군정이 친일파를 등용하고 키운 것도 분단으로 가게 하는 큰 문제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친일파는 본질적으로, 처단되지 않는 동시에 계속 출세하려는 욕구가 강한 집단이었다. 그런 친일파가 (힘을 갖고) 있는 한 통일 정부를 세운다는 건 굉장히 어려웠다. 친일파는 모든 걸 동원해 단정 운동 등에 적극 뛰어들었는데, 미군정이 그런 친일파를 엄청나게 키워주지 않았나. 그런데 난 소련도 분단에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소련도 큰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반탁 투쟁에 반소·반공 운동으로서 정략적인 면이 많았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반탁 투쟁에 담긴 독립에 대한 한국인들의 강한 염원, ‘수천 년간 독립 국가를 이어온 우리에게 신탁 통치는 있을 수가 없다’는 자기 역사에 대한 강한 믿음, 주체적으로 해방을 맞고 해방 직후 상황을 스스로 이끌어갔다는 강한 자부심, 이런 것들을 소련이 너무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반탁 투쟁의 선봉에 선 일부 세력이 보여준 반소·반공에 대해 상당히 감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닌가. 난 그런 점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그리고 제1차 미소공위 실패 이후 김규식과 여운형이 좌우 합작 운동을 하게 되는데, (이때) 여운형이 직접 북한에 가서 소련군 대표들과 얘기한 것도 자료에 나오지 않나. 소련 측에서 아주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제일 큰 이유는 미국 정부와 미군정이 좌우 합작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반도에 통일 정부를 세우려면 좌우 합작의 길밖에 없는 건 누가 봐도 확실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무리 미국과 미군정이 지원하더라도 소련은 소련대로 자기 세력을 키우면서 지원하면 되는 건데, (소련이) 합작에 상당히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도 문제다. 물론 미국과 소련 모두 점령 지역에서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려 했다는 건 기본적인 것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스물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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