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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철거민의 '스페셜 땡스 투' 1인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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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철거민의 '스페셜 땡스 투' 1인 시위

[인터뷰] 서울시 갈등조정으로 삶의 터전 찾게 된 이선형 씨

10월 25일. 서울시청 정문 앞에는 한 사내가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박원순 서울시장님, 철거민이 삶의 터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의와 비난, 호소로 가득한 1인 시위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사내 역시 전날 까지는 다른 1인 시위자들과 비슷한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었다. 이 사내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 10월 25일 '마지막'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이선형 씨. ⓒ프레시안(김하영)

나이 쉰의 이선형 씨. 그는 2006년 북아현동 추계예술대학 들어가는 길 쪽에 곱창구이 가게를 차렸다. 프랜차이즈 가게였다.

"부산에서 가게 하다가 망하고 처갓집 도움으로 작은 가게를 하나 얻었어요. 장모님이 북아현동에서 40년을 사셨거든요. 10평 정도 되는 작은 가게였죠. 권리금이 3000만 원이었고 시설비, 인테리어 등 초기 자금이 7000만 원 정도 들었습니다."

나름 장사가 잘 됐다고 한다. 가게 목이 좋아서 동네 사람들이 계 모임 등이 있으면 이 씨의 가게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여름에는 매출이 영 시원치 않았다. 숯불을 넣고 기름진 곱창을 구워 먹기에 부담스러운 계절이다. 그래서 이 씨는 메뉴에 '장어'를 늘렸다.

"하루는 건물 주인과 아는 후배가 장어 한 번 구워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시장에서 장어를 사다가 구워줬어요.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먹어 본 사람들이 아주 맛있다고 장어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제가 원래 부산에서 장어구이를 했거든요. 프랜차이즈 본사에도 양해를 구하고 장어구이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2008년 장어구이를 시작하자 '대박'이 났다. 장사가 잘 되는 날은 하루 매출을 100만 원을 넘기는 날도 있었고, 월 800~1000만 원의 수익이 났다고 한다. 주방이 좁아 장어 손질을 하기 힘들었지만 돈이 잘 벌리니 쉴 수가 없었다. "너무 행복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09년 재개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2010년 관리처분 인가가 났다. 마음이 바빠졌다.

"재개발 얘기를 들은 이후에는 하루도 쉴 수 없겠더라고요.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하루라도 더 벌 수 있어야 할 때 벌어야 했죠."

그래도 이 씨는 '장사가 잘 되니 재개발이 돼 나가게 되더라도 상식선의 보상은 받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통보를 받은 감정평가 결과 보상액수는 2700만 원. 가게 얻을 때 들어간 권리금도 안 되는 액수였다. 매상에 대한 평가는 둘째 치고, 이 돈을 받아서는 포장마차 하나 차리기 어려웠다.

"이렇게 장사가 잘 됐는데…. 감정평가 나온 거를 보니 터무니가 없더라고요. 조합에 여러 번 찾아가봤지만 매번 문전박대였죠. 어디 나만 그랬겠어요? 그해 8월 건너 고기구이집 사장님은 가게에서 목을 매 자살을 하셨어요. 장사 잘 되던 집이었거든요. 권리금을 몇 억을 준다고 해도 안 팔던 분인데요."

이 씨는 법원 명도소송에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보상금 산정을 한 감정평가서를 공개하지 않더라고요. 저는 6년간 장사하면서 기록한 장부까지 다 법정에 제출하면서 판사에게 사정을 얘기했는데, 판사는 '왜 감정평가서를 공개 안 하냐'고 물어 보고는 끝이더라고요. 감정평가서를 공개하고 다시 협의를 한 뒤에 오라고 한 뒤에 판결해도 되잖아요. 재판부가 너무 실망스러웠어요."

이 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가게를 지키며 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던 2011년 11월 어느 날.

"철거가 들어올 것 같더라고요. 집사람이랑 가게를 철야로 지키고 있었죠. 그런데 하루는 법원에서 명도소송 중재를 한다고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법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조합 측에서 법원에 나오지 않았더라고요. 실망해서 가게로 돌아왔는데, 글쎄 가게는 부서지고 아내는 실신해 있는 겁니다. 저 없는 동안에 철거 용역들이 들이 닥쳐서 아내랑 함께 있던 처제들을 팔 다리 잡고 끌어내고, 그대로 포클레인으로 가게를 찍어버렸데요. 앞집 오토바이 가게 사장님이 다 봤어요."

분노한 이 씨는 그 길로 가게 앞 도로가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경찰에 신고도 하고 서대문구청에 가서 항의도 하고, 서울시에 시민감사 청구도 내고, 조합을 상대로는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하는 등 백방으로 뛰어 다녔다. 조합에서 소식지를 통해 이 씨를 비난하자 검찰에 조합을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이 씨는 "실망만 했다"고 말했다.

철거민의 투쟁.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이 씨 주변의 가게들도 모두 손을 들고 나가 이 씨만 남았다. 무엇이 그를 싸우게 한 걸까.

"너무 억울했어요. 사람이 안에 있는데 포클레인으로 찍어버렸잖아요. 그것도 법원에서 중재한다고 해서 내가 나간 사이에. 경찰도 현장에 있었지만 막지 않았죠. 2700만 원 보상금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어요. 얼마나 장사가 잘 되던 가게인데. 그리고 장모님은 여전히 북아현동에 살고 계시잖아요. 지금은 월세 받으면서 살고 계시지만 재개발 때문에 쫓겨 나시면 월세 주고 살아야 하시는 거예요. 어르신들, 몸 사리지 않습니다. '죽여라' 버티실 거예요. 그런 상황이 뻔히 예상되는데 그냥 털고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 씨를 돕는 사람들도 이 씨에게 도움과 위안, 책임감을 함께 불어줬다고 한다.

"연대해주고 응원해주면서 함께 하는 분들을 보면서 저도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의식이 생기고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제가 싸우는 과정에서 연대해주시는 목사님들 덕에 세례를 받았거든요. 지금은 마냥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이 제게 철거민의 십자가를 주셔서 강제 철거 없는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소임을 주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경찰, 검찰, 법원, 구청, 시청 등 제도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이 씨는 노력의 성과가 보이지 않자 서울시청에서 1인 시위에 돌입했다.

"신청사 짓기 전에 서소문 청사 시절 청사 안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어요. 피켓 들고 있다가 청원경찰에게 들려 나갔죠. 청사 안에서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걸 경향신문에서 기사를 썼어요. 민변 박주민 변호사가 통행에 방해가 안 되면 청사 안에서 아무리 돌아다녀도 괜찮다고 해석을 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기사 보여주면서 시위를 계속 했죠. 시간이 지나니 청원경찰이 음료수도 사주고 친해졌어요. 시장님 보려면 주차장 앞에서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주차장 앞에서도 했는데 한 번도 못 봤죠.(웃음) 그리고 신청사로 옮긴 다음에 1인 시위도 여기 와서 하는데 또 들려 나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싸우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투쟁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2013년 6월. 결국 그는 시장을 만나게 됐다. 박원순 시장이 서대문구 현장시장실을 하며 북아현동을 찾았을 때 이 씨는 피켓을 들고 서 있다 박 시장에게 자신의 사정을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건넸다.

"박 시장이 제 편지를 읽어보더니 '내가 나설테니 협상 결과에 승복하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그러겠다'고 답했죠. 1주일 뒤에 서울시 갈등조정관이 찾아 오더라고요."

이 씨가 그 자리에서 박 시장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데에는 주변의 조언도 컸다.

"2년 동안 농성하느라 파산 직전이었어요. 빚도 많이 지고. 용산참사 유가족들과 두리반 부부, 박래군 선생 등 경험 많은 대책위 분들이 그러시더라고요. 다른 지역에서도 6~7년 싸우는 동안에 죽고, 다치고, 병들고, 불행해지는 모습을 많이 봐 왔다고. 이러다 나도 죽겠구나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서울시에서 나서서 조정을 해주는 경우가 별로 없으니 기회로 삼아 보라 하더군요."

이 씨는 서울시 강영진 갈등조정관(성균관대 갈등해결연구센터장)을 만났다.

"서울시청에서 강영진 조정관을 만나 여섯 시간 동안 얘기를 했어요. 너무 고마웠어요. 그동안 구청, 시청을 찾아 다니며 공무원들에게 얘기를 해봐도 귀찮아하거나 여기 저기 다른 데로 보내며 핑퐁 게임을 하거나 왕따 시키는 경우가 태반이었거든요. 강 조정관이 내 얘기를 들어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정도였죠. 강 조정관은 저희와 조합을 오가며 의견을 조율한 것은 물론, 농성장에 찾아와 제 아내도 위로해주고 제가 원래 가게를 하던 프랜차이즈 본사에 가서도 제가 다시 가게를 할 때 도움을 달라는 부탁까지 하셨더라고요."

강영진 조정관은 이 씨와 조합 사이를 4개월을 오가며 중재와 합의를 이끌었다. 강 조정관은 "이 씨는 조합에 대한 적대감이 큰 상태였고, 조합은 '법대로 한다'는 고수하고 있어 의견 조율에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강 조정관이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프랜차이즈 본사에 부탁을 하고 서울신용보증재단의 소상공인 창업자금 지원 제도를 이 씨에게 소개하는 등 이 씨가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준 덕분이었다.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조합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만스럽지만 나름 다시 장사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씨는 10월 25일을 마지막으로 1인 시위를 끝냈고, 조합과의 합의에 따라 조합을 상대로 낸 소송도 모두 취하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장사를 시작할 생각이다. 그런데 이제는 '혼자 잘 살기' 위한 장사가 아니다.

"프랜차이즈 본사랑 가게 자리를 좀 알아봐야죠. 같은 아이템으로 가게를 하려고요. 장사를 하게 되면 한 달에 하루 쉬면 같이 연대해주신 분들을 위해 공간을 내줄 생각이예요. 아직 그 분들과 상의는 안 했지만, 공간이 있으면 바자회도 할 수 있고 모임도 할 수 있고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제가 2년 동안 싸우면서 얻은 경험들, 각종 민원을 넣으면서 알게 된 행정 지식들 이런 것들을 공유하고 싶어요. 아직 재개발 때문에 억울하게 쫓겨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제가 사회적으로 받은 은혜를 갚아아죠."

▲ 이선형 씨가 '마지막' 1인 시위에 찾아온 박원순 시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프레시안(김하영)

이 씨에게 그동안 고마웠던 분들을 언급해달라고 했다. 우선 명도 소송 당시의 기억부터 꺼냈다.

"명도 소송을 준비할 때 주변에서 하는 소리가 '법대로 하면 진다'고 해요. 그래서 변호사 도움 받을 생각은 안 하고, 다만 행정사무소에 가서 답변서 자문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행정사가 돈을 떼먹고 도망을 갔어요. 결국 저 혼자 소송을 해야 했는데, 법정에 가보니 판사가 변호사 얘기는 듣는데 당사자인 나에게는 말은커녕 눈길도 안 주는 거예요. 말 하고 싶고, 주장하고 싶고, 하소연하고 싶은데요. 그게 현실이더라고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더니. 사법부의 현실을 느꼈죠."

그 후 그는 손해배상소송 등을 진행하면서 공익인권변호사 모임인 '희망을 만드는 법'(희망법) 김재왕 변호사를 만나게 됐다.

철거 투쟁 과정에서 종교와 대책위 '동지'들은 그에게 큰 위안이 됐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은 이 씨였지만 역시 가장 고마운 사람은 아내였다.

"….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집사람이 잘 버텨주고 싸워줬어요. 집사람이 제일 고맙죠. 제일 고맙고. 집사람이 제일 고맙고…."

눈가가 촉촉해지는 이 씨에게 분위기 전환을 위해 '자식들에게는 안 고맙냐'고 핀잔을 줬다.

"아이들에게는 고맙다기보다는 미안하죠. 중3 딸 아이 학교가 농성장 바로 뒤에 있어요. 사춘기 예민한 시절인데. 친구들한테 왕따는 안 당할까 항상 걱정이 됐죠. 부모가 상황이 안 좋아 뒷바라지 못해주니…."

1시간을 넘게 서울시청 앞에 서서 이 씨의 얘기를 들었다. 인터뷰를 끝내려는 무렵 이 씨는 뜻밖에도 언론에까지 깊은 감사를 표시했다.

"제가 힘들 때 힘들어 하는 모습 취재하고 알려준 언론은 조중동이 아니라 경향신문, 한겨레, 오마이뉴스 이런 데였어요. 철거 보도가 다소 민감할 수도 있는데 자세하게 보도해줘서 너무나 고맙죠. 법이 있어도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서울시장 정도가 나서니까 이 정도 된 거 아닐까요. 지금도 곳곳에는 재개발 때문에 억울한 분들 너무 많아요. 앞으로도 언론이 저 같은 사람들 많이 관심을 갖고 알려주시면 박원순 시장이 재개발 정책을 바로 잡는 데 힘도 실어줄 수 있지 않을까요. 감사와 부탁의 말씀을 동시에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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