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민주화는 2012년 대선을 관통한 화두였습니다. 이 화두를 잘 풀어가는 것이 박근혜 정부의 주요 과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제 민주화에 관한 논의는 무성하지만 이뤄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갈 길은 멀지만 포기할 수 없는 과제인 경제 민주화를 위해 다시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할 때입니다.
이에 <프레시안>은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을 위한 국민운동본부' 자문위원회와 공동으로 경제 민주화의 오늘을 짚고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기획 '경제 민주화 워치'를 진행합니다. '경제 민주화 워치' 칼럼은 매주 게재됩니다. <편집자>
한국 사회에서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으로 부상하면서 그에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도 매우 치열하다. 이들은 경제민주화를 위한 입법을 저지하거나 희석시킬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동원해 반대논리를 전파하고 있다. 이로 인해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이데올로기 갈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그 최전선에 신자유주의 논객들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지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전개되었던 치열한 찬반논쟁에서 나타난 신자유주의의 반대논리는 앞으로도 전개될 이데올로기 갈등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논객들은 어떤 근거로 경제민주화에 반대할까?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을 무대로 신자유주의 논객들이 제시하는 근거를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음을 알게 된다. 경제민주화를 저지해야 한다는 목표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객관적이고 엄정한 근거를 제시하기 보다는 감정적이고 허구적인 이유가 제기되기 일쑤다. 이 글에서는 그 중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출처는 논객의 실명을 밝히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1. 경제민주화는 역사의 유물이다
경제민주화에 대해 신자유주의자들이 느끼는 초초함은 부실하고 부정확한 주장을 은폐하기 위해 거칠어진 문체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는 경제민주화의 "이념적 고향"인 독일에서조차 지금은 "역사의 유물"이 되어버렸는데 독일에서 유학한 한 정치인에 의해 왜곡되어 도입되면서 그에게 "한국 사회 전체가 놀아나고 있다"(민경국)고 비난한다.
경제민주화의 본고장은 독일이다. 독일 경제민주화 역사는 다름 아니라 대기업 경영진의 일방적인 의사결정을 제한하는 역사, "대기업 규제"의 역사였다. 그리고 이 경제민주화의 꽃은 공동결정제이다. 정확하게 1인1표의 원칙이 관철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기업에서 소유권이 없는 노동자가 기업경영에 관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제도이다.
오늘날 이 제도는 독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EU 회원국들에서도 시행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기업가 측에서 여전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공동결정제는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되어 있다. 이 공동결정제가 한 차례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자본가들이 위헌소송을 제기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 헌법재판소는 1979년 3월 1일 공동결정제에 관한 판결문에서 합헌 판결을 내렸다. 기업공동결정제는 "근로자들이 기업의 의사결정에 제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대기업들에서 타인의 지휘권과 조직권에 복속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타인결정(Fremdbestimmung)을 완화하고 기업경영의 경제적 정당성을 사회적 정당성으로 보충하는 과업을 가진다"고 판결했다.
2005년 독일 정부가 위촉한 '기업공동결정제평가위원회'는 공동결정제가 독일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경제적으로 타당성이 입증된 제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앞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가 주장하듯이 이 제도가 "실패한 제도로 판명" 되었다면 보수적인 기민당 출신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공동결정제를 "사회적 시장경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위대한 업적"으로 칭송할 수 있을까? 독일에서 경제민주화가 요란하게 논란이 되지 않는 이유는 이 논객이 주장하듯이 "역사적 유물"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이미 현실에서 굳건하게 정착되어 있는 경제민주주의가 "실패"했다고 거짓말하는 이 논객은 한국에서는 경제민주화가 "119조 2항을 아무리 읽어봐도 대기업 규제와 관련이 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생떼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이 조항에는 대기업 규제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경제민주화를 위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분명히 규정되어 있다. 경제민주화가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에도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기업 규제"가 명시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정말 헌법에 "대기업 규제"의 근거가 없다고 믿는다면 재벌들에게 경제민주화 문제는 간단하다. 지금처럼 경제민주화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험악한 말들을 동원해 소동을 피울 필요가 전혀 없다. 경제민주화를 위한 법적, 제도적 개혁을 위헌으로 제소하면 그만이다. 재벌들이 경제민주화 논의 단계에서 벌써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경제민주화가 대기업 규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이다. 또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한 규제"는 있어도 "대기업 규제"는 없다는 해석은 제119조 ②항을 폐지하려는 재벌들의 노력을 쓸모없는 짓이라고 조롱하는 꼴이 된다.
2. 색깔론: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경제민주화를 대기업에 대한 사전적 규제의 강화 정도로 폄하하면서 색깔론을 펴는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이용하는 가장 흔한 꼼수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 논리적, 현실적 귀결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가 없다. 한 신자유주의 논객은 "선거 목전에 한국의 포퓰리스트적 사회주의가 급히 걸쳐 입은 외투가 '경제민주화'이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경제민주화는 먼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경제를 몰락하게 하며 얼마 후에는 그 정치도 망하게 한다"(민경국)고 단언한다. 그 논리적 귀결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경제민주화"는 경제헌법에 가장 먼저 명시되어 있는 경제정책이념인데 이를 사회주의로 해석한다면 경제헌법은 사회주의 헌법이 되고 "경제의 민주화를 위한 규제와 조정"이라는 제119조 ②항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정부정책'으로 해석된다. 이 틀 안에서 발전하고 있는 한국경제는 사회주의경제가 되는 셈인데, 그렇다면 재벌들은 사회주의 기업들인가?
현실적 귀결을 보자. 경제민주화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결국에는 정치와 경제를 모두 망하게 할 것이라는 공포 시나리오다. 그런데 한국에서 실제로 민주주의의 최소 원칙인 '법 앞의 평등'을 밀어내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관철시켜 민주주의를 이미 타락시키고 한국을 새로운 '신분사회'로 역행시킨 것이 누구인가? 정계, 언론계, 학계 등을 막강한 자금력으로 매수하여 정치와 시민사회를 왜곡된 '시장논리'에 복속시키려는 세력이 누구인가? 경제민주화는 이처럼 이미 왜곡되어 있는 한국의 시장경제를 정상적인 시장경제로 바로잡으려는 노력이다. 경제민주화가 요구하는 것처럼 기업 회계에 대한 내부 감시를 강화하여 총수의 전횡을 제어하고 투명성을 높인다면 이러한 반민주적 역행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재벌들과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경제민주화를 두려워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 투명성 때문이다. 회계의 투명성이 높아져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만 사라져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건강성을 크게 회복할 것이다. 경제민주화는 한국 민주주의를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갈수록 타락하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를 구제하고 참다운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제도적 장치이다. 아울러 회계의 투명성만 높아져도 재벌 경영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감점당하고 있는 한국 경제의 경쟁력과 국가신인도도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경제민주화는 한국경제에 다시 활기를 불어 넣는 제도가 될 것이다. 재벌 총수 일가에게는 불리하고 손해가 될지라도 국가가 경제민주화를 관철시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 사회 전체가 건강해지고 한국 정치 전반이 건전해지며 한국의 국민경제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을 사회주의 헌법으로 만들면서 갑자기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는 논객은 또 있다. 그는 경제민주화로 "경제는 멍들어 쇠락한다"고 주장하고 이는 "역사에서 증명된 사실"이라면서 "경제의 민주화를 역사상 가장 완벽히 이룬 나라들" 중 하나로 북한을 꼽고 있다(최광). 경제판 '종북론'이다. '경제민주화'를 저지하려고 이제는 대한민국 헌법을 '종북 헌법'으로 규정하는 셈이다. 북한은 물론 소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이 왜 망했는지에 대한 분석은 매우 다양하지만 경제민주화를 "가장 완벽하게" 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주장은 문자 그대로 억지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사회주의가 민주주의 결핍으로 망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경제민주화를 관료주의의 확대에 따른 전체주의화로 겁주는 논객도 있다. 그에 따르면 "정부의 개입과 관료적 관리가 특정 집단이 아닌 개인의 일상생활까지 옥죄게 될 수 있고, 민주화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전체주의가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본질이고 앞날이다."(송원근) 이 논객은 경제민주화가 관료주의를 부추겨 결국 전체주의로 이어질 것으로 망상하고 있다. 이 공포시나리오는 경제민주화에 저항하는 많은 한국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개념적 혼란과 미숙, 그리고 오만으로 가득 찬 허구이다. 전체주의가 막강한 관료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관료주의가 아무리 지나칠지라도 전체주의로 변질된 사례는 세계사적으로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정치권력의 성격에 의해 관료제의 성격이 변할 수는 있어도 관료주의가 정치권력의 본질마저 규정할 수는 없다. 독재정권 하에서 국민에 '군림하던' 관료는 민주정부 하에서는 '봉사하는' 관료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 논객이 경제민주화를 전체주의와 연결시키는 결정적인 고리는 관료제(bureaucracy)를 관료주의(bureaucratism)와 동일시하는 개념적 혼동이다. 관료제는 일정한 규모를 초과하는 조직에서 효율적, 합리적 운영을 위해서 필요로 하는 장치이다. 관료제는 조직, 특히 국가조직의 복잡화, 전문화, 위계화 등과 함께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운용원리이다. 이에 비해 관료주의는 관료들이 조직의 목적과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목표와 목적에 따라 행동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번문욕례(red tape)는 전형적인 관료주의 현상이다. 이는 사회적 효율성을 저하시킨다. 경제민주화가 관료주의를 강화하고 전체주의에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는 경제민주화, 관료주의, 전체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논리비약이다.
관료제의 확대가 반드시 관료주의의 심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료제가 언제나 관료주의를 낳는다면 크든 작든 정부가 존재하는 한 관료주의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병폐가 된다. 관료주의가 두려워 경제민주화를 단념하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다. 사회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관료기구의 확대가 관료주의로 변질되는 현상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로 차단될 수 있다. 관료제는 정해진 법과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속성을 가지므로 이 법과 원칙이 정해지는 과정뿐만 아니라 그 내용 및 준수 여부에 대한 지속적인 국민 감시가 병행되면 관료제가 관료주의로 타락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활동이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그래서 정보 공개, 투명성 확보는 관료주의를 차단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경제민주화는 국가 관료제를 확대시킬 가능성은 있지만 그로 인해 우려되는 관료주의의 위험은 경제민주화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 전반의 민주화를 통해 억지되어야 한다.
끝으로 관료제와 관료주의 문제는 정부에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다. 기업 내에도 관료제와 관료주의의 문제가 상존하기 때문이다. 기업도 조직인 한에서 관료제를 필요로 하며, 재벌처럼 조직이 비대해질수록 관료주의로 변질될 위험도 커진다. 바로 이 기업 내 관료주의의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서도 경제민주화는 필요하다. 경제민주화 일환으로 추진되는 민주적 의사결정과 회계의 투명성은 기업 내 관료주의를 타파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장치가 될 수 있다.
3. 경제학에는 경제민주화가 없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이색적인 비난 중 하나는 모르는 체하는 것이다. 한 신자유주의 논객은 "미국에서 경제학과 관련된 많은 과목들을 수강했지만, 경제민주화란 용어는 들어본 적이 없다"(현진권)고 자랑스럽게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가진 특징의 하나가 바로 다른 경제학 흐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 신자유주의 논객이 고백하듯이 미국 내 경제학 데이터베이스와 백과사전 "네 곳"을 검색해도 경제민주화(economic democratization)에 관한 논문이나 용어해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관점에서는 경제민주화는 "경제학에서는 학문적 근거가 없는 용어"이고 "경제학적 개념이 없는 대선용 정치용어"이다. 그것도 정치인들이 "들었을 때 기분 좋고, 뭔가 철학이 있는 듯한 효과적인 용어를 개발하려고 경쟁"하면서 생긴 용어이다. 이 논객은 경제민주화가 이미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 체 하고 있다. 경제민주화 용어를 "들어본 적이 없다"니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검색을 하는 김에 한번만 더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경제민주화를 구글에서 검색했더라면 Wikipedia에 실린 경제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 정의를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경제민주주의는 경제학 전문 사이트에는 없지만 일반인들의 상식을 풍요롭게 해주는 사이트에는 있는 용어,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모르지만 일반인들은 알 수 있는 용어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경제민주주의는 "의사결정권한을 기업 주주로부터 근로자, 소비자, 하청업자, 이웃과 폭넓은 공중을 포함하는 공적 이해당사자들에게 이동시킬 것을 제안하는 사회경제철학"이다.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를 경제민주주의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는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를 배격하고 주주자본주의를 철저히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신자유주의 세례를 받은 경제학자가 이해당사자 자본주의의 실현을 의미하는 경제민주화에 대한 이해가 깊을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제민주화가 실현되면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이데올로기로서 설 땅이 없게 된다.
4. 소비가 경제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비판하는 바는 경제민주화 개념이 모호하고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경제민주화를 일단 "경제문제가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되도록 하자는 의미일 것"이라고 잠정적인 정의를 내리는 논객도 있다. 그런데 그는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소비자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황수연)이라고 재정의하면서 경제를 대뜸 소비로 축소시킨다. 하지만 경제활동은 생산, 분배, 교환, 소비로 구성되며 경제민주화는 이들 영역을 모두 포괄한다.
이 논객에 따르면 소비자는 소비를 통해 "무엇을 얼마만큼 생산할지"를 결정하는데 이것이 "경제적 민주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1원1표주의를 통해 선호의 강도도 반영되는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그러나 경제민주주의를 1원1표주의로 한정하면 돈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배제된다. 그래서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민주주의로 변질된다. 정확히 돈이 있는 만큼만 경제민주주의에 참여할 수 있고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 민주주의는 이미 다 되어 있다. 새삼 경제민주화를 논할 필요가 없게 된다. 작금의 경제민주화 논의는 이 1원1표주의를 1인1표주의로 바꾸자는 것이다. 소비가 그렇게 되려면 모든 소비자에게 일정한 소득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경제민주화는 자연스럽게 소득분배 영역을 포함하게 된다.
나아가 경제민주주의는 소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소비가 생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는 무엇을 언제 얼마만큼 생산할지이지 '어떻게' 생산할지에 대해서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반도체를 몇 개 생산할지는 소비자가 결정하지만 어떻게 생산할지, 독성물질을 투입해서 노동자의 건강을 해치면서 생산할지, 아니면 노동자의 건강도 지키면서 생산할지는 소비자가 결정할 수 없다. 바로 이 생산과정에서 생산자가 발언권을 가지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을 이룬다.
5. 해봐야 소용없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중에는 경제민주화는 해봐야 소용없고 이미 실패할 운명을 안고 태어나는 것으로 예단하는 이도 있다. 경제민주화는 의회를 "구체적 계획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말 가게"(김이석)로 전락시키고 의회의 무능만을 부각시켜 결국 대통령과 행정부 관료의 권력을 강화시켜줄 뿐이며,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더욱 제한될 것이고 다수의 대중이 실망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 빤하다는 것이다. 이는 국회를 비난하는 '국민스포츠'에 동참해서 경제민주화 시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주장이다.
그러나 재벌들과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저항만 없다면 경제민주화는 쉽게 탄력을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해봐야 소용없다고 예단하는 것은 이 논객이 논거로 삼고 있는 하이에크의 진화관에도 배치되는 '우물에서 숭늉 찾기'이다. 하이에크는 시장질서가 오랜 시간을 두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불완전한 지식과 정보에 의거해서 형성되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불가피하고 반복적인 "발견과정으로서의 경쟁"을 통해 "진화하는 질서"(하이에크)로 파악했다. 물론 하이에크는 국가에 적대적인 철저한 시장근본주의의 관점에서 "설계된 질서"보다 "자생적 질서"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한국의 시장질서는 태생부터 국가에 의해 "설계된 질서"였고 이 "설계된 질서"의 산물이 바로 재벌들이다. 그리고 아직도 이 "설계된 질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의도적으로 간과하면서 한국의 시장경제를 마치 "자생적 질서"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하이에크에게서 한국경제가 건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진화관일 것이다. 그래서 경제민주화도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거치는 진화과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이에크의 표현을 빌어 경제민주화를 이해하자면, 한국의 "설계된 시장질서"를 새롭게 "설계"하는 작업이다. 경제발전의 "경로의존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신자유주의 경제학과 재벌들이 주장하듯이 한국의 "설계된 시장질서"를 시장만능주의의 "자생적 시장질서"로 전환시키려는 시도야말로 한국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갈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그리고 한국에게는 선진국들의 역사적 실패·성공 경험이라는 소중한 지적 자산이 있기 때문에 이 "설계"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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