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시절 대표적 '반공 논리'중 하나였고, 지금은 군의 정훈 교육 교재에나 가끔 등장하는 '월남 패망의 교훈'이라는 말이 2014년을 목전에 둔 지금 회자되고 있다.
홍 사무총장은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파리 평화협정 체결 2년 후인 75년, 북월맹이 남월맹을 공격했을 때 천주교 짠 후 탄(Tran Huu Thanh) 신부는 북월맹 공산군 공격을 반독재 민중공세라고 하며, 남침을 저지하던 당시 남월맹의 티우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했다"며 "티우 대통은 이에 겨우 두 달 가량 버티다 사임했으며 이후 월남은 패망했다"고 했다.
홍 사무총장은 "월남 패망 후 커밍아웃한 인사 중에는 정치인, 군인, 언론인 등 모든 영역이 망라됐다. 베트남 붕괴의 적은 바로 내부에 있었던 것"이라며 "지금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자유와 민주주의, 종교수호, 대통령 사퇴를 주장하는 북한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 베트남 사례와 무엇이 다른지 소름이 끼칠 정도"라고 말했다. "월남의 패망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홍 사무총장의 말대로라면, 지금 베트남 정부는 북한과 같은 정부다. 소멸됐어야 마땅한 '귀태' 국가다. 홍 사무총장의 말대로라면 지난 9월 박근혜 대통령은 "베트남 붕괴"의 주역들이 집권하고 있는 베트남을 국빈 방문해 '귀태'의 후예인 쯔언떤상 베트남 주석과 회담을 했다. 심지어 월남 패망에 결정적 역할을 한 호치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를 참배했다.
이런 사실로 미뤄봤을 때 홍 사무총장의 발언은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다. 박 대통령을 탄생시킨 집권 여당의 사무총장이 베트남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망언'을 한 셈이다. 일부 극우 언론들이 수십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용하고 있는 '짠 후 탄 신부'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말이다.
'짠 후 탄 스토리'의 진짜 교훈은?
▲ 박창신 원로 신부 ⓒ연합뉴스 |
매년 4월 말이 되면 학교에서, 군부대에서 '월남 패망의 교훈'이라는 '강연'이 이뤄지곤 했다. 반공의 중요성과 북한의 위협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독재 정권 시절 체제 유지의 중요한 '교육 수단'으로 작동했었다. 1992년 베트남과 정식 수교를 하고, 1998년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해 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사과하면서 '월남 패망의 교훈'이라는 국가의 '교육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독재 시대의 '논리'를 한-베트남 수교 21주년이 된 해에 부활시킨 홍 사무총장의 발언에는 중요한 사안들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짠 후 탄 신부는 '세계 4대 생불'이라는 탁닛한 스님과 함께 베트남 현대사에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인물이다.
1975년 3월 7일자 <동아일보>를 펼쳐보자. 3.1절 기념 시리즈로 '세계의 민권운동가들' 연속기획 5편에 짠 후 탄(트란 후 탄) 신부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그는 바로 전쟁의 산물이다. 전쟁을 통해 치부를 한 그에게 평화는 최대의 적이 됐다."
티우 월남대통령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전국의 교회와 가두를 누비고 다니는 행동의 설교자 트란 후 탄 신부, 월남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전쟁과 독재와 부패의 와중에 평화와 민주와 사회정의를 실현하자는 트란 후 탄 신부의 정신 혁명 운동은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몽둥이와 최루탄, 완력부대의 납치는 물론 공산주의자의 앞잡이, 미제의 주구라는 양극단의 오해와 박해까지 받으면서. 전쟁 30년 두 차례의 휴전협정도 아랑곳없이 계속되는 전쟁으로 월남 국민들은 가난과 부자유의 굴레를 벗을 날이 없었다. 티우 대통령의 장기 독재, 국운을 걸고 싸우는 군의 부정과 관리의 부패가 사회를 혼탁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월남 국민들의 불만은 더욱 팽배해졌다.
74년 6월 마침내 월남 카톨릭계에선 양심의 외침이 울려나왔다. 트란 신부를 비롯한 카톨릭 신부 310명은 "이런 상태에서 국민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보고만 있을수 없다"면서 공무원과 군대, 여당인 민주당 간부 등을 상대로 직권남용 오직 부패 일소를 요망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유령 병사를 만들어 원조물자를 떼어먹고 지원 사격을 하거나 헬리콥터로 부상병을 날라다 주고도 뇌물을 받는 군의 부패상을 외국신문엔 실려도 월남 안에선 논의조차 할수 없었던 숨막히는 상태를 더 이상 참고 견딜수는 없었던 것이다.
작년 9월 8일 북부의 왕도 후에시에선 월남 사상 처음으로 카톨릭 교도들의 데모가 일어났다.
트란 신부가 이끄는 반부패국민운동 본부가 주도하는 구국기도회에 이어 거리에 나간 5000명의 카톨릭 교도들은 경찰과 충돌, 많은 부상자를 냈다. 강직하기로 이름난 트란 신부가 주도한 반부패운동의 서막이었다.
비리를 바로잡고 부정을 없애자는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는 고사하고 아예 국민의 입을 막아보려는 권력자들의 횡포, 트란 후 탄 신부는 "자유와 민주주의와 정의의 불구대천의 적인 티우 대통령이 현직에 있는한 월남에 평화는 없을 것"이라면서 티우 대통령과 일족의 부정 축재를 고발하는 '고발1호'를 공표했다.
6개 항목에 걸친 최고권력자의 부정 사례를 상세히 들면서 트란 신부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전쟁과 가난으로 고생하고 있는대 대통령과 측근들은 치부와 호사로 국가 재정을 탕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고발장에서 티우 대통령은 1억 6850만 피아스타 (약 1억 3700만 원)을 홋가하는 여러 채의 호화 주택과 6000만 피아스타의 부동산을 갖고 있고 공립병원은 대통령 부인의 개인 명의로 소유권이 이전돼 있는가 하면 쌀과 비료 공급 과정에서 갖가지 이권을 그의 친척들에게 주었다"고 폭로했다.
이 고발장을 게재했던 사이공의 6개 신문사는 정부의 발행금지 조치에 걸려 인쇄된 신문을 모두 가두에서 태워버렸다.
트란 신부의 반부패국민운동에는 불교계도 호응했다. 안쾅 사파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는 민족화해세력을 결성, 민족자결에 의한 월남 민족의 화해, 주권 존중과 국제 협력, 사회 정의에 입각한 경제 개발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언론계도 호아빈지의 자진 휴간에 자극된 200여 명의 발행인, 편집인 기자들이 보도자유투쟁위원회를 만들고 정부의 언론 탄압에 대항했다.
몇 차례의 기도회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트란 신부는 범국민적인 정화 운동을 펴기 위해 사이공으로 왔다. 그는 야당의원 부 반 마우, 안쾅사의 트리 쾅 승, 두옹반 민 장군 등 재야 반 티우 인사들과 빈번히 접촉, 집회와 데모를 통해 반부패 민권 대열을 확대해갔다.
때마침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이 미국민의 여론에 의해 물러난 직후인데다 미의회의 군원갑축위협에 겁을 먹은 티우 대통령은 처음 관망하는 태도로 카톨릭, 불교, 언론계의 대대적인 연설 집회와 시위를 허용했다. 그러나 학생, 군인들까지 데모에 가담, 반정부 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지려하자 정부의 태도는 다시 경화, 수도 사이공의 데모 진압 경찰을 증원했다.
정부의 강경책은 데모 봉쇄는 물론 기도회마저 방해했다. 트란 신부는 경찰봉에 맞아 안경이 깨지고 얼굴을 다쳐 피를 흘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티우 대통령은 트란 신부를 투옥시킬 수 없었다. 트란 신부가 반공주의자인 이유도 있지만 "공산주의를 이기려면 부패와 분열을 먼저 막아야 한다"고 주창하는 그의 말을 막으면 같은 카톨릭자인 티우 자신의 입장이 더욱 난처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티우 대통령은 국민의 원성이 높은 호앙둑나 공보상 등 각료 4명을 해임시키고 고위 장군들을 이동시키는 등 반대자 무마에 노력하기도 했다. 그런 반면 트란 신부 등 재야 지도자들에 대한 감시는 더욱 심해 거의 연금 상태 하에 두었다. 새해에 들어 공산측의 건계공세가 강화되어 푸옥빈 성도가 함락되자 월남 정부는 대대적인 반공 궐기대회를 열면서 반대 세력의 언동을 강력히 통제했다.
트란 후 탄 신부의 반부패 민중운동은 그렇다고 중단되진 않았다. 트란 신부는 또다시 제 2의 대통령 '고발장'을 만들어 푸옥빈 실함(失陷, 성이 함락됨)을 비롯한 군사정책의 실패를 문책했다. 이 고발장을 실은 5개의 일간신문이 폐간됐고 18명의 기자들이공산 간첩 및 용공분료로 몰려 체포됐다.
티우 대통령은 오는 10월 자신이 계엄영하에서 개정한 헌법에 따라 3회 째의 대통령 출마를 꿈꾸고 있다.
"이제 월남의 병사들은 티우와 그 부패한 장군들을 위해 더 이상 피를 흘릴수는 없다고 깨달았다"면서 대통령 비판을 멈출줄 모르는 트란 후 탄 신부의 반독재민권투쟁의 앞길은 아직도 멀고 험난한 것만 같다.
이 기사가 난 후 두달 여만인 4월 30일 오전 7시53분, 미국 해병대원들은 미국 대사관의 성조기를 챙겨서 헬기로 베트남을 떠났다. 이 날을 홍 사무총장은 '월남 패망일'로 기억하나본데,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사이공 해방일'이다. 일본인들에게 '패전일'이 우리에게 광복절인 것처럼. 요컨데, 월남 패망은 추악한 진실을 감추려는 정권의 '비위'가 민심의 흐름을 거역하면서 발생한 일이다.
신부는 정권의 추악한 진실을 드러내고 바로 잡을 때 민심이 '정부'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비리 추방'을 외쳤다. 그리고 '정부'를 장악한 '정권'을 겨냥해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그런데 대통령이 그 신부에게 보낸 메시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상황은 어느 나라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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