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 15일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 등 재벌 규제와 관련된 제도의 개선안이 담긴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그동안 출총제 폐지나 순환출자 금지 등을 둘러싼 정부 안팎의 논쟁과 토론이 일단 매듭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비판은 매우 따갑다. 정부의 이번 공정거래법 개정안 발표로 재벌 개혁은 완전히 물건너간 것 아니냐는 게 시민사회의 지적이다.
경제개혁연대의 최한수 연구팀장이 이번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내용과 그 의미를 짚어보는 글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최 팀장은 이 글에서 "이번 개정안으로 재벌의 경영권 세습이 더욱 자유로워져서 재벌왕국 구축으로 이어질 것"이라면서 "결국 노무현 정부가 재벌에게 항복문서를 보낸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편집자>
작년인가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빗대어 "강남에 노사모가 결성되었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다. 아파트 가격 폭등의 혜택을 입은 강남 주민들이 노사모 '지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올해 노사모는 재계에 만들어질 것이다. △순환출자 규제 도입 철회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 적용범위 축소 △출자한도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정부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아마도 재벌들은 전경련을 탈퇴하여 노사모로 옮겨갈 것이다.
전경련보다도 더 강하게 재벌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곳이 있는데, 안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공정거래법 개정안, 재벌에 굴복한 노무현 정부의 항복문서
지난 15일 정부가 발표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사실상 출총제에 대한 사망선고이자 투자를 볼모로 한 재벌의 협박에 굴복한 노무현 정부의 항복문서이다. 공정위는 이번 개편안에 대해 사전규제를 최소화하고 사후규제는 강화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출총제라는 사전규제가 이번 개편안을 통해 확실히 소멸했다는 점에서는 공정위의 설명이 일정 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번 안에 출총제를 대체할 사후규제는 전무하다는 점에서 이는 '절반의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출총제 적용대상 기업 범위를 자산 10조 원 이상인 재벌에서 자산 2조 원 이상인 24개 중핵기업으로 축소하고, 전체 출자총액 22조 원의 61%(13조4천억 원)에 이르는 여러 예외조항들은 손대지 않은 채 출자한도를 순자산의 40%까지 높인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출총제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더군다나 공정위가 내놓은 사후규제 강화 방안이라는 것이 고작 비상장 회사의 공시 의무를 한두 개 추가하고, 재벌 관련 포털 사이트를 구축하고, 공정위의 인력과 조직을 확대하는 정도라면 사후규제 강화의 효과는 전혀 기대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출총제의 기능 중 하나가 계열사 간 출자를 억제하여 내부지분율을 제한함으로써 적대적 M&A(인수·합병)에 대한 방어를 위한 '참호'의 구축을 막는 것이다. 따라서 출총제를 사문화시켜 총수 일가의 사익추구에 대한 강력하고 효율적인 규율수단인 적대적 M&A의 작동을 정지시켜 놓고 사후규율 강화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말장난이다.
결국 공정위는 재벌개혁이라는 대의와 자기 조직 확대라는 실리를 맞바꾸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재벌왕국의 시대, 다시 도래했다
반면 공정위와의 싸움에서 순환출자의 도입 저지와 출총제 폐지라는 전리품을 얻어낸 재계는 희색이 만연하다. 재계와 일부 언론은 이번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대해 여전히 "무늬만 바뀐 출총제 족쇄"라며 비판하고 있지만 이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그동안 재계는 출총제가 폐지되면 14조 원의 추가투자가 가능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출총제 폐지가 실물투자의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그동안의 많은 연구결과들은 출자와 실물투자 사이에 특별한 상관관계가 없고, 영향이 있다 하더라도 그 정도는 지극히 미미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출총제 폐지로 약간의 투자가 증가한다 하더라도 현재처럼 산업별, 기업별 양극화 정도가 심화된 상태에서 이것이 국민경제 전체의 과실로 돌아갈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물론 출총제 폐지의 모든 효과가 불확실한 것만은 아니다. 출총제라는 규제수단이 존재하는 현재에도 재벌그룹의 내부지분율(총수일가+계열사의 지분)은 51.2%에 이르며 그 대부분(44.0%)을 차지하는 것이 계열사 출자이다.
만약 정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몇몇 '중핵기업'을 제외하고는 모든 재벌 기업의 계열사 지분 취득에 대한 모든 제한이 없어진다. 이는 내부지분율의 급속한 증가로 이어질 것이고, 결국 재계는 그동안 오매불망 원했던 가장 강력한 경영권 방어수단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외환위기 이후 그나마 불완전하게 작동했던 적대적 M&A라는 재벌에 대한 시장규율이 사실상 폐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출총제 폐지로 총수 일가의 경영권 세습은 보다 용이해질 것이다.
출총제가 폐지되었던 1998년 2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계열사 지분 변동을 연구한 보고서(KDI, <출총제 폐지 및 재도입과 기업집단의 지배권 기여지수의 변화>)에 따르면, 이 시기에 과거 그룹의 유지에 기여도가 낮았던 회사들이 그룹 유지에 중핵적인 역할을 하는 '지배권 기여지수 1위 기업'으로 변모하였고 총수일가의 지분취득이 그 기업에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삼성그룹의 경우 '지배권 기여지수 1위 기업'이 삼성생명에서 삼성에버랜드로 바뀌고 에버랜드의 지분을 계열사들이 집중 매입하여 삼성그룹의 경영권 세습 문제가 일단락된 것이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났다.
이처럼 출총제의 폐지는 계열사 간 주식거래의 '거래비용'을 낮춤으로써 형제 간 계열분리나 그룹집단 전체의 통제권 세습 등을 통해 그룹의 구조를 새롭게 형성하기 위한 주식거래를 용이하게 해주고, 경영권의 유지와 세습과 관련된 총수일가의 부담을 최소화해주는 기능을 할 것이다. 그동안 재계가 출총제 폐지에 죽기 살기로 매달린 진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출총제 폐지의 효과는 결국 '재벌왕국'의 구축으로 요약된다. 재벌총수는 경영에 실패해도 적대적 M&A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고, 그 가족은 총수일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능력에 대한 검증도 받지 않고 계열사들의 부를 절대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지위를 거머쥘 수 있는 것, 그것을 '재벌왕국'이라는 말 말고 뭐라고 달리 표현할 수 있겠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캠페인 당시 "재벌을 개혁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역설적으로 그는 재벌규제의 폐지를 통해 '재벌왕국의 완성을 추인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노대통령이 그것을 진정으로 의도했든 안 했든 간에 이제 출총제는 폐지됐고, 재벌개혁은 물건너 갔으며, 민주공화국은 재벌왕국으로 회귀하려 한다. 근조 출총제, 근조 재벌개혁, 근조 참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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