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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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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5> 기억 저편의 뜨거운 역사, 9월총파업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1990년대부터 <한국생활사박물관>, <라이벌 세계사>, <지하철 史호선> 등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1970년 청계천의 봉제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라고 외치며 <근로기준법> 책을 안은 채 자기 몸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자각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은 1979년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 1980년 동원탄좌 노동자들의 사북항쟁을 거치며 의식적인 노동계급으로 성장해 갔다. 마침내 1987년 6월항쟁에 뒤이은 7, 8, 9월 대투쟁으로 노동자들은 그토록 염원하던 민주 노조를 갖게 되었고, 그 힘이 1995년 41만여 조합원을 아우르는 민주노총으로 결집했다. 민주노총은 1996년 12월 정리해고를 법제화하려는 노동법 개악에 맞서 연인원 359만여 명에 이르는 사상 최대의 총파업을 주도함으로써 나라 안팎에 젊고 힘 있는 한국 노동자의 존재를 알렸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한국 노동운동의 기본적인 흐름이다. 이 기억에 따르면 한국의 노동자들은 해방 후 한 세대가 지나도록 최소한의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고 힘든 노동과 심각한 인권 유린에 시달려 왔다. 전태일이 용기 있게 촛불을 밝혀 들기 전까지는 깜깜한 어둠이 노동자들의 삶 위에 덮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 기억은 잘못된 것이었다. 망각의 강 레테와도 같은 한국전쟁 시기를 건너 저편으로 가면 깜짝 놀랄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 정국을 뒤흔든 9월총파업

해방 공간의 한국 사회. 경제 사정이나 문화적 수준만 놓고 보면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일제가 남겨 놓고 간 지주·소작제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들의 자식인 노동자들은 일본인이 빈껍데기만 남겨 놓고 철수해 버린 공장에서 배를 곯고 있었다. 일제의 탄압과 차별 탓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희망을 갖고 힘차게 살고 있었다. 그 지긋지긋한 일본인이 쫓겨 가면서 삼천리금수강산이 이제 제대로 우리나라였다. 저 들판, 저 공장, 저 집이 다 우리 것이었다. 우리끼리 나라를 운영할 테니 일제에 빌붙어 제 잇속만 챙기던 친일파는 벌을 받을 것이고, 농민은 농사지을 땅을 받을 것이며, 노동자는 정당하게 일한 대가를 받을 것이었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소련이 들어왔으나, 둘 다 파시즘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켜 준 진보적 국가로 우리의 독립을 도와줄 것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반미 감정도 없고 레드 콤플렉스도 없었다. 장차 생겨날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100개가 넘는 정당이 생겨나고, 마을마다 인민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져 자치를 준비했다. 주한 미 대사관 문정관인 헨더슨의 말처럼 노천에서 밤을 지내는 거지조차도 정치 문제를 명쾌하고 열정적으로 논할 만큼 모든 한국인이 정치적이었다(박지향, 「한국의 노동 운동과 미국, 1945~1950」). 생전 겪어 보지 못한 내 나라가 생긴다는데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바로 이 시기인 1945년 11월, 노동자들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오늘날처럼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전체 인구의 10퍼센트를 밑돌고, 남한만 따지면 100만 명 남짓하던 당시의 노동자들이 조직을 만들면 얼마나 만들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내가 말한 반전이 있다. 창립 당시 전평의 조합원 수는 18만 명에 달했고, 얼마 후에는 전국에 223개의 지부, 1757개의 지방조합을 거느린 55만 명의 대규모 조직으로 발돋움했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대학 출신으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던 허성택 위원장을 비롯한 전평의 간부와 지도자들은 지적, 정치적 수준에서 오늘날 민주노총의 지도자들을 뺨칠 정도였다. 물론 당시의 통계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근대적 산업 노동자라기보다는 단순 노무자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토록 대규모 조직을 가지고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1970년대 이전을 한국 노동운동의 석기 시대로만 생각하던 나 같은 사람에게 1940년대의 한반도는 심연에서 솟아오른 아틀란티스 대륙이었다.

그러나 노동 해방을 향한 전평의 의지와 능력은 조기에 시험대에 올랐다. 1946년 들어 경제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물가는 2년 전에 비해 92배 올랐는데 임금은 물가 상승 대비 13분의 1에 불과했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조금만 참으면 되겠지 했던 민심은 서서히 미군정으로부터 돌아서고 있었다. 미군정이 민중의 여망을 외면하고 기용한 친일 관료들은 일제 때 하던 방식대로 쌀과 물자를 빼돌리는 모리배 짓을 하고, 그에 저항하는 민중에게는 친일 경찰이 지팡이 대신 몽둥이를 휘둘렀다. 게다가 즉각 독립을 당연시했던 한국인에게 미국과 소련이 모스크바에서 합의한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건은 충격과 실망으로 다가왔다.

미군정이 "인도 사람들은 굶고 있는데 그래도 조선 사람들은 강냉이라도 먹지 않느냐"고 비아냥거리며 식량 문제는 방치한 채 노동자를 해고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려 하자 노동자들과 전평의 인내는 한계에 다다랐다. 그리하여 해방 정국을 뒤흔든 9월총파업이 일어나게 된다. 50년 뒤 1996년의 총파업 이전에는 다시 볼 수 없었던 전국 규모의 총파업이었다.

9월총파업은 부산의 철도 노동자 7000명이 파업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는데, 그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자료마다 다르다. 9월 22일 0시(<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부터 24일 0시(김태승, 「미군정기 노동운동과 전평의 운동 노선」)까지 48시간 사이에 다양한 시간 추정들이 있다. 이런 혼선이 주는 느낌처럼 9월 총파업은 조직적인 주도 세력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었다기보다는 전위와 대중, 중앙과 지방 등이 엇박자를 내면서 진행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울, 부산을 포함한 남한 전역의 철도, 전기, 인쇄 출판 등 모든 산업 분야에서 파업에 참가한 25만여 노동자들은 단호하고 집요했다. 생존권에 대한 절박함이 그들의 투쟁을 추동했겠지만, 아직 근대 사회인지조차 불투명했던 해방 시기에 노동자들이 9월총파업에서 보여준 투지와 단결력은 반전을 넘어 기적이었다.

▲ 1946년 9월 총파업은 해방 공간을 뜨겁게 달궜다. 한국에서 총파업의 깃발이 다시 오른 건 그로부터 50년 후였다(1946년 상황과는 무관한 자료 사진). ⓒ프레시안(최하얀)

노동자들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9월총파업에 관한 많은 연구는 이 사건을 둘러싼 미군정과 조선공산당의 대결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미군정이 의심한 것처럼 전평과 조선공산당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1946년 들어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자 대미 협조 노선을 걷던 조선공산당은 '신전술'을 채택하고 미군정에 대한 '방어적 공세'를 준비했다. 그중 하나가 9월총파업이었다. 그해 7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평화 협정을 깨고 공산당을 공격해 국공내전이 벌어진 것과 맥을 같이하는 흐름이었다.

많은 연구자들이 또한 조선공산당의 총파업 결정이 조급한 것이었고 결국 실패로 돌아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미군정은 총파업이 일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러고는 총파업이 미군정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며 한국인에게 자치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고 비웃으며 9월 30일 새벽에 경찰과 대한민청 등의 우익 단체를 동원해 용산의 파업 본부를 공격하고 파괴했다. 그리고 전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세가 작았던 우익 노조 대한노총으로 하여금 전평의 요구와 비슷한 요구 조건을 내걸게 해 이를 받아주었다. 미군정의 전략적 목표는 남한 지역의 공산화를 막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9월총파업으로 드러난 '좌익' 노동운동의 뿌리를 뽑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미군정 운수부장의 말대로 "그것은 전쟁이었다."

조선공산당을 비난하는 것이 그들과 의식적으로든 모르는 상태에서든 연계되어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료 부족이든 시각의 한계든 많은 역사책에서 노동자들이 수동적으로 서술되기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아쉽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9월총파업은 조선공산당이나 전평의 계획대로만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군정을 한번 손봐주겠다는 지도부의 의도를 넘어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일제 때부터 투쟁으로 잔뼈가 굵은 공산주의자, 노동운동가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현장의 모순에 그들은 즉각적으로 대처하고 용감하게 싸운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다 그렇지만, 때로 정치 지도자나 지식인은 생각지도 못했던 거대한 일들을 해치우곤 하는 민중의 실체를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로 듣기 어렵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도 세력의 통제를 넘어선 노동자들의 에너지는 10월 1일 대구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확산되었다. 총파업에 참여해 시위를 벌이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하자 이튿날부터 파업은 농민과 소시민을 아우르는 민중 항쟁으로 번졌다. 시위는 인근 경북 지역으로, 남부 지방으로, 남한 전 지역으로 순식간에 퍼져 통계에 따라서는 200만 명을 넘는 대중적인 항쟁으로 발전했다. 그때까지 "갑오동학농민전쟁, 3.1운동과 더불어 한국 근현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민중 항쟁"(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이었다.

대중의 힘, 9월총파업을 되새기는 이유

불행하게도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후 대한민국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빨갱이 사냥'의 제물이 되어 철저히 희생당했다. 미군정은 노동운동을 그들의 입맛에 맞게 순화시키려 했지만, 어떤 분이 "하느님과 밤새도록 씨름한 끝에 드디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낸" 야곱에 비유했다는 이승만은 모든 노동운동을 빨갱이 짓으로 몰아 철저히 탄압했다. 그 후 독재 치하에서 숨도 쉴 수 없었던 대한민국 국민이 자신의 힘으로 들고일어나 나라를 바로잡은 것이 4.19혁명이고 6월항쟁이었다. 그것은 10월항쟁이 그랬던 것처럼 비조직, 무정형의 대중운동이었다. 어떤 이는 이처럼 조직되지 않은 대중의 자발적인 운동이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곤 하는 것이 한국인의 특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한 비조직 대중의 성취에 힘입어 성장하고 마침내 한국 사회의 주역으로 우뚝 선 것이 오늘날의 조직된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50년 만의 총파업 직후 찾아온 IMF 경제 위기 때 그동안의 성과를 내준 뒤 숱한 어려움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방 정국에서 굵직한 경력과 화려한 언변으로 노동자를 선도하던 정치 지도자와 지식인은 오늘날 그들 곁에 없다. 최근 세계의 주요한 경향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를 위한다는 이른바 좌파 운동의 중심이 지식인으로부터 노동자 자신에게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이 문제이랴! 현대 한국의 노동자는 더 이상 사회적 소수가 아니라 경제활동인구의 70퍼센트가 넘는 주축 세력이고, 높은 의식과 많은 경험을 보유한 집단이다. 그들 자신보다 더 그들의 문제를 잘 알고 해결할 수 있는 집단은 없으며,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곧 한국 사회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나는 그들이 일시적 분열과 위축을 넘어 이러한 역사적 소명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는다.

9월총파업이 실패로 돌아간 뒤 한국 사회는 10월항쟁, 4.19혁명, 6월항쟁 등 비조직 대중의 운동이라는 먼 길을 돌아 다시 노동자들을 그 중심에 세웠다. 9월총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나아가려고 했던 길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되새기는 것은 그런 점에서 7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때 알았던 것을 지금도 알고 있다면' 미래는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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