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구멍가게조차 차리기 어렵다. 유통재벌이 골목상권을 싹쓸이했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에만 해도 직장을 잃으면 가게를 차려서 먹고살았다. 이제는 유통재벌 계열의 편의점, 슈퍼마켓이 동네를 점령해버려 구멍가게를 낼 엄두조차 못 낸다. 그 까닭에 실직자들이 밥집, 술집, 빵집, PC방, 노래방, 미장원, 통닭집에 달려들어 전국 어딜 가나 넘쳐난다. 경쟁이 심하니 퇴직금만 날리고 빚더미에 올라앉기 일쑤이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이 유통시장을 개방했다. 외국자본-거대자본이 가격파괴를 앞세워 유통시장에 융단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외국자본은 할인점이란 이름을 붙인 양판장(대량판매장)을 중심으로 시장공략에 나섰다. 거대자본은 양판장과 백화점을 양손에 들고 시장쟁탈전을 폈다.
그 탓에 자본력이 취약한 지방의 토착자본과 중견급 재벌들이 운영하던 백화점들은 모두 퇴출됐다. 이어서 미국의 월마트도 프랑스의 까르푸도 손들고 철수했다. 이제는 롯데와 신세계가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이런 판이니 동네의 재래시장과 구멍가게가 초토화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유통시장이 재편됐다. 유통재벌 계열의 백화점은 세계적 유명상표만 취급하는 최고가품 전문점으로 탈바꿈했다. 대형마트라고 이름을 바꾼 양판장은 생활용품 중심으로 판매전략을 전환했다.
여기에는 식당, 정육점, 쌀가게, 생선가게, 철물점, 문구점, 옷가게, 꽃가게, 빵가게, 미장원 등등에 수선집까지 있다. 자영업자들이 영위하던 모든 영역을 취급하면서 전국의 중소도시까지 침투했다. 양판장 하나가 들어서면 그 일대 자영업자와 재래시장은 몽땅 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매주 일요일 정상 영업"이라고 써 붙인 롯데마트 잠실점(서울 송파구)에 고객들이 들어서고 있다. ⓒ뉴시스 |
유통시장 개방 이전에 19개에 불과하던 양판장이 400개 이상으로 늘어나 포화상태다. 매장 3000평(9900㎡) 규모의 입지를 확보하기도 어렵고 과당경쟁이 심해지자 또다시 판매전략을 바꿨다. 몸집을 줄여 골목 깊숙이 파고들어가는 전략이다. 기업형 슈퍼마켓으로 동네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것이다. 양판장에 앉아서 고객을 기다리지 않고 고객을 찾아 가서 배달까지 해주는 이른바 '슈퍼'슈퍼마켓이 그것이다.
유통재벌들은 아파트 단지와 주상복합건물 저층부를 집중공략하고 있다. 아파트상가 입주상인들이 이제 파탄 날 처지다. 아파트 단지 언저리에는 소형 트럭에 채소, 과일, 생선을 실은 행상들과 좌판을 차린 노점상들이 있다. 그들도 유통재벌의 먹잇감이 되어 삶의 터전을 잃을 판이다. 유통재벌이 동네상권을 침탈함으로써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또 지역경제가 더욱 쇠퇴하고 있다. 유통재벌이 지역에서 번 돈을 서울 본사로 빼내가기 때문이다.
2009년 4월 자영업자가 1년 전에 비해 26만9000명이나 줄었다. 2008년 대형매장 매출액이 2004년에 비해 9조2000억 원 늘어난 반면에 재래시장은 그 사이에 9조3000억 원이나 줄었다. 역대정권에 이어 이명박 정권도 서민경제의 붕괴를 본 척도 않았다. 국회가 더러 유통재벌의 영업행위를 규제하려고 입법화에 나서나 번번이 좌절되었다.
WTO(세계무역기구) 규정에 어긋난다는 경제관료의 주장에 뜻을 굽힌 탓이다. 국내자본을 우대하지 않고 외국자본을 차별하지 않는데 무슨 규정에 어긋나는지 모를 일이다. 외국자본이 철수한 상황에서 국내자본끼리 경쟁하는데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은 핑곗거리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대형매장 허가제와 영업시간 제한을 실시한다. 노는 날과 밤에는 문을 닫는다. 뉴욕 도심에 월마트가, 파리 도심에 까르푸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유통재벌한테 생활기반을 뺏겨 실업자가 늘어나자 요즈음 "동네에서 노는 사람은 다 가게 주인이다."라는 말이 생겼다. 그들의 절망적인 삶을 말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대형마트와 '슈퍼'슈퍼마켓의 영업시간을 매일 오전 0~8시까지 제한하고 매월 두 번째, 네 번째 일요일을 의무휴업일로 정하자 유통재벌의 반발이 드세다. 유통재벌이 자영업자들을 실업대열로 내모는 현실을 외면한 채 소비자의 선택권을 박탈한다는 따위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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