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아빠가 쌍용차에서 해고되었다. 수영이 반엔 아빠가 쌍용차에 다니는 친구가 3명이나 되었다. 쉬는 시간이면 빛의 속도로 매점으로 달려가 함께 떡볶이를 사먹고 좋아하는 노래 파일을 주고 받는 친한 친구들이었다.
아빠는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해고가 부당하다며 공장안에서 77일을 버티며 해고 반대를 외쳤다. 해고가 되지 않은 친구들의 아빠는 이러다 회사가 망한다며 파업을 반대하는 집회를 했고 수영이와 친구들 사이엔 괜히 어색하고 서먹한 시간이 흘렀다. 파업이 길어질수록 집안 분위기는 안 좋아졌고 엄마는 힘들어했다.
어느날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갑자기 '아빠가 쌍용차에 다니는 사람?' 물어보셨다. 다른 친구들도 손을 들지 않기에 수영이도 가만히 있었다. 선생님은 '없어?' 하시더니 느닷없이 '저만 살자고 저렇게 공장안에서 버티는 저 사람들 빨갱이들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헉! 수영이는 가뜩이나 이래저래 걱정스런 나날에 보태지는 선생님 말씀에 고개가 푹 꺽여진다. 아빠한테도 화가 나고 친구들한테도 서운하고 선생님도 미워졌다. 그렇게 수영이는 자기만의 방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아빠는 해고의 억울함을 누를 길 없고 엄마는 갑작스런 경제적 어려움이 버겁다. 쌍용차출신의 낙인은 아빠의 재취업을 어렵게 했으며 어쩌다 운좋게 취업이 되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직장생활이 쉽지가 않아 그만두기가 일쑤였다. 엄마는 그런 아빠 때문에 속이 상하고 화가 났고 부부간 다툼이 잦아졌다. 아이들은 그런 집이 불편하고 싫기만 하다.
이것이 2009년 쌍용차대량해고사태이후 쌍용차 해고자 가정의 모습이다. 이렇게나마 버티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스트레스로 인한 돌연사로 사망을 한 조합원과 가족들이 3년 사이 22명이나 되었다.
# 창환(가명)씨와 세 아들
한 남자가 있다. 눈이 부리부리한 그는 올해 우리 나이 42살로 키도 덩치도 아주 크고 좋은 사내다. 그는 2009년 5월 8일 해고대상자이니 희망퇴직을 하라는 강요와 같은 권유를 관리자들로부터 받게 된다. 그는 7살, 5살, 3살의 어린 아들들과 아내와의 가정을 지키고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의 지침에 따라 파업에 동참하였다.
이 공장에서 쫓겨나면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니, 그 전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15년, 20년을 주야 맞교대 시키는 대로 성실히 일을 하기만 했을 뿐인데 이제 나가라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회사에 대한 서운함과 배신감으로 77일을 공장안에서 버텼다.
사측의 비인도적인 처사로 음식도, 의약품도 심지어 물도, 전기도 끊겨버린 공장 안에서 동료들과 서로 의지하며 견뎌냈다. 하루 24시간 머리 바로 위에선 경찰 헬기가 저공비행과 최루액 투하로 두렵게 만들고, 공장 안에 배치된 전투경찰은 밤새도록 방패로 땅을 때려 해고노동자들의 단 5분의 쪽잠도 방해했지만 이 싸움이 끝나 해고가 철회되면 힘들게 싸웠던 동료들이랑 삼겹살에 소주한잔 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참았다.
그러나 해고만 아니라면 다른 모든 것을 양보하겠다는 노동조합의 요구가 묵살되고 오로지 너희가 나가야만 회사가 산다는 논리 앞에서 기가 막혔다. 10년 20년을 한솥밥 먹으며 일했던 동료들을 앞세워 해고노동자들과 서로 적처럼 전쟁을 하도록 만드는 회사의 모습을 보면서는 정말로 진저리를 쳤다. '대화를 안 할 거면 차라리 다 죽여라', '우리는 정신이 점점 미쳐갑니다' 그때 파업을 하던 쌍용차 노동자들이 담벼락에 써놓았던 절규는 이렇다.
프레시안(손문상) |
그렇게 옥상 위로 대 테러전을 전담하는 경찰특공대가 용산의 남일당에서 그랬듯이 컨테이너를 내리고 진압을 위해 들어왔다. 용역과 사측 구사대는 무지막지한 볼트새총을 경찰엄호용으로 해고노동자들에게 쏘아댔고 하늘에선 최루액을 가득 실은 헬기가 최루폭탄을 떨어뜨리고 건물 밑에선 최루물 대포가 쏘아졌다.
순간적으로 2만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테이저건이 달랑 여름 작업복 하나를 입고 살기 위해 옥상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노동자들의 얼굴에 발사되었고, 옥상으로 무사히 안착한 경찰특공대에 의해 조합원들은 의식을 잃을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쌍용차공장 옥상이 보이는 건너편 아파트 옥상에서 망원경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가족들은 남편과 아빠가 그렇게 맞는 것을 보고 주저앉았다. 그것은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 진입이 코앞이었던 2009년이라는 시절이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그렇게 끔찍하고 지독했던 그 날! 아들 삼형제의 아빠도 경찰특공대에게 두들겨 맞고 유치장으로 끌려간다. 평조합원이기 때문에 바로 경찰서에서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현행범으로 재판을 받으며 구치소에서 3개월의 구속 생활을 하게 된다. 그가 구속되어 있던 시간동안 가정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아내와는 헤어지게 되고, 어린 삼형제는 나이 드신 어머니가 돌보셨다.
출소 후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인생이 엉망이 되었다는 생각만 들고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할지 모르겠으니 답답하고 속이 상해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그 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 쉽게 고치기 어려운 커다란 마음의 병이 되었다. 그렇게 정신과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사이 어머니와 형제들은 지쳐갔고 아이들은 누구의 보살핌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은 점점 어른들 눈치를 보며 컴퓨터 게임만 하는 아이들로 자라고 있었다.
# 이들에게 너무나 늦게, 아니 그나마 빠르게 찾아온 이들
쌍용차해고자들과 가족들은 중환자실에 입원한 환자와 같다. 긴급하게 심리적 치료와 정서적,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와락센터>는 그래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명씩 자살이 연쇄적으로 반복되던 2011년 봄.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선생님이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 며 조합원들과 가족들을 찾아 왔다. 그 첫날부터 바로 집단 상담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수많은 자원활동가들이 주말마다 나타났다. 해고노동자 가족을 위한 유쾌한 프로젝트는 그렇게 출발했다.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적절한 지원과 심리서비스를 제공하고 그렇게 존중받은 이가 또 다른 동료를 존중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치유자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 이름이 바로 와락이다.
요즘 와락에선 주말마다 오전, 오후 해고자와 가족을 위한 집단 상담이 진행되고 집단 상담이 어려우신 분들은 개인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청소년 아이들을 위해 청소년 개인 상담과 멘토 활동도 연계된다. 이 모든 것들이 정신과 전문의나 전문 상담가들의 재능 기부로 운영된다.
주말마다 시골마을 잔치처럼 왁자지껄 60~70명이 함께 먹는 치유 밥상을 준비한다. 수많은 자원활동가들이 함께 준비해주는 정성껏 차려진 음식을 나누는 일은 공중 분해된 이들의 일상성 회복을 위해 매우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2000여 권의 책이 있는 도서관에서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고 뛰어놀고 수박을 먹는다. 초등생 아이들은 정서적 안정과 자존감 향상을 위해 다양한 종류의 악기를 배우고 평소 접하기 어려운 현장체험 학습도 다닌다.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은 전문놀이 치료사의 도움으로 안정적으로 놀이치료를 받는다.
해고자들이 처해있는 다양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지원을 하기도 한다. '당신을 기억한다. 당신을 지지한다. 당신은 옳다.' 는 진심어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얼마 안 되지만 아이들 학용품에서부터 김장김치, 과일, 장갑, 양말 등등 와락으로 모여지는 마음과 정성을 나눈다. 세상이 당신을 응원하는 것을 보라고.
흙바닥위에 나무막대기로 꼬물꼬물 와락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나서 이걸 이 위에 짓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무수히 의심했지만 결국 해고의 잔인함을 깊이 나의 문제로 함께 여겨준 많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와락이 가능했다.
# 그 후 수영이와 창환 씨 이야기
와락을 만들고 난 후 수영이는 와락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정재승 선생님의 과학콘서트에 친구들과 함께 찾아왔다. '인간의 뇌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라는 재밌고 의미있는 강연을 듣고 한 업체에서 후원해주신 PMP도 선물 받고 맛있는 간식도 먹으며 다시 예전처럼 재잘거리며 집으로 갔다. 매번 수영이가 이 공간을 찾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한번 인연 맺어졌기에 언제든 힘들 때 와락을 찾을 거라 생각한다.
창환씨도 와락이 생긴 후 와락에서 제공하는 상담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이제는 10살, 8살, 6살이 된 아이들도 와락 체험프로그램에 보낸다. 작은 아이가 자기 형이랑 와락에서 신나게 놀다가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했다.
"형아, 형아, 여기는 진짜 천국같다."
이 아이들에게 천국처럼 생각되는 이런 공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아직 많은 해고자들과 가족들이 와락을 제 집처럼 편안하게 찾아오지 못하지만 불이 났을 때 119에 전화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 그들이 와락을 찾을 수 있도록 더 많이 노력해 나갈 것이다.
쌍용차 해고자들뿐 아니라 이 땅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때인 거 같다. 힘들고 괴롭고 우울한 사람이 넘쳐나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쌍용차해고자들을 위해 마음과 마음을 포개 와락을 만들었던 것처럼 이제 와락이 또 다른 사회적 약자들과 어려운 이들을 위해 마음과 기도를 다 할 것이다. 우리가 힘겨울 때, 누군가 내밀어 준 그 손이 얼마나 따뜻하고 든든했는지 우리가 잘 알기에.
아직 남편들의 쌍용차 복직 문제는 어두운 미로 속처럼 아무런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사랑받고 존중받았던 그 경험으로 다른 이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귀히 여기며 배려할 때 우리가 모두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에 많이 지치지는 않을 것이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나와 내 소중한 가족과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힘들고 지친 이웃 모두를 '와락' 안아주자.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란 말인가?
ⓒ쌍용자동차 범대위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