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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톤 강판에 깔려 장 파열, 그래도 구급차 못 부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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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5톤 강판에 깔려 장 파열, 그래도 구급차 못 부른 이유"

[현장] 조선소 산업재해, 왜 하청 노동자에게만 집중되나

울산시 남구에 있는 울산병원 가는 길. 지난달 30일 세진중공업 대형 선박 블록에서 발생한 화재로 사망한 현욱일(37) 씨 시신이 안치돼 있다. 사망한 지 7일이 지났지만, 그의 시신은 아직 차가운 영안실에 있다.

길을 알려준다며 함께 병원으로 가던 세진중공업 하청 노동자 김인식(가명·50) 씨는 "현장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는 늘 위험에 노출돼 있다"며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사고 속에서 오늘도 다치지 않고 일한 것에 감사하며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 씨의 죽음은 자신의 미래 모습일지 모른다고도 했다.

그래도 일이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산단다. 김 씨는 새해 들어 딱 하루 일했다. 일하고 싶어도 '오야지'가 일감을 주지 않아 발만 동동거리고 있다. 20년을 넘게 조선소 하청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위험하다는 거야 늘 알고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다. 대학을 다니는 자식이 두 명이나 된다.

"우리가 바라는 건 딱 하나입니다"

7일 오후 3시께 현욱일 씨 유가족을 만났다. 함께 왔던 김인식 씨는 같이 만나지 못했다. 회사에서 보낸 사람이 영안실을 찾는 하청 노동자를 체크하고 있다고 했다. 회사에 찍히면 생계가 곤란해진다.

현욱일 씨의 이름이 적힌 영안실 입구 전광판에는 발인 날짜가 없었다. 현 씨와 함께 사고를 당한 3명의 하청 노동자 유가족은 회사와 합의를 마쳤다. 오롯이 현욱일 씨만 남았다. 왜 현욱일 씨만 회사와 합의를 하지 못했을까.
▲ 현욱일 씨 시신이 안치된 울산병원 장례식장. ⓒ프레시안(허환주)

현욱일 씨 여동생 인영(가명) 씨는 "우리가 바라는 건 오빠 영정에 세진중공업 관계자가 와서 사과의 말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영 씨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유가족에게도 세진중공업은 아무런 사과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며 "버티기 힘들어 다른 유가족은 사과를 받지 않고 그냥 장례식을 치렀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밝혔다.

현 씨와 계약관계에 있는 회사는 명성테크. 명성테크는 세진중공업에서 만든 조선 블록을 용접하는 일을 한다. 하청업체다. 세진중공업은 이번에 발생한 사고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이유다.

장례식장 복도 좌우를 빼곡히 채운 화환 중에는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 송영길 인천시장 등 정치인 화환을 비롯해 사망한 노동자 회사인 명성테크와 아주테크 화환도 보였다. 하지만 세진중공업 화환은 없었다.

김 씨는 "하청에 있는 소장과 직원들이 어제도 찾아와 조문을 했다"며 "이들은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사죄했지만 사실 이들이 무슨 죄가 있나 싶다"고 말했다. 김 씨는 "우리 오빠가 아니라 이들이 현장에 있었다면 똑같이 죽었을 것"이라며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세진중공업도 알고 있지만 계약상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만 한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김 씨는 "세진중공업에서 사죄를 하지 않는 이상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며 "최소한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췄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닦았다. 현 씨의 시신이 아직 땅에 묻히지 못한 이유다. 현 씨의 초등학교 4학년과 7살 아이는 아직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외할머니 집에서 아버지가 선물을 사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원청의 공정기일 압박이 사고를 일으켰다"

경찰과 소방당국 발표를 보면 지난달 30일 오전 8시50분께 울산시 울주군 온산읍 원산리 세진중공업에서 대형 선박 블록 제조 작업 도중에 폭발사고가 발생해 김영도(52), 유동훈(32), 현욱일(37), 유지훈(27)씨 등 사내 하청업체 노동자 4명이 숨졌다.

이날 폭발사고로 일어난 화재는 30여분 만에 진화됐다. 밀폐된 공간에서 여러 명이 작업했고 전날 용접작업이 끝난 뒤 세진중공업 안전팀이 점검해야 했지만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화재 원인을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원청의 관리부재로 전날 남아 있던 가스가 이날 그라인딩 작업(블록 면을 기계로 가는 작업)과 동시에 불꽃과 결합, 폭발을 일으켰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조선소에서는 이런 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사고는 블록 안에서 그라인더 작업과 용접 작업을 진행하다 발생했다. 하지만 정작 사고현장에는 페인트통, 붓과 호스, 유압펌프 등이 흩어져 있었다. 주목할 점은 붓은 도장(블록에 페인트를 칠하는 작업)을 마친 뒤, 미처 칠하지 못한 구석부분을 페인트로 마무리하는 데 쓰인다는 점이다. 사실상 최종 마무리 작업이라고 보면 된다.
▲ 용접을 하고 있는 조선소 하청 노동자. ⓒ조선하청노동자연대

하지만 정작 사고는 그라인드, 즉 도장 공정 전에 진행하는 블록 깎는 작업을 하다 발생했다. 이는 여러 작업을 블록 안에서 동시에 진행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도장작업이 선행됐다면 현장에 시너 등 인화성물질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폭발에 이은 화재로 연결돼, 사망확률이 더 높아졌을 것으로 조선업 관계자들은 분석한다.

현미향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사무국장은 "원청에서 정한 공정 기일을 지키려 혼재작업, 즉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시킨 걸로 추측된다"며 "무리한 혼재작업이 결국 이런 사고를 빚어냈다"고 주장했다.

실제 정해진 공정 기일을 맞추기 위해 애쓴 흔적이 곳곳에 있다. 피해자들은 사고 전날 밤 11시까지 작업을 한 뒤, 사고 당일 아침 8시에 또다시 일을 해야 했다. 유족에 따르면 현욱일 씨는 몸살 기운 때문에 쉬고 싶다고 했지만 현장관리자는 무조건 나와야 한다고 반강제적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다. 고인은 죽기 일주일 전부터 쉼 없이 일을 해야만 했다.

더구나 사고 발생 이후 울산고용노동지청은 사고가 난 블록의 작업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세진중공업은 "1월 3일까지 배가 나가야 하니 작업 중지를 풀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만큼 공정 기일 압박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혼재작업이 진행됐다면 원청 책임은 더욱 커진다. 혼재작업 관리를 하청업체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동일한 장소에서 원,하청이 작업을 할 때 산업재해예방의 의무는 원청 사업주에게 있다. 또 현실적으로도 세진중공업 안에 30여 개 하청업체가 공정별 또는 혼재된 상태에서 작업할 때, 기본적인 안전조치와 업무지시는 원청 사업주가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선실 내 배기시설 설치나 통풍 환기조치 등도 원청에서 관리할 수밖에 없다. 하청업체가 할 수 있는 건 잔류가스 점검, 산소측정, 작업 후 뒷정리 등이다. 그나마도 작업 공정 기일이 급하면 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세진중공업이 안전보건시스템 인증(KOSHA 18001)을 받는 모범 기업이라도 지속적으로 안전관리를 하지 않으면 대형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 지난 30일 화재 사고가 발생한 블록. ⓒ연합뉴스

일하다 다쳐도 산재 인정은 꿈도 못 꿔

조선하청노동자연대에 따르면 조선소에서 발생하는 사고의 90% 이상은 하청 노동자에게 일어난다. 중공업 현장에서 일하는 3만 명의 노동자 중 정규직의 숫자가 1만 명이지만 사고는 비정규직, 즉 하청 노동자에게만 일어나는 셈.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관계자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현장에서도 쉬운 일, 편한 일을 한다"며 "어렵고, 위험한 도장 작업이나 용접 작업 등은 모두 하청 노동자의 몫"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정규직이야 고용이 보장됐고, 노조도 있으니 회사에서도 이들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며 "하지만 비정규직은 언제든 해고할 수 있을 뿐더러, 여차하면 하청업체와 계약해지를 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라고 말했다.

일하다 다쳐도 산재 신청은 꿈도 못 꾼다. 산재를 신청하면 원청에서 곧바로 해당 하청업체와 계약을 해지하기 때문이다. 사내하청 관계자는 "얼마 전에는 공장 내에서 일하던 하청 노동자 한 명이 15톤짜리 강판에 깔려 골반이 부러지고 장이 파열됐다"며 "하지만 업체 관리자는 구급차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현대중공업에서 사고가 난 걸 알게 되면 하청 업체와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다친 노동자는 트럭 짐칸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다. 혹시 문제가 될까 우려한 업체 관리자는 다친 노동자를 담요로 덮는 주도면밀한 모습까지 보였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업체 관리자는 병원에 와서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하라"고 협박까지 했다. 상황이 이러니 산재 인정은 엄두도 못 낸다. 사내하청 관계자는 "이런 일은 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부산지방고용노동청은 13일 세진중공업 특별안전감독을 진행한다. 이를 통해 세진중공업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사고는 비단 세진중공업의 문제만이 아닌 한국 조선업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지난 11월 4일에는 현대미포조선 장생포공장에서 하청노동자 1명이 추락해 사망했다. 12월 16일에는 삼호중공업 하청노동자 1명이 역시 추락해 사망했다. 알려지지 않은 죽음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더욱 많아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선소 하청 노동자는 일하다 소리 소문없이 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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