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새벽 노동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강행 처리된 유급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한도가 그것이다. 통과된 상한선에 따르면 조합원이 4만 명이 넘는 현대차의 경우 현재 200명이 넘는 노조 전임자 숫자는 고작 18명으로 줄어든다.
이에 양대 노총은 120주년 세계 노동절을 맞아 각각 준비한 마라톤대회와 범국민대회를 열고 "표결 처리된 타임오프 한도는 원천무효"라고 주장했다. 한국노총을 포함해 노동계의 경고는 자못 비장했으나, 이미 통과된 한도를 되돌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최종 결정된 타임오프 한도를 놓고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한 선전포고"라며 강력 반발한 양대 노총의 다음 행보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한국노총(위원장 장석춘)은 한도 결정에 아무런 권한이 없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향해 '촉구'했고, "실질적인 총파업 태세 준비"를 언급한 민주노총(위원장 김영훈)의 투쟁 지침은 4월 30일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120주년 노동절을 맞아 한국노총이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노동절 마라톤대회를 열었다. ⓒ프레시안(여정민) |
▲ 민주노총이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문화공원에서 2만 여 명이 모인 가운데(경찰 추산 5000명) 노동절 기념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프레시안(여정민) |
노동조합 활동만을 하면서 회사로부터 임금을 받는 노조 전임자의 상한을 논의하던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는 이날 새벽 무기명 비밀투표를 거쳐 타임오프 한도를 결정했다. 표결 처리를 막으려는 양대 노총과 노동부 관계자들의 격렬한 몸싸움으로 회의장에는 경찰병력이 투입되기도 했다.
양대 노총의 말을 종합하면, 통과된 타임오프 한도는 조합원 숫자에 따라 연간 1000시간에서 3만6000시간까지 부여된다. 사람 수로 보면 0.5명에서 18명까지다. 기준은 단지 조합원 수로 결정됐다. 논의 과정에서 거론됐던 전국에 걸친 사업장에 대한 가중치도 최종 통과된 안에서는 배제됐다.
구체적으로 보면, 조합원 50명 미만은 최대 1000시간 이내, 50~99명은 2000시간, 100~199명은 3000시간, 200~299명은 4000시간, 300~499명은 5000시간, 500~999명은 6000시간 이내로 사용할 수 있다. 또 조합원 1000~2999명 노조에는 최대 1만 시간(전임자 5명), 3000~4999명 노조는 최대 1만4000시간(7명)을 노조 활동에 사용할 수 있고, 5000~9999명 노조는 2만2000시간(11명), 1만~1만4999명 노조는 최대 2만8000시간(14명)을 쓸 수 있다.
조합원이 1만5000명이 넘는 경우 2012년 6월 30일까지는 조합원 3000명 마다 2000시간씩 추가할 수 있고 같은 해 7월 1일부터는 최대 3만6000시간으로 제한된다.
▲ 노동절 새벽 노동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노조 전임자 유급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한도가 강행 처리 됐다.ⓒ프레시안(여정민) |
전체적으로 규모가 큰 노조일수록 현재 전임자보다 감소폭이 크다. 이렇게 될 경우 당장 230여 명의 전임자가 있는 현대차는 2012년 7월부터 18명으로 전임자를 줄여야한다. 현재의 80%를 줄이는 셈이다. 조합원 1만 명 이상인 기아차와 GM대우차도 마찬가지다.
금융노조도 현재 전임자에서 절반으로 뚝 깎이게 됐다. 9만6500여 명의 조합원을 가진 금융노조의 총 전임자는 현재 295명이나, 대형 시중은행의 전임자가 급격하게 감소하게 돼 162명만 남게 된다. 평균 감축율이 45%이다. 특히 KB국민은행, 우리은행, 농협 등은 감소폭이 60%나 된다.
현재 57명의 전임자를 두고 있는 체신노조(조합원 2만6000명)도 당장 전임자를 18명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역시 2만6000명 조합원에 64명의 전임자가 있는 철도노조도 마찬가지다.
"타임오프 강행처리, 1600만 노동자에 대한 선전포고"
양대 노총은 이날 미리 계획했던 노동절 행사에서 "이는 명백히 노동조합을 제약하고 무력화시키기 위한 시도"라고 강력 반발했다.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은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10 노동절 기념 마라톤대회'에서 "통과된 타임오프 한도를 원천무효화하지 않을 경우 1600만 노동자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도발로 간주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전면적인 투쟁과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장 위원장은 마라톤대회에 참석한 제 정당의 국회의원들을 향해서도 "소속된 당을 떠나 날치기 통과된 타임오프 한도를 제 자리로 돌리기 위해 애써 달라"며 "그렇지 않으면 5월 내내 강력한 투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이 마라톤 대회에 앞서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왼 쪽은 임태희 노동부 장관. ⓒ프레시안(여정민) |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도 서울 여의도 문화공원에서 열린 '범국민대회'에서 "걸핏하면 '국격' 운운하는 이명박 정부가 세계 노동절날 국제적 망신을 자초했다"며 "모든 것을 다 걸고 싸우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급단체보다는 오는 7월 1일부터 당장 전임자 숫자를 줄어야 할 판인 현장이 더 들썩이고 있다. 금융노조 관계자는 "통과된 한도대로라면 피해가 막심하다"며 "한국노총이 총파업으로 맞서거나 최소한 정책연대라도 파기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국회의 관심은 오로지 '지방선거' 뿐
노동계는 4월 30일이라는 근면위의 법정 활동 시한을 넘겨 표결이 진행된 만큼 '원천 무효'라는 입장이다. 반면 노동부는 "노조법과 시행령은 타임오프 면제 한도를 결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 만큼 4월 30일이 넘어 의결을 하더라도 법적 효력이 있다"고 맞서고 있다.
문제는 노동계 주장대로 설사 '무효'가 된다 치더라도 노동조합에 더 유리하게 한도가 결정될 가능성은 없다는 데 있다. 4월 30일까지 근면위가 한도를 결정하지 못할 경우 "국회의 의견을 들어 공익위원이 결정"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노총이 국회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국회의 의견을 들어"라는 문구 때문이지만, 국회는 의견을 낼 뿐 결정권한이 공익위원에게 있음은 분명하다. 마라톤대회에 참석한 국회의원들이 장석춘 위원장의 강도 높은 발언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오직 정세균 민주당 대표만이 "타임오프 한도는 5월 국회에서 조합원과 국민의 뜻이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입법부가 나서야 한다고 본다"고 화답했을 뿐이다. 하지만 정작 법에 따라 근면위에 의견을 낼 수 있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추미애 위원장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의 범국민대회에 참석한 야4당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정세균 대표와 이재정 국민참여당 대표는 물론이고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의 강기갑 대표, 진보신당의 노회찬 대표 가운데 누구도 전날 결정된 '타임오프 한도'에 대해 책임 있는 말을 내놓지 않았다. 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6월 지방선거에 있었을 뿐이었다.
▲이날 결정된 '타임오프 한도'에 대해 '날치기 폭거'로 규정한 노동계는 국회에 마지막 희망을 거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날 노동절 행사에 참여한 국회의원들의 관심은 오직 지방선거 뿐이었다. 사진은 한국노총 마라톤대회 참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모습. ⓒ프레시안(여정민) |
스스로의 힘으로 되돌리는 것도 힘에 겹다. 지난달 28일 총파업을 예고했다가 천안함 사태를 이유로 연기한 바 있는 민주노총도 당장 뾰족한 수가 없다. 최대 동력인 금속노조는 당초 오는 14일 근면위의 일정에 맞춰 총파업을 고민 중이었으나 타임오프 한도가 이미 통과됨에 따라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앉아서 당하느니 싸우다 죽겠다"는 김영훈 위원장도 "각 조직은 임단협을 당겨 총파업 준비 태세를 갖추자"는 말만 되풀이했다.
전체 조직을 평균 내 보면 현재보다 70% 정도 전임자가 줄어들게 된다는 한국노총도 마찬가지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던 한국노총이지만, 이날 나온 성명에는 "현 정부와의 정책연대 파기도 검토"라는 원론적인 말조차 들어 있지 않았다.
생일날 새벽 최악의 선물을 받아 든 노동계는 3일부터 각각 긴급 대표자회의 등을 열고 이후 대응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지만, 관련법이 시행되는 7월 1일 전에 시계를 거꾸로 되돌릴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 이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