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싸움은 행정력을 갖고 있는 정부가 먼저 싸움을 걸고, 조직력을 갖고 있는 전공노가 버티는 모습으로 진행 중이다. 싸움은 중앙에서도 전개되지만, 보다 격렬한 싸움은 일선 지방자치단체와 전공노의 지역지부 간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달 초 전공노, 민주노총,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주노동당 등은 '진상조사단'을 꾸렸다. 공무원노조법 시행 이후 일선 지자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역 지부와 지자체 간의 기싸움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당노동행위 등 지자체의 탈법행위의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진상조사단은 지난 14일 대구 북구청에 이어 20일 전남 완도군, 21일에는 강원 원주시를 잇따라 방문했다. <프레시안>은 이 중 행정자치부의 방침을 가장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원주시에 대한 진상조사단의 방문을 동행 취재했다.
민노당 등 진상조사단, 원주시 진상조사
맹주천 민변 변호사, 박재홍 노노모(노동인권실천을 위한 노무사모임) 소속 노무사 등 5명으로 구성된 진상조사단은 21일 오후 12시 20분경 김기열 원주시장, 원민식 자치행정국장 등 원주시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영순 민노당 의원도 이날 면담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국회 일정 등으로 불참했다.
김기열 원주시장은 진상조사단의 방문에 대해 다소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김 시장은 "원주시가 마치 공무원노조를 탄압하는 데 맨 앞에 있는 것처럼 비춰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며 에둘러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김 시장은 진상조사단의 질문에는 성실히 답변했다.
면담은 1시간 여동안 진행됐다. 이날 진상조사는 원주시가 행자부의 지침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부당노동행위 혹은 인권침해적 행동을 하지 않았느냐가 초점이 됐다.
원주시는 지난 3월 23일 행자부가 '합법노조 전환(노조탈퇴) 지침'을 시달하자 전국에서 가장 먼저 '불법단체 가입 직원 자진탈퇴 직무명령'을 시달했다. 이 직무명령은 중앙의 지침을 지역에서 현실화시키는 조처로, 직무명령을 거부하는 공무원은 신분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대다수 지자체는 행자부 지침을 단순 전달하는 수준에 그쳤다.
김 시장은 "지자체 장으로서 중앙의 지침을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 없다는 사정을 이해해 달라"며 "직무명령을 통해 공무원 노조를 탄압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원주시장 직무명령 시달, "자진탈퇴서 부서장이 취합해 가져오라"
그러나 김기열 시장의 해명과 달리 '직무명령'에는 단순한 전달 이상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지난달 27일 공표된 '직무명령'에는 이를 거부할 경우 △신분상 불이익 조치를 취하고 △각 부서장이 노조 자진탈퇴 서류를 취합해 4월 5일까지 제출하도록 강제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맹주천 변호사는 "각 부서장이 노조원을 상대로 자진탈퇴원을 제출토록 하고 각 부서장이 자진탈퇴원을 취합하도록 한 행위는 사용자의 노조활동에 대한 지배·개입 행위로 볼 수 있다"며 "이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노조법)' 상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직무명령은 시달 직후부터 노조의 거센 반발을 샀다. 전공노 원주시 지부(지부장 이규삼)는 지난달 30일 시장 면담 요구가 거부되자 연좌농성에 돌입했고, 그 다음날부터 철야농성을 시작해 8일 동안 계속했다. 결국 지난 11일에 시장 면담이 이뤄졌고, 최근 시장과 지부 간에 직무명령에 대한 구두 합의가 이뤄졌다.
원주시와 원주시 지부에 따르면, 지난 20일 시장과 지부 간 구두합의로 각 부서장이 취합한 노조 자진탈퇴서는 조합원들에게 반환하고, 시장은 노조에 대한 지배·개입 행위를 중단하기로 했다.
김기열 시장은 "직무명령의 후속조치는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일선 실무자들이 행자부 지침을 준수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앞으로 나간 점이 있었다"며 행정처리 과정에서 과실이 있었음을 진상조사단 앞에서 확인했다.
전공노 원주시 지부 조합원 수 증감 지난 2004년 총파업 전까지만 해도 원주시 지부의 조합원은 1111명이었다. 전체 직원 1200명 중 거의 대부분이 노조에 가입했던 셈이다. 하지만 파업 이후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 395명(파면 및 해임 20명, 정직 191명 등)에게 중징계가 떨어지고 그간 노조와 시 간 단체협상으로 이뤄지던 조합비 원천 징수가 금지되면서 조합원은 200명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원주시 지부가 대량 징계에 항의하며 4개월 간 천막농성 및 1인시위를 벌인 끝에 지난해 7월 △노조 사무실 보장 △단협이행△징계 소청 및 소송에 대한 협력 등을 골자로 한 합의문에 지부와 시가 공동 서명하면서 조합원은 860명으로 급증 했다. 지난 1월 있었던 전공노 위원장 선거에는 797명의 조합원이 참여하는 등 조직력이 거의 회복됐다. 그러나 지난달 27일 김기열 시장이 행자부의 '합법노조 전환(노조탈퇴) 지침'에 따라 "자진탈퇴를 거부한 직원에 대해 신분상 불이익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의 '직무명령'을 내리면서 조합원 700명이 일거에 탈퇴했다. 20일 현재 조합원은 200명 안팎으로 추산되고 있다. 원주시 지부의 한 관계자는 "최근 직무명령에 대한 시와 지부 간 합의 이후 또다시 조합원이 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원주시 지부의 조합원 증감 추이를 살펴보면 전공노 소속 조합원들은 정부의 태도와 노조의 대응 수위에 따라 조합 탈퇴 및 재가입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정부의 압박이 약해지는 시점에 노조 재가입이 급증한다는 점에서 전공노에 대한 현장 공무원들의 지지는 정부의 압박과 무관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조합원 "웬만하면 노조 행사 안 가려 한다"
시장과 노조와의 합의, 진상조사단과의 면담 과정에서 '직무명령'을 둘러싼 노·사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했다. 무엇보다 김 시장이 '직무명령' 이후의 후속조치는 없을 것이라고 확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원주시에서 일하고 있는 공무원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난 2004년 전공노의 총파업으로 중징계를 받은 공무원이 가장 많았던 곳이 바로 원주시다. 대부분 소청심사을 통해 복직을 했거나 징계 수위가 경감됐긴 하지만 여전히 5명은 복직되지 못했다. 당연히 전공노에서는 원주시를 '공무원 노조 탄압 일번지'라고 지목하고 있다. 원주시 지부 조합원들은 이런 분위기 탓으로 잔뜩 얼어붙어 있었다.
김기열 시장의 양해를 얻어 진상조사단은 이날 오후 원주지부 조합원을 만날 수 있었다. 일단 인터뷰에 응한 조합원들은 '익명처리'를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자신의 소속과 이름이 공개될 경우 징계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운 털이 박히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인식하는 듯했다. 김 시장의 호언과 달리 원주시에서 근무하고 있는 조합원들 상당수가 어떤 심리상태에 놓여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총파업 당시 열혈 조합원이었다는 한 공무원은 "이제는 웬만하면 노조가 하는 행사에는 안 가게 된다"며 "다들 안 가니까 가고 싶어도 괜히 눈치보인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는 "총파업으로 395명이나 징계를 받고 그 뒤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노조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며 "이제는 김기열 시장이 문제성 있는 발언을 해도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시장의 '직무명령'에 따라 노조 자진탈퇴서를 냈다는 또다른 조합원은 "부서장이 탈퇴서를 들고 오라는데 거부하기 힘들었다"며 "구체적인 강요행위는 없었지만, 다들 자진탈퇴서를 내는 분위기에서 나 혼자만 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노조가 직무명령에 강하게 반발하기는 했지만, 현장 분위기도 함께 뜨지 못했다"며 "2004년 총파업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덧붙였다.
원주시 지부 "노조 선거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
달라진 노조 분위기에 대해 가장 민감해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노조를 이끌고 있는 노조 간부들이었다. 현장 동력이 위축된 상황에서 노조의 사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하기 어렵다는 걱정은 차라리 부차적이었다. 노조 간부들은 노조 존립 자체에도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규삼 원주시 지부장은 "6월이면 노조 임원 임기가 마무리된다"며 "벌써 임원 선거 등을 준비해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선거 자체를 무난히 치를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단 노조는 5.31 지방선거까지는 원주시의 직접적인 노조압박 행위는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김기열 시장이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고 지방선거에 출마할 예정인 상황에서 선거에 영향을 줄 만큼 노조를 탄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지방선거 이후 원주시가 어떤 방식으로 노조를 압박해 올 지에 대해 노조 간부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노조의 한 관계자는 "일단 시장은 부인하고 있지만, 시 측에서 조합원 일부를 회유해 별도의 노조를 만들 수도 있다"며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주시의 노조 탄압 의혹 원주시는 전공노에게 '노조 탄압 일번지'로 지목되고 있다. 지난 2004년 총파업 이후 가장 많은 중징계자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행정자치부의 지침에 가장 충실하게 원주시가 따르면서 원주시 지부와 극심한 충돌을 반복 재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원주시는 원주시 지부와 합의를 통해 총파업에 따른 노사갈등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지난 1월 '공무원노조법'이 시행 된 이후 또다시 시와 지부 간 갈등양상이 재연되고 있다. 일단 지난 2월 초 전공노의 위원장 선거 및 전공노의 민주노총 가입 관련 총투표 과정에서 김기열 시장은 각 부서장을 통해 투표소 설치를 불허하고, 조합원들의 투표를 못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같은 시기 공무원노조법상 노조가입 대상이 아닌 공무원을 상대로 노조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 작성을 지시하고, 노조에 가입한 가입금지 대상 조합원에게 노조 탈퇴를 종용했다. 또한 2회에 걸쳐 원주시 지부 사무실 폐쇄를 요구하기도 했다. 노조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온 것은 김기열 시장이 지난 2월 13일경 노조 조합비 수령을 막기 위해 통장 자동이체를 금지하고, 자동이체 해지 확인서를 각 부서장에게 제출하라고 지시한 일이다. 노조는 조합비 이체뿐만 아니라 공과금 납입, 대출금 상환 등 개인정보가 들어있는 자동이체 해지 확인서를 내도록 한 것은 인권탄압 행위라고 주장하며 반발했지만, 대다수 조합원들은 통장 자동이체를 해지했다. 여기에 지난달 23일 행자부가 '합법노조 전환(노조탈퇴) 지침'을 시달하자 김기열 시장은 지난달 27일 '불법단체 가입직원 자진탈퇴 직무명령'을 전국 최초로 시달해 자진탈퇴원을 각 부서장이 취합토록 하고, 자진탈퇴원을 내지 않은 조합원에게는 신분상 불이익 조치를 내리겠다고 노조를 압박했다. 맹주천 민변 변호사는 "원주시는 행자부 지시에 따라 가장 발빠르게 노조 탄압에 나섰다"며 "노조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마련된 시의 지침 중에는 부당노동행위적 요소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
강요된 무기력, 또다른 불씨 남기나
원주시 지부 조합원들은 '무기력'해 보였지만, 동시에 정부나 원주시에 대한 불만도 가득차 있었다. 노조 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신분상 불이익 등 정부와 원주시의 압박 때문이기 때문이다. 강요된 무기력이 조합원들 마음 깊은 곳에서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불만으로 누적되고 있는 것이다.
10여 년 동안 공직생활을 하고 있다는 한 조합원은 "우리가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요구를 내걸고 노조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정부가 너무 심하게 공무원들을 내몰고 있다"며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정부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는 것 만큼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으로서 합법적 법 테두리 안에서 노조활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공무원노조법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전혀 검토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