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경기 불황이 수출입 물동량에 영향을 미쳐 해운시황이 급락하면서 조선업도 직격탄을 맞았다. 세계 3위의 프랑스 해운회사 CMA-CGM은 지난해 모라토리엄(채무상황유예)을 선언했다. 한진중공업이 CMA-CGM으로부터 수주 받은 대형 컨테이너 선박계약은 지난 21일 해지됐다.
일감이 줄어들고 있었다. 현재 만들고 있는 배들도 해운회사들이 인도 날짜를 미루고 있다. 바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진중공업은 전체 직원의 30%, 1000여 명의 구조조정을 추진 중이다. 정규직까지 자르겠다는 마당이니, 하청 노동자의 일감도 당연히 없다. 자신의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은 영도조선소에 이상한 적막이 맴도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지난 21일 찾은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에서 만난 노동자들은 불투명한 미래에 떨고 있었다.ⓒ프레시안 여정민 기자 |
"14년 만에 복직했더니 7년 만에 또 정리해고?"
▲이미 지난해 연말까지 희망퇴직을 통해 생산직만 80명, 전체 340명이 공장을 떠났다. 현재 노사 교섭이 진행 중이라지만, '잘 될지' 의구심은 여전하다.ⓒ프레시안 여정민 기자 |
일감이 없는 것은 정규직보다 하청 노동자들이 더 잘 안다. 월급봉투가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 현대중공업에서 32년을 일하고 정년퇴직한 뒤 같은 공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김지훈(70, 가명) 씨는 "잔업, 특근 다 해서 월 250만 원 정도 벌었는데 지금은 140만 원도 못 받는다"고 했다. 그나마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도 알 수가 없다.
정규직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이미 지난해 연말까지 희망퇴직을 통해 생산직만 80명, 전체 340명이 공장을 떠났다. 현재 노사 교섭이 진행 중이라지만, '잘 될지' 의구심은 여전하다.
알루미늄 용접이라는 조선소 안에서도 특수 기술로 꼽히는 일종의 '전문직'인 이진수(53, 가명) 씨는 "어머니가 답답하다고 한다"며 자신의 억울함을 우회적으로 토로했다. 이 씨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이미 지난 1990년 해고됐었다. 14년 만인 2003년 찾아온 복직, 그로부터 불과 7년도 못 돼 또 찾아온 해고의 위기다.
이 씨는 "아마 나는 명단에 들어갈 것 같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팔이 아파서 월차를 많이 썼다"는 답이 돌아왔다. 단체협약에 엄연하게 보장된 월차를 '아파서' 쓴 것일 뿐인데, 위기의 상황이 되니 그것마저 해고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씨는 경험으로 안다.
지난 1985년 입사해 올해로 25년을 한진중공업에서 일한 윤상민(52, 가명) 씨도 "평생 직장이라 믿었는데 정년을 채우기는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담담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조선소에 들어와 올해로 근속 29년 차인 김철수(48, 가명) 씨는 "처음 겪는 일도 아니고 두 번째다 보니 충격적인지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진중공업은 지난 2003년에도 구조조정을 놓고 노사 갈등을 겪었다.
김 씨는 "그래도 그 때는 나이 제한이라도 있어서 '고려장'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이번에는 나이고 뭐고 아무 기준도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숙련된 노동자 내보내고 다시 그들을 '저임금' 하청으로 쓴다
▲기술자의 숙련도가 그 어느 제조업보다 중요한 조선소의 특징 때문에 조선소는 정년퇴직한 60대 이상의 고령 노동자가 많다. 다만, 정규직보다 저임금을 받는 하청 노동자 신분으로 '재입사'하는 관행이 있을 뿐.ⓒ프레시안 여정민 기자 |
14년의 해고자 생활을 했던 이 씨도 그 기간 다른 조선소를 돌며 하청 노동자로 일을 했다. 이 씨는 "지금 한진에도 STX 출신들이 하청으로 많이 들어와 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자동차랑 배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자동차야 볼트 잘못 끼우면 빼면 되지만, 배는 잘못 만들면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씨는 "특히 오랫동안 조선소 밥을 먹은 숙련공의 몸으로 익힌 기술은 웬만한 설계사들도 못 따라간다"고 말했다. 일명 '오작'이라 부르는 설계도의 오류를 잡아내는 것은 젊은 혈기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부 하청 업체들은 정년퇴직을 앞둔 사람들을 미리 '스카웃'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때문에 일부 노동자들은 "잘리면 또 하청 업체 노동자로 배 만들러 들어오게 되지 않겠냐"고 기대하고 있었다. 실제 이날 조선소에서 만난 하청 노동자 가운데 많은 숫자가 한진중공업 정규직 출신이었다.
숙련된 노동자를 내보내고, 다시 하청으로 일하게 하는 이 과정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명백히 회사밖에 없다. 조선소 정규직 노동자의 연봉이 4500만~5000만 원 정도 되는데, 하청 노동자는 2400만~2700만 원 수준을 받는다. 정작 그들의 기술이 필요한 것은 회사임에도, 내보내고 싼 값에 다시 그 기술을 사용하는 셈이다. 반면 노동자는 이 조선소에서 저 조선소로 떠돌아다니는 신세로 전락한다.
1984년 한진중공업에 입사해 철판을 용접해 만든 '블록'을 조립하는 일을 26년 동안 했던 안봉규(54, 가명) 씨는 "내가 만든 배가 '부웅~' 소리를 내며 출항할 때가 조선소 일을 하면서 제일 보람을 느끼는 때인데, 하청 노동자로 여기 저기 떠돌다 보면 그런 감동이나마 느낄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한진이 고작 340명 희망퇴직 위해 이 판 벌릴 회사 아니다"
▲한진중공업의 작년 신규 수주 건수는 비록 0이지만, 2009년 3분기 보고서 기준 수주잔량만 놓고 보면 2.63년으로 현대미포조선(3.24년), STX조선(2.89)에 이어 3위다. ⓒ프레시안 여정민 기자 |
한진중공업의 작년 신규 수주 건수는 비록 0이지만, 2009년 3분기 보고서 기준 수주잔량만 놓고 보면 2.63년으로 현대미포조선(3.24년), STX조선(2.89)에 이어 3위다. 조선 6사 가운데 중간은 되는 것이다.
외려 노동자들은 최근 한진중공업이 만든 필리핀법인 수빅조선소의 적자를 핑계로 국내 노동자를 자르려 한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최근 18만톤급 벌크선 2척을 수주한 수빅조선소는 그 규모만 부산의 영도조선소의 10배가 넘는다. 필리핀의 저임금을 목표로 한진중공업이 해외법인을 세우고 지금까지만 1조 원의 넘는 돈을 쏟아 부었지만, 이익이 나질 않고 있다. 동양종금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수빅조선소의 지분법 손실금액은 상반기에만 254억 원, 3분기까지 427억 원이었다.
조선소 '짬밥'이 오래된 노동자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기온이 높고 습도가 많은 필리핀은 배를 건조하기에 적합한 기후가 아니라는 것이다. 안 씨는 "한여름이 되면 부산에서도 철판 온도가 50℃가 넘는다"며 "고온의 필리핀에서 무슨 배를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현장 노동자들이 분석하는 또 하나의 구조조정 이유는 노조 길들이기다. ⓒ프레시안 여정민 기자 |
현장 노동자들이 분석하는 또 하나의 구조조정 이유는 노조 길들이기다. 채길용 지회장은 "국내 조선소 축소와 정규직 축소를 바탕으로 한 비정규직 확대와 더불어, 노동조합 위축이 구조조정의 목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채 지회장은 "회사가 '6년 간 노조에 너무 끌려다녔다'고 공공연히 얘기한다"고 덧붙였다.
김철수 씨가 "솔직히 교섭에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는 이유기도 하다. 김 씨는 "아무리 경영이 어렵다고 해도 이미 고령화된 조선소의 상황을 고려할 때, 단계적으로 몇 년에 걸쳐 충분히 정규직은 줄여갈 수 있다"며 "그럼에도 구조조정을 얘기한 만큼, 고작 희망퇴직으로 340명 내보내려고 이런 판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 씨는 "이번에는 교섭에서 적당히 마무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2차, 3차 구조조정 시도는 계속 나올 것"이라고 했다. 김 씨는 무려 2년 가까이 싸웠던 지난 2003년 노동조합 간부였다.
본격화된 건설식 경영…한진重, 조선 줄이고 건설에 집중?
▲한진중공업의 매출은 조선 부문이 50%, 건설이 33%, 기타가 17%로 구성돼 있다. ⓒ프레시안 여정민 기자 |
한진중공업의 매출은 조선 부문이 50%, 건설이 33%, 기타가 17%로 구성돼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조선업종의 불황을 건설 부문이 보완하고 있는 상태다. 건설 부문은 국토해양부 발표 토목공사 실적이 국내 4위인 업체다.
최근 한진중공업이 조선업에 건설식의 경영방식을 잇따라 도입하고 있는 것도 '조선 축소, 건설 확대'라는 의혹의 근거다. 한진중공업은 지난해부터 하청업체 최저입찰제와 부서별 책임제를 조선소에 도입했다. 이는 모두 다른 조선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경영방식으로, 건설 현장에서 주로 쓰이는 것이다.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유장현 선전부장은 "하청 최저입찰제를 도입하면서 지난해부터 10개 업체 이상이 부도가 나거나 폐업을 해 업체 사장이 임금도 주지 않고 야반도주하는 사태가 빈번했다"고 말했다. 김재길 한진중공업지회 부지회장은 "지난해 12월의 3000명이던 하청 노동자가 올해 1월 2500명으로 줄었다"며 "최저입찰제가 도입되면서 하청 노동자의 월급이 대폭 줄어든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종의 '도그별 경쟁' 체제인 부서별 책임제도 역시 조선업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 여러 사람의 증언이었다. 4도크에서 문제가 생겨도, 3도크의 더 나은 숙련공이 이를 봐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종의 기술의 하향평준화다. 김재길 부지회장은 "일련의 변화가 모두 건설 출신의 임원들이 내려오면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여기에 10년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한다는 조선업의 특성을 감안해 보면, 조선업은 당분간 지난 10년에 비해서는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건설에 주력하면서 조선의 국내 비중을 줄이는 동시에 물량을 수빅조선소에 집중시켜 수빅조선소의 적자를 흑자로 만드는 것이 최종 목적 아니겠냐는 분석은 이런 판단에 있다.
현장에 이미 파다하게 돌고 있다는 한진중공업의 4개 조선소 가운데 울산과 다대포 조선소의 매각설도 그 근거의 하나다. <프레시안>은 이런 의혹들에 대해, 한진중공업의 해명을 듣기 위해 인터뷰를 추진했으나 영도조선소의 관계자는 인터뷰를 거부했다.
노조는 "당분간 전면 파업은 계획이 없다"고 했다. "물량도 별로 없는 마당에 파업의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노조가 "일단 대화에 집중하겠다"는 입장인 만큼, 한진중공업이 77일 간의 옥쇄파업을 겪었던 쌍용차 사태를 당장 재현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틈날 때면 노조 사무실 앞의 홍보물을 읽기 위해 모여 서 있는 현장 노동자의 불안감은 하루하루 깊어지고 있다.
▲ 틈날 때면 노조 사무실 앞의 홍보물을 읽기 위해 모여 서 있는 현장 노동자의 불안감은 하루하루 깊어지고 있다. ⓒ프레시안 여정민 기자 |
▲ "정리해고 분쇄."라느고 쓰여진 조끼를 입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프레시안 여정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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