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그런가? 지난해 말부터 조선소 노동자들이 가장 긴장하는 것은 "물량이 없다"는 것이다. 물량 즉 신규수주한 선박이 없다는 것은 곧바로 일감부족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말부터 이미 잔업 및 주말 근무(특근)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물량 부족은 회사의 경영전략에서 비롯한 것이다. 조선업이 수축되면서 신규 수주 선박 가격이 대폭 떨어지자, 한국 대형 조선소들은 풍부한 수주 잔량에 기대 신규 수주에 매달리지 않았다. 가격이 떨어진 선박을 수주하면 이전 계약한 선수사들로부터 '가격을 깎자'는 가격 재협상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형조선소 자본은 신규 수주와 상관없이 기존 계약 유지에 신경 쓰거나 안 되면 납기 연장 요구, 선형 변경 요구 협상에 집중했다. 다시 말해 신규 수주를 '골라서' 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소 자본은 이런 '현상유지 전략'을 노동자들에게 똑같이 적용하지 않았다.
올 초부터 몇 가지 심상치 않은 조짐이 나타났다. 한진중공업과 SLS조선이 가장 크게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한진중공업은 컨테이너선 주력업체인데 벌크선과 더불어 물동량이 축소되면서 신규 수주가 거의 없었다.
회사의 수주 축소의 첫 번째 희생양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이었다. 회사는 올 초 이들의 성과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또 협력업체에 '최저입찰제'를 실시해 가장 낮은 가격을 매긴 업체에 계약을 맺겠다고 압박했다. 10% 안팎에서 최대 30%까지 단가 인하를 요구했다. 결국 12개 업체가 폐업했다. 사내하청노동자들의 심각한 고용불안이 일어났다. 심지어 폐업한 12개 중 3개 업체 노동자들만이 임금 체불 없이 퇴직금을 지급받았다.
계약방식도 재하청 구조로 변경했다. 한진중 원청과 업체가 직접 계약하던 방식에서 선인터네셔널이라는 중간업체가 끼어드는 재하청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선인터네셔널이라는 회사는 한진중공업 그룹의 조남호 회장 처남이 운영하는 회사로 알려져 있다.
작업방식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작업형태에 따른 부서별 배치였지만, 최근 각 도크에 작업 형태를 맞추는 방식으로 달라졌다. 이상하게도 같은 인원으로 일했는데 도크별 배치로 바뀌면서 잉여인원이 남았다.
신규 수주 '골라서' 하더니 구조조정 칼날 들이대…1호는 한진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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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는 최저입찰제 폐지 및 현안 문제를 해결을 위해 최초로 두 차례에 걸쳐 '원하청 노동자 공동결의대회'를 한진중 부산공장 '단결의 광장' 앞에서 가졌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부분파업, 확대간부파업과 65시간 이상 전 조합원 파업을 벌이다가 9월 24일부터 30일까지 시한부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지난 11일 한진중공업은 23일까지 근속이나 연령과 관계없이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300여 명이 넘는 인원이 신청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회사는 한 술 더 떠 18일에는 희망퇴직자를 포함해 전체 정규직의 30% 이상을 인력 구조조정하고 기술본부를 분사하겠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한진중공업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2800여 명,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1900여 명이다. 1300여 명의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 중 절반 가량이 공장을 떠날 수도 있다.
한진중공업은 대형조선사 최초로 인력 구조조정이 진행 과정에 놓여 있다. 그러나 한진중공업지회가 지적했듯이, 지난 10년간 벌어들인 돈이 무려 4277억 원 흑자였고, 올해 3분기 이익잉여금이 무려 1686억 원, 올해 3분기 누적 당기 순이익은 1056억 원이다. 조선부문 가동률도 신조선의 경우 86.6%, 특수선은 무려 110%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도 한진중공업은 지난 몇 십년간 일만 해왔던 노동자들에게 경기 축소의 책임을 떠넘기겠다는 것이다.
중소조선소도 구조조정…신용 평가 빌미로 구조조정 압박
중소조선소 중에서 유일하게 민주노조가 있고 금속노조 소속인 SLS조선에서도 올해 초부터 회사의 공격이 들어왔다.
정부가 추진하는 중소조선소 신용평가를 빌미로 회사는 구조조정, 임금삭감, 무분규를 요구했다. 금융감독원과 대형은행들로 구성된 신용평가단들은 '중소조선소 구조조정을 위한 신용평가지침'을 만들면서 파업으로 인한 공장 중단 가능성이나 노조가 있으면 신용평가를 감점한다는 논의를 하고 있었다.
회사는 이를 이용해 평가 등급을 높이기 위해 지회에 구조조정 및 임금삭감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채권단 중 모 대형은행에 문의해 본 결과 이런 내용이 금융감독원과 각 은행 심사관들이 모인 TF팀에서 제기된 제안이었음을 확인했다. 끝내 신용평가지침의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공장 중단 가능성 및 노조 유무'에 따른 감점 논의는 제안 수준에서 그쳤다는 것이다. 당시 SLS조선은 신용평가에서 B등급을 받아서 워크아웃 대상에선 제외됐다.
회사는 지회가 채권은행에 신용평가지침 내용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했고, 현장은 회사의 거짓말이 폭로되면서 고용에 대한 불안감은 회사에 대한 반감으로 일순간에 변했다. 그러나 SLS조선의 구조조정 시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SLS조선 사장은 외주업체 공사대금을 부풀려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구속됐고, 회장은 부실회계 조작 혐의로 불구속 재판 중이다.
채권단은 결국 최근 SLS조선을 재평가하기로 했다. 워크아웃 혹은 퇴출, 법정관리 상태 일보 직전에 있는 SLS조선 노동자들 역시 경영 부실의 책임을 뒤집어쓰게 됐다. 채권단과 회사가 지회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지회의 구조조정 동의서와 이를 바탕으로 한 구조조정에 대한 노사합의서로 알려졌다.
SLS조선 노동자들이 회사 경영의 부실과 비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임금을 삭감하거나 구조조정 대상이 돼야 한단 말인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조선소 노동자에게 안전지대는 없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조선구조조정 신호탄의 첫 번째 희생양인 것은 다른 조선소도 마찬가지다. 2003~2007년 조선 호황기 때 늘어난 고용은 직영인 정규직이 아니라 하도급인 비정규직이었다.
국내 조선소의 하도급은 1990년 전체 인력의 13.6%였으나 2006년에는 49.1%로 급등했다. 같은 기간 직영 대비 하도급 비율은 21.2%에서 무려 153%로 폭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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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현대중공업 군산공장은 '비정규직만 있는 조선소'로 생산직 직영, 즉 정규직은 단 한명도 없다. 비정규직만 있는 기아차 모닝공장 '동희오토'처럼 회사가 진정으로 원하는 '고용 유연화'가 마음껏 가능한 곳이다. 게다가 SLS조선을 제외하고 중소조선소 성동조선해양, SPP조선 등 중형조선소들은 거의 비정규직만을 고용하고 있다. 노조가 없는 중형조선소들은 이미 계약해지를 통해 인력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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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업 경기 위축은 동시에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으로 고스란히 이어져왔다. 그동안 일부 대형 조선소는 숙련으로 훈련된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자기 회사에 잡아두기 위해 정규직 복지에 비교할 순 없지만 학자금 지원 같은 중요한 일부 혜택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3분기까지 영업이익이 1587억 원에 달해 전년 대비 48%나 증가한 대우조선 역시 사내하청업체 8~9개 이상을 계약해지 했고, 이들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퇴직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 2664억 원으로 전년 대비 87.1% 증가한 삼성중공업 역시 물량 축소로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먼저 내보내고 있다. 영업이익이 55% 증가해 5317억 원을 챙긴 현대중공업에서도 사내하청 노동자들 사이에서 3000명 계약해지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이들의 고용은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한진중공업지회처럼 정규직이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계약해지와 임금체불에 맞서 싸워줄 것인가? 노사화합의 대명사로 칭송받는(?) 현대중공업노조가 고용불안에 떨고 있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에 맞서 싸워줄 것인가? 지금 많은 조선소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이런 것을 결코 기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정규직 노조의 연대마저 기대할 수 없다면, 추풍낙엽처럼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회사가 원하는 대로 직장에서 짤려나갈 것도 뻔하다.
정규직 구조조정의 신호탄이 한진중과 SLS조선에서 시작됐지만, 다른 조선소도 안심할 수 없다. 수주 가뭄과 공급과잉에도 불구하고 '빅3(현대중, 삼성중, 대우조선)'는 풍부한 수주잔량으로 그나마 버틸 여력이 있지만 생산과잉 문제에 빅3가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선 장담할 수 없다. 예컨대, 현대중공업은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에 이어 군산에 새롭게 조선소를 확장했고 최근에 군산조선소 건조식을 마쳤다. 그러나 내년 군산공장 설비투자는 최소 비용만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현대중공업과 달리 현대미포, 현대삼호중 등은 자체 영업망을 갖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현대중공업에서 수주해 온 것을 배분받는 구조다. 때문에 만약 수주가뭄이 계속된다면, 현대중공업은 현대중, 현대미포, 현대삼호중 중에 어딘가를 손보고 싶어할 가능성이 높다.
군산조선소는 비정규직 공장이기 때문에 수월하게 인력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규직에 드는 비용이 아깝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현대중공업 3개 계열사 중 유일하게 금속노조 사업장인 현대삼호중공업, 혹은 고령자가 많은 현대미포조선, 현대중공업 정규직 역시 구조조정, 희망퇴직 등에서 자유롭지 않다.
몇 년 뒤 STX조선의 해외공장 확장이 국내 조선소에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공격적 해외경영으로 상위권 조선소로 도약할지 아니면 대우그룹 김우중의 신화처럼 불꽃처럼 한순간에 꺼질지 변덕스런 시장과 경제 상황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값싼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을 자른다면?
상대적으로 처지가 나은 대우조선에서는 매각을 노조의 영향력을 축소 및 분쇄할 기회로 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미 대우조선과 현대삼호중에서는 현장 노동자를 쥐어짜는 현장통제가 심각하다. 대우조선은 2005년부터 시행한 원가절감운동으로 2285억 원을 절약했다고 한다. 목표액 대비 달성률이 무려 114%이나 되는 것이다. 현대삼호중에서 시행되는 원가절감운동을 보면, "하루에 한 사람이 하루에 한가지 씩 절약하자"면서 작업도구 및 작업 장갑도 아껴서 빨아 쓰기 등의 캠페인을 벌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복지관 축소, 휴게실 철거도 포함됐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점심시간 및 노동시간을 통제해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등 현장통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주역으로 90년대 초까지 조선소 노동자들은 전국 노동자들로부터 존경과 경외감을 한 몸에 받아왔다.
1989년 현대중공업 파업 때는 육해공 군대가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투입되었고, 대우조선 옥포조선소 파업, 현대삼호중 옥쇄파업 등 1987년 이후 1998년까지 조선소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다. 심지어 삼성중공업에서도 1987년 파업을 통해 온전한 노조형태는 아니지만 삼성중공업노동자협의회를 건설할 수 있었다. 독재정권의 폭력적, 물리적 탄압에도 끄떡없었던 불굴의 투쟁의지가 전국 모두를 감동시켰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조선소 노동자들의 투쟁은 어느덧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규직 노동자들은 높아지는 숙련도, 고용의 안정 속에 길들여졌고, 비정규직 확대와 같은 정치사회적 문제가 사업장에 파고들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심지어 몇 년 전 대우조선노조는 정규직 고용 7000명을 유지한다는 웃지 못할 합의를 회사와 하기도 했다. 지금 정규직의 몇 배가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고, 비정규직만 고용하는 조선소들도 우후죽순 늘어가고 있다. 가장 최악은 세계1위 조선소 노조 위원장이 "50% 인력구조조정"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전 세계 조선소 노동자 파업시대…악착같이 버텨야 한다
해외공장 사례도 심상치 않다. STX조선이 STX유럽 핀란드 투르크조선소 노동자 400여 명을 내년에 해고하겠다고 하자 지난 11월 11일부터 16일까지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STX유럽은 프랑스 산타 나자이르 조선소에서도 내년 1월 351명을 해고하려 하고 있다. 이탈리아 조선소 노동자들도 인력구조조정에 반대해 전국적으로 파업을 벌이며 거리로 나오기도 했다.
한국 조선소 노동자들은 자신의 고용문제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조선소 노동자들의 구조조정 반대 요구에 연대의 손을 뻗혀야 한다. 한국 조선소 노동자들의 고용을 지키는 것은 해외 조선소 고용이 없어져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고용 구조조정은 회사가 현장을 장악하고 민주노조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때 재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조선소 사용자들은 언론 등을 통해 내년에 구조조정이 몰아질 것이라고 먼저 얘기하고 있다. 내년 우리는 수주 가뭄과 사내하청 잘려나가기, 정규직 임금 삭감 및 인력구조조정에 비해 조선소 회사의 성장하는 이익을 동시에 볼 것이다.
회사가 수주잔량에 버티듯 조선소 노동자들도 악착같이 버텨야 한다. 그 대오 안에는 반드시 사내하청 노동자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1987년 이후 조선소 노동자은 가장 심각한 전환점에 서 있다. 몰아치는 구조조정 폭풍 앞에서 조선소 노동자들이 살아남을 길은 단결과 연대뿐 다른 것은 없다. 이제 1987년 정신을 되살려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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