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조례안은 초안 발표 직후부터 거센 찬반양론에 휩싸였다. 특히 보수 언론은 교내 집회 허용, 두발 및 복장 자유 등 세부적인 조항을 문제삼는 것부터 조례가 제정되면 교권이 추락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학생인권조례 자체를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선거용 프로젝트 또는 '좌파 교육'을 정착시키려는 프로젝트로 몰아가고 있다.
교사들 사이에서도 교권 추락, 통제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조례안에 대한 지지율이 낮다. 조례안 심의를 맡을 경기도교육위원회와 경기도의회에서의 통과 여부도 불투명하다.
<프레시안>은 현재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학생인권조례 혹은 학생 인권 보장이 왜 필요한지를 이야기하는 릴레이 기고를 싣는다. 현직 교사와 교육 전문가들이 나섰다. <편집자>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주도하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난기류에 휩싸였다. 불행한 일이다. 김상곤 교육감은 선거당시 학생인권 문제 해결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경기도민은 그를 선택했고 지금은 이를 정책으로 현실화시키는 과정이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4대강 공약이나 공정택 전 서울시교육감의 국제중 공약과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번 일은 경기도의회의 무상급식 딴지 걸기 제 2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도 그동안 달라진 표심을 못 읽는 것이다. 모두 다 알고 있듯이 학생인권의 기본 조건인 두발 자유, 체벌 금지, 야간자율학습 선택권 문제는 얼핏 보면 당연한 것 같지만 지난 수십 년 전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 학생의 삶을 짓눌러왔다.
지난 16대 국회에서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을 비롯해 교육시민단체들이 이 세 가지를 지키려 줄기차게 노력했다. 그러나 살인적인 대학입시 앞에서 '배부른 소리'라는 반발에 부딪혔고 대다수 교사와 부모는 '10대는 어리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번 조례로 학생인권침해 문제가 일시에 해소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한 걸음 나아갈 수는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51:49 당신의 선택은?
나는 서울 서초 지역 한 인문계고등학교 학교운영위원(지역위원)이다. 학운위에서는 학생들의 수학여행지 선택부터 교내 직영식당 운영에 이르기까지 교내 크고 작은 문제를 심의한다. 학운위는 구조상 의사결정 과정에서 해당 학교 교사나 학부모들 발언권이 세다. 강남 지역의 경우는 특히 더하다.
나 역시 살인적인 입시 현실을 감안해 밖에서 교육 운동을 하면서 주장하는 정책들을 학운위에서 관철시키고자 할 때는 입시 때문에 불안해하는 학부모들을 설득할 수 있도록 앞뒤 꼭꼭 눌러서 말을 가려 하는 편이다. 그러나 대부분 내가 양보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 결론을 내게 된다.
최근 학생인권을 지켜주지 못해 아쉬운 기억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보충수업문제이다. 그 무렵 보충수업 문제로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공교롭게도 찬성 51%, 반대 49%가 나왔다. 당신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결정할 것 같은가? 다시 한번 설문조사를 실시하거나 희망자만 보충수업에 참여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너무나 상식적인 일이 학교에서는 예외이다. 교사위원들은 '100% 보충수업 참가로 결정하자'고 했고 학부모 위원들도 대부분 동의했다. 그 이유 '2~3년 전에도 같은 상황이라 희망대로 해보았으나 일부 학생들이 귀가하면 면학분위기가 흐트러져 학생 관리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럴 때 학생들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일부 학교에서는 보충수업 시간에 교과서 진도를 나간다. 위법이다.
▲ "학생들이 가장 우선순위에 꼽은 것은 다름아닌 학생인권 보장 문제였다. 그 다음 보충수업· 자율학습 폐지, 일제고사 폐지, 무상교육, 수능시험 폐지 등이 줄을 이었다." 2007년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받고 있는 고등학교 학생들. ⓒ연합뉴스 |
차기 교육 공약 1순위는 학생인권 보장!
혹자는 김상곤 교육감이 차기 선거를 위해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한다고 비난하지만 사실은 10대 학생들이 요구하는 1순위 정책 과제가 학생인권이다. 일례로 지난 1월 17일 풀뿌리 교육운동 단체인 '교육희망네트워크'라는 단체가 출범했다. 이날 개막식 행사에서는 오는 6월 2일 교육감 선거에서 내세워야 할 교육 정책 10대 과제를 발표했다. 대개는 예상한 내용들, 즉 '행복한 학교 만들기', '동등한 교육 기회 제공', '무상 교육 실시' 등이었는데 그중 흥미있는 내용이 하나 발표되었다.
성인들이 정책 우선순위로 꼽은 것은 무상교육, 무상급식, 작은 학교 문제였는데 반해 학생들이 가장 우선순위에 꼽은 것은 다름아닌 학생인권 보장 문제였다. 그 다음 보충수업· 자율학습 폐지, 일제고사 폐지, 무상교육, 수능시험 폐지 등이 줄을 이었다. 학생인권 보장은 돈 안드는 개혁이자 가장 실효성 높은 교육 개혁 중 하나이다.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은 이를 제대로 착안한 것이다. 박수받아 마땅한 일이다.
경기도학생인권조례에 담겨 있는 건 단순히 학생의 자유를 보장하는 몇몇 조항만이 아니고 1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하는 학생참여위원회를 둔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다행한 일이다. 핀란드의 청소년의회가 떠올랐다. 경기도의 학생참여위원회가 앞으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시민을 키우는 핀란드 청소년의회
지난해 이맘 때 방문한 핀란드는 여러가지 교육적 감동을 주었지만 청소년의회 활동도 인상적이었다. 핀란드 청소년의회는 각 지방자치단체의 청소년을 대표하는 자치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핀란드의 청소년의회는 2006년 3월에 제정된 '청소년법'(Youth Law)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이 법 8조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청소년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제에 관하여 청소년들의 의견을 들을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핀란드 청소년의회는 이러한 규정을 충실히 지키는 중요한 과정이고 절차이다. 핀란드 청소년의회의 목표는 ①청소년들을 의사결정에 참여시키고 ②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듣고, 청소년에 관한 안건들을 논의하는 공간으로 활용 ③청소년이 시의회 정치 안건 논의 및 결의 방법과 친숙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등이다.
각 시의 청소년의회는 매우 다르게 구성되고 일하는 방식이 다르지만 청소년의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특성에는 ①청소년의원들은 지역의 청소년을 대표하는 공식적 대표인단들이고 ②시의 청소년 관련 안건 논의와 결정에 영향력을 미치고 ③시의 청소년 관련 행사를 조직하는 역할이 있다. 이렇듯 청소년의회는 청소년들의 권리와 청소년문제에 관해 스스로 의사를 형성하고 전달하는 교량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핀란드의 지역 청소년의회는 현재 전국적으로 약 150여 개가 있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 에스뿌시 청소년의회의 한 해 예산은 5만 유로(약 8000만 원)이다. 보통 청소년의회에 참여하는 연령대는 13세부터 26세까지이나 13세에서 18세가 주류를 이룬다.
청소년의회는 반드시 선거에 의해 선출한 대표로 구성된다. 의원 수는 보통 10~40명으로서 구성되며 시마다 그 수는 다양하다. 인구 530만 명의 핀란드에서 전국 지자체에 1500명이 넘는 의원을 두고 있다. 청소년의회의 출발은 핀란드의회가 설립 100주년 기념을 앞두고 핀란드의 의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국가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으며 국제적으로 프랑스의 국회의장인 로랑 파비우(Laurent Fabius)가 EU 회원국에게 청소년의회를 조직할 것을 제안한 것도 청소년의회의 결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청소년의회 설립을 위한 프로젝트는 국회, 청소년활동가, 교육기관의 협력 속에서 집행되었다. 핀란드의 청소년의회는 청소년들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에 대해 대의민주주의 방식을 통해 의사결정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미래시민으로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정치적 훈련이기도 한 것이다. 13세에서 18세에 이르는 청소년들이 지방의회 의원, 정치가들을 만나 청소년들의 입장을 전달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청소년들로 하여금 사회에 관심을 갖게 하는 동시에 정치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키도록 유도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에스뿌시 청소년 의회 의장인 여학생 한나 양에게 핀란드 청소년의회를 소개받았다. 한나 양은 똑부러지게 청소년의회의 설립 취지, 역사, 배경, 구조, 하는 일을 설명하여 인기를 끌었다. 한나양은 녹색당에 있다고 했다. 때로는 청소년의회에서도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학생들과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학생들 사이에 정치적인 입장을 달리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한나 양에게 '장래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감'이라고 추켜세우며 사진촬영을 청하기도 했다. 한나 양은 자신은 4개월 후인 4월에 치루어지는 대학입학 시험 준비를 하고 있지만 가고 싶은 대학을 가려면 1년 정도를 더 공부해야될 것 같다고 했다. 그 사이 장기 해외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다. 뉴욕, 그리스, 일본, 동남아, 베트남이 가고 싶다고 했다.
그순간 한국 고3의 학교-학원-집-학교-학원-집인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이 떠올랐다. 우리의 고등학생들 역시 핀란드 학생들 못지않게 진취성과 상상력, 열정을 가진 세대이다. 그들이 훨훨 날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어른들이, 제도가 이들을 받쳐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학생인권 지켜줄 이들은 교사와 학부모다
최근 온통 아이티 지진 소식으로 떠들썩하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진피해를 입어 참혹해진 아이티를 방문해 좀더 많은 국제 사회의 지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뜻깊은 일이다.
많은 부모들은 반기문 사무총장을 자식들의 롤모델로 삼는다. 일부 부모들은 한비야 씨에도 열광한다. 반기문 씨나 한비야 씨나 두 사람 모두 자긍심을 갖고 자신의 꿈과 희망을 이루기 위한 목표를 세워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반기문은 어디서 키울 수 있을까? 청심국제중학교에서? 아님 대원외국어고등학교, 또는 하버드대학교에서? 경기도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 아마 그 지역에서 제2의 반기문이 키워질 확률이 높다. 자신의 천금 같은 권리를 깨닫고 이를 지키는 사람만이 자신과 이를 둘러싼 환경을 제대로 파악하고 때로는 비판적으로 보면서 공동체의 미래, 전 인류에 대한 책무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핀란드 청소년의회의 한나 양이 그렇듯 말이다.
솔직히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다고 해서 단번에 바뀔 학교 현장이 아니다. 학생인권 문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해도 쉽게 바뀌지 않고, 국가인권위 권고를 교육과학기술부가 무시하는 현실이니 말해 무엇하랴?
그래도 학교 현장에서 학생인권을 지켜줄 사람들은 결국 교사와 학부모들이다. 그러니 교육에 대해 잘 모른다고 침묵하고 있거나 입시 구조 탓만 하지 말고 학운위에 가서 보충수업 찬반이 51대49일 때 '안 된다'고 떠들자. 부모 세대의 체벌과 바리깡의 상처를 추억으로 간직하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2010년에는 부모들도 학생인권이 존중될 수 있도록 학생인권조례가 정착하는 일에 팔걷고 나섰으면 한다.
학생인권조례가 경기도에서 실시되고 더 나아가 전국 16개 시도에서 확대되도록 힘써 보자. 그리고 오는 2010년 6월 2일 지자체, 교육자치선거에서는 학생들을 그나마 덜 불행하게 할 후보인지 아니면 10대들의 밥 먹을 시간, 잠잘 시간도 제대로 못 지켜줄 위인인지 심판하자.
학생인권조례 정착을 통해 학생인권이 향상되어 우리 애들이 반기문 사무총장이나 한비야 씨처럼 성장하면 그야말로 감사한 일이다. 비록 가방끈 짧고, 공부는 못했어도 주눅 들지 않고 꿈과 희망을 가진 줏대있는 학생, 그렇게 성장한 친구들이 20년 후 한국과 세계를 누비는 1인기업 사장들이 된다면,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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