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체간 담합,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불공정거래 등 기업들의 각종 '반칙'을 조사하고 규제하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수장의 입에서 4대강 턴키 입찰에 참여한 대형 건설사들의 담합 의혹을 사실상 시인하는 발언이 나왔기 떄문이다.
정 위원장은 지난 11일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4대강 턴키 입찰 문제를 지적하는 한나라당 유일호 의원의 질문에 "공정위에서 지난달 4개 팀을 파견해 이틀간 현장조사를 했다"며 "대체로 담합과 관련된 정황이 포착된다"고 답했다.
▲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 ⓒ뉴시스 |
파문이 확산되자 공정위는 이날 "공정위장이 '담합과 관련되는 듯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고 발언한 것은 4대강 사업이 아닌 일반 턴키공사 조사에 관련된 것"이라고 해명하는 등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4대강 턴키 입찰'이라고 분명히 특정 지은 질문에 '일반 턴키 공사'의 문제를 언급했다는 해명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렇다면 정 위원장의 발언은 실수일까? 두 가지 가능성이 다 존재한다. 처음부터 실수인 경우와 처음에는 의도된 발언이었으나 예상보다 파문이 커진 경우. 두 가지 경우 모두 동일한 배경에 기반한다. 바로 부쩍 속도감을 내고 있는 공정위의 '담합' 조사다.
MB정부 들어 활발해진 '담합' 조사
공정거래위원회는 기업들 입장에서는 일종의 '군기반장'이다. 대기업 CEO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일성으로 '비즈니스 프렌들리'까지 내세움에 따라 현 정권에서 공정위는 자칫 비중이 축소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기됐다. 게다가 첫 공정위원장으로 관료가 아니라 교수 출신이자 이 대통령의 최측근인 백용호 국세청장이 임명되면서 이 같은 걱정은 더 커졌다. 공정위가 유명무실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였다.
하지만 우려와 현실은 좀 달랐다. 공정위의 '2008년도 통계연보'에 따르면, 공정위는 2008년 한해 동안 모두 4556건의 사건을 처리했다. 이는 노무현 정부 5년(2003~2007년) 동안 공정위의 연평균 사건처리 건수인 4140건에 비해 10% 증가했다. 또 고발과 시정명령 같은 무거운 제재가 사건처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노무현 정부 때보다 더 높아졌다. 특히 경고 이상 시정조처가 내려진 사건들 중 담함사건이 65건으로 한 해 전의 44건에 비해 48% 늘었다.
LPG ·소주 ·우유 ·제빵 등…'친서민' 행동대장?
이런 흐름은 정호열 현 위원장이 온 뒤 더 뚜렷해졌다. 법학 교수 출신인 정 위원장은 한국보험학회장 등을 지내면서 평소 '친기업'적인 성향으로 평가된 인물이다. 한 언론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기업은 도덕성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라 효율성을 지향하는 영리 집단일 따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때문에 임명 당시 '친기업'적 성향으로 부적격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정 위원장은 취임 이후 기업들의 (룰을 어긴) 영리 추구에 철퇴를 내리는데 거침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12일 열린 전원회의에서 비록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공정위는 LPG(액화석유가스) 업체들의 담합 혐의에 대해 제재 심의를 했다. SK에너지 ·GS칼텍스 · S오일 · 현대오일뱅크 · SK가스 ·E1 등 6개 LPG 업체가 6년여에 걸쳐 담합했다는 의혹에 대해 정 위원장은 사상 최대 규모인 "1조 원 대의 과징금 부과가 예상된다"고 국정감사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공정위는 소주업체들의 담함에 대한 과징금도 12월 중에 부과할 계획이다. 공정위는 소주업체들이 지난해 말과 올해 초 담합을 통해 가격을 올렸다고 보고 있다. 또 인플루엔자 백신 제조·판매사 4곳, 우유·제빵업체, 국내 2개 항공사를 포함한 국내외 24개 항공사의 화물운송료, 전국 30개 지역 200여 개 주유소의 가격 담함 여부 등에 대해서도 조사 중이다. 앞서 지난 8월에는 롯데칠성 ·해태음료 등 음료업체들의 가격 담합 혐의에 대해 255억 원의 과징금을 물리기도 했다.
공정위가 최근 벌이고 있는 담합 조사는 서민생활에 밀접한 품목에 집중돼 있다. LPG · 소주 ·우유 · 제빵 · 음료 모두 생필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지난 6월말 이명박 대통령이 친서민-중도실용주의 노선을 천명한 직후인 지난 8월 취임한 정 위원장의 행보가 이와 연관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정 위원장은 취임 당시 "서민생활과 밀접한 분야의 불공정행위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또 현재 공정위가 조사를 벌이고 있는 업종 중에는 청와대가 조사를 지시한 것도 있다. 우유는 이 대통령이 직접 예로 들면서 "친서민 정책에 역행하는 가격 담합 등 불공정행위에 대해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고 말한 직후 공정위가 조사에 착수했다. 이때문에 공정위의 최근 움직임은 청와대와의 교감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민들에게 민감한 품목을 골라 담합을 조사하고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은 이 대통령의 친서민 정책을 각인시키는데 효과적이다. 특히 친서민 정책의 진정성을 자꾸 의심하게 만드는 '비즈니스 프렌들리'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또 서민생활을 실제로 업그레이드 하는 복지정책과 달리 공정위를 통한 친서민 행보는 돈도 들지 않는다.
게다가 경제위기를 맞아 경기를 부양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정부의 S.O.S에 꿈쩍도 하고 있는 않는 기업들에게 '본떼'를 보여주는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아무리 투자와 고용을 늘려달라고 요구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기업들에게 정부의 힘을 보여줄 수 있다는 얘기다. 공정위의 담합 조사는 이처럼 1석 3조의 효과를 가진다. 정 위원장이 친서민 행동대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정 위원장은 지난 6일 한 조찬 강연회에서는 "최근 공정위가 너무 활발하게 기업들에 대한 답합조사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너무 늦었다"며 "카르텔(답합)에 대해 앞으로도 강력히 집행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4대강 입찰 담합" 발언, '도마뱀 꼬리 자르기'?
공정위의 4대강 입찰 담합 조사도 이런 흐름 위에 놓여져 있다. 공정위는 지난달 14개 대형 건설사를 대상으로 4대강 사업 공사 담합 관련 현장 조사를 벌였다.
3년 동안 '22조 플러스 알파'의 재정이 투여되는 4대강 사업은 건설업계에는 '노다지'다. 공사비가 1000억 원이 넘는 매머드 공구만 11개다. 조달청만이 아니라 한국수자원공사 ·농어촌공사 ·지방자치단체 물량까지 합치면 건설업계 수혜의 폭은 훨씬 늘어날 전망이다.
정부는 대부분 공사의 입찰 방식으로 턴키 입찰을 택했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한 업체가 맡는 턴키 입찰은 공사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공공 발주에서 자주 채택되지만 실제로는 각종 비리의 온상이며 공사비만 부풀린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4대강 사업 입찰을 둘러싼 잡음은 처음부터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
정부는 지난달 4조 원 규모의 1차 턴키 입찰 결과를 발표했다. 올해 안에 2차 턴키 입찰, 최저가 입찰 등 앞으로도 줄줄이 사업자 선정을 이어갈 계획이다. 단군 이래 최대 국책사업인 4대강 사업을 남은 임기 안에 마무리짓고 싶어 하는 이명박 정부에겐 시간이 부족하다. '정권이 바뀌면 공사 중인 사업도 뒤집어진다'는 선례는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차 입찰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됐다. 서둘러 이 문제를 매듭짓지 않는다면 계속 발목이 잡힐 사안이다. 정호열 위원장의 "담합 정황 포착" 발언이 실수가 아니라 계산된 발언이라면 일종의 '도마뱀 꼬리 자르기' 차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1차에서 비리 의혹을 다잡는 모습을 보여 향후에도 이어질 수 있는 각종 의혹 제기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다. 건설사들의 반발이 있을 수도 있지만, 4대강 사업이 계속 진행되면 가장 큰 득을 보는 것은 바로 건설사들이다.
반면 정 위원장의 발언이 진짜 실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실수가 나온 이유도 정권의 친서민 정책을 등에 업은 정 위원장의 거침 없는 '담합 행보' 탓이다. '친서민 행동대장' 역할을 하다가 너무 앞서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대개 정치인의 실언은 과도한 자신감이 그 배경이다.
정 위원장의 발언이 양쪽 어느 경우이든 이를 통해 확인되는 흐름은 분명하다. 이명박 정권의 권력 운용 방식이다. 4대강 사업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모든 것이 수렴된다. 4대강 사업은 70년대식 개발과 고도성장의 결정체다.
이준구 서울대 교수는 지난달 22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이 대통령이) 온갖 무리수를 동원해 가며 4대강 정비사업을 밀어붙이는 모습에서 흔들리지 않는 개발주의의 굳은 신념을 읽을 수 있다"며 "아무리 굳은 신념이 있다 할지라도 편법을 동원해 충분한 토론도 없이 그 사업을 밀어붙이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수사를 잠시 접었지만 4대강 사업은 결국 땅부자, 대형 건설사 등 부자들에게 이득이 돌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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