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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부활해도 '87년 체제의 덫'에 빠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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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세종대왕이 부활해도 '87년 체제의 덫'에 빠질 것"

[정치개혁 강좌] 합의제형 헌정체제 디자인

<희망정치연구회>가 진행 중인 정치개혁 특강을 연재합니다. <희망정치연구회>는 정치제도개혁에 관한 정치, 사회, 법률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설립된 민간단체입니다. <프레시안>은 정치개혁, 제도개혁을 연구해 온 학자들의 전문적인 강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해 게재합니다. 글과 함께 하단에 있는 '강의 듣기' 서비스를 통해 생생한 육성 청취도 가능합니다. 이번 정치개혁 특강을 맡은 선학태 전남대 교수의 강의는 8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편집자>

1 87년 헌정체제의 피로감

시민사회와 시장에서는 여러 집단 계층 지역 간에 나타나는 이해관계와 가치관의 차이, 특히 시장경제가 야기하는 불평등 차별 소외 배제로 인해 갈등과 분열이 발생한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갈등과 분열을 관리 조정하고 사회통합을 달성해 가는 세련된 규칙과 규범을 설계하는 제도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헌정체제가 형성되고 변화한다.

헌정체제는 헌법체제 그리고 헌법체제 하의 정치를 이끌어 가는 정당체제, 두 차원으로 구성된다. 헌정체제란 권력(정책결정권)을 어떻게 구성하고 배분할 것인가를 규정하는 여러 제도(규칙과 규범)의 앙상블이고 이 틀이 작동하는 과정과 절차를 의미한다. 이 헌정체제가 어떻게 설계되고 작동하느냐가 민주주의 발전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행 한국의 헌정체제는 어떠하고 사회갈등 조정과 민주주의 발전에 제대로 이바지하고 있는가?

1987년 6월 항쟁으로 권위주의 정권의 퇴장과 함께 새로운 헌법체제가 완성되었고, 그 헌법질서 하의 정치를 이끌어 가는 정당체제는 1988년 총선을 통해 구축됐다. 우리는 이를 '87년 헌정체제'로 부르고 있다.

달(Robert Dahl)에 의하면 절차적 민주주의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욕구와 이해관계를 표출하고 그 대표들이 정책결정 과정에 '동등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기회를 말한다. 이 기준에서 보면 87년 헌정체제는 우리 사회의 여러 집단과 계층과 지역을 '동등하고 효과적'으로 정치과정에 참여시키는 데 심각한 제도적 결손을 드러낸다. 사회경제적 시민권을 의미하는 '실질적 민주주의'가 아직 걸음마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사실은 87년 헌정체제가 로버트 달류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세련되고 정교하게 제도화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다.

그 결과 한국은 계층 노사 간, 그리고 이념 지역 환경-개발 간에 갈등과 분열이 동시다발적으로 분출하는 '갈등공화국'이라는 딱지가 부쳐지고 있다. 이런 불명예는 지난 22년 동안 운영해 온 87년 헌정체제의 '제도적 피로감'을, 종국적으로는 한국민주주의 위기를 웅변하고 있다. 어디 갈등이 없는 나라가 있을까마는 그 정도가 하늘을 찌른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사회분열과 갈등을 관리 조정하는 한국민주주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헌정체제를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모아진다. 헌정체제를 잘 디자인하는 문제야말로 민주주의 발전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2 합의제형 헌정체제란 무엇인가

정치적으로 사회갈등과 분열을 조정 관리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비용과 손실을 부담하는 집단, 계층, 지역에 보상정책을 마련해 주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정책에 의해 영향을 받는 집단, 계층, 지역의 대표를 그 결정과정에 참여시키는 방법이다. 보상정책은 결국 비용과 손실을 겪는 집단, 계층, 지역의 대표가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느냐 여부에 따라 그 성격과 수준이 좌우된다. 정책결정 과정에의 참여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책결정 과정에의 참여 정도는 권력집중과 권력분점에 관한 문제이다. 권력의 집중과 분산 정도는 국가의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정당의 수에 의해 달라진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 민주주의 연구 집단인 레이파트학파(Lijphart school)에 따르면, 헌정체제는 크게 권력집중을 지향하는 다수제와 권력분산을 지향하는 합의제로 나뉜다.

다수제형 헌정체제는 과반수당 혹은 단순 다수당의 수중에 권력을 몰아주어 정책결정 과정을 주도하게 함으로써 국정의 효율성 가치를 추구한다. 이에 반해 합의제형 헌정체제는 정책결정 과정에 소수당 혹은 야당의 참여를 '실질적으로' 허용하는 수평적 수직적 두 차원의 권력분점 공유의 제도화를 꾀해 사회갈등 조정 관리를 중시한다.

다수제형 헌정체제는 단순 다수 혹은 과반의 지지를 확보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전부/전무를 결정하기 때문에 소수자 약자 비주류에 대한 배려와 참여에 인색하고 갈등사회를 관리 통합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이에 반해 합의제형 헌정체제는 국민 지지도에 따라 각 정당에게 권력지분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소수자 약자 비주류의 참여와 포용을 이끌어내어 갈등사회에서 지속가능한 사회통합과 민주주의 발전을 구축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레이파트학파는 합의제형 헌정체제를 갈등과 분열로 바람 잘날 없는 사회를 통합시키기 위한 최적의 민주주의 발전 조건으로 평가한다. 여기서는 합의제형 헌정체제를 열어 가는데 방향타 역할을 하는 선거제도와 정당체제만 언급하겠다.

우선 합의제형 헌정체제는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를 선호한다. 비례대표제는 다수당의 과잉대표와 소수당의 과소대표, 거대 양당제에 의한 입법권 독과점 등으로 갈등을 야기하는 다수제형 선거제도와 다르다. 즉 의회 의석이 정당별 득표율에 따라 배분되기 때문에 다당제가 형성되고 정당 간에 입법권 분점 공유가 이뤄질 수 있다. 따라서 비례대표제는 특수 집단 계층 지역의 압력에 의해 정책이 좌우되는 사태를 제도적으로 막을 수 있고, 소수자 약자 비주류를 대표하는 정당에게도 정책결정 과정 참여를 허용하는 일정한 권력 지분을 보장하기 때문에 갈등조정과 사회통합의 길을 열어 놓을 수 있다.

다음으로 거대 양당제를 야기하는 다수제형 헌정의 다수대표제와는 달리, 합의제형 헌정의 비례대표제는 여러 사회갈등을 대표하는 '다당제 하의 보수-중도-진보 정당체제'를 창출할 수 있다. 특히 보수정당과의 권력분점 공유에 참여하는 진보정당의 정치력(득표율, 각료 및 의석 점유율)은 불평등과 소외와 배제를 줄이는 정책과 입법으로 계층 노사 이념 간 갈등과 분열의 조정과 사회통합에 긍정적 효과를 미칠 수 있다.

3 갈등을 조장하는 선거제도와 정당체제

87년 헌정체제는 국정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선거 승자에게 권력집중을 허용하는 강성 다수제형으로 분류된다. 여기서는 선거제도와 정당체제에 한정해 따져 보기로 하자.

우선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소선거구 다수대표제가 중심이고 여기에 비례대표제가 결합된 '2표 병립형 혼합제'이다. 이 선거제도 하에서 지역 유권자들은 '묻지도 말고 따지지 말고'식 지역주의 투표를 아낌없이 던진다. 특정 정당 후보자는 특정 지역에서 깃발만 꽂아도 당선된다. 그래서 지역 정당체제가 굳어지고 있다.

87년 헌정의 선거제도 하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 두 거대 지역정당은 득표율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의석을 차지하는 과다대표성을 보인 반면에, 군소정당인 경우 득표율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의석을 차지하는 과소대표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많은 연구자들의 분석 결과에서 확인됐기 때문에 여기서는 하나만 적시하겠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당 전신인 열린우리당 득표율은 38.3%에 불과했으나 50.8%의 지역구 의석율을 차지했고, 작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43.5%의 득표율로 지역구 의석의 53.4%(131석)를 휩쓸었다. 반면 민주노동당은 득표율 3.4%를 기록했지만 지역구는 불과 0.8%(2석)밖에 얻지 못했다. 득표율과 의석율 간의 이런 엄청난 불비례성은 의석 싹쓸이가 가능한 호남과 영남 등 권역별 차원에서는 더욱 심각할 것이다.

결국 87년 헌정의 선거제도인 현행 '2표 병립형 혼합제'에서는 지역 지지기반이 탄탄한 한나라당과 민주당 중심의 거대 양당제(형식은 다당제)가 만들어지고 노동대중과 사회경제적 소외계층을 정치고객으로 하는 진보적 개혁 정치세력이 제도권 정치에 진출하는 게 어려워진다. 이런 정당구도 하에서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당을 찾지 못한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 등 사회적 약자 소외계층들이 머리띠 두르고 농성장 혹은 길거리와 광장으로 뛰어 나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지 않는가.

민주화 이후 한국 정당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지역과 냉전-탈냉전 분열 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미미하나마 사회경제적 차원의 이념 논쟁이 추가됐다.

이 기준에 비춰 볼 때 한국 정당스펙트럼의 양끝에 있는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은 분명하다. 즉 한나라당은 영남지역에 기반하고 보수계층과 노장년층을, 자유선진당은 충청도를 각각 지지기반으로 한 냉전적 자유주의 보수정당이고 민주노동당은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노동자 등 사회기층에 바탕을 둔 진보정당이다. 민주당의 경우 호남정체성과 젊은 개혁층에 기반을 두고 한반도 평화를 중시하는 탈냉전적 자유주의 개혁(진보?) 정당이다.

이처럼 87년 헌정의 정당체제는 대체로 이념적 구도에 기초하는 보수-중도-진보 정당체제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보수-중도 정당블록이 과도하게 공룡화된 데 반해, 진보정당은 과도하게 왜소화되어 있는 정당구조가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보수-중도 정당들이 선거정치와 의회정치, 특히 입법권의 독과점 현상을 의미한다.

한 꺼풀 벗겨 보면 신자유주의적 글로벌화가 가져온 노사 및 사회경제적 문제에 접근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간의 정책차별성은 관찰되지 않는다. 현 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은 2006년 국회에서 이른바 '친노의원'들의 주도에 의해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통과시켜 되레 비정규직이 양산됐고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도 한나라당과의 큰 이견 없이 동조했다. 최근 그들 정당 간에 비정규직법과 자유무역협정 등을 둘러싼 논쟁은 여 야의 공수(攻守)처지가 바뀌어서 발생한 것이지, 노사, 사회경제적 문제에 접근하는 본질적인 정책비전과 이념적 가치 차이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그들 정당들 간의 이념 논쟁은 냉전-탈냉전의 분열 축에서 햇볕정책, 국가보안법,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 대북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될 뿐이다. 이런 까닭에 정당 간 차이를 드러내는 가장 핵심적인 정책영역인 경제정책과 노동 및 사회정책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정책 지향성은 본질적 측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설령 차별화된 정책이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수사적 담론 수준에 머무른다.

대선과 총선을 전후해서 정치세력 간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이 변화무쌍하게 요동치며 정당체제가 개편되곤 한다. 하지만 그건 정책비전과 가치와 노선에 기반을 둔 정체성이 아니라 '선거 공학적 계산'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 정당체제가 개편되면 될수록 옛 모습의 정당체제로 닮아 간다. 지역에 뿌리를 둔 보수-중도 독과점 정당체제의 틀이 고스란히 복원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얘기이다.

최근 민주당은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중도개혁 실용주의를 현대화하고 성장에 방점을 찍은 '뉴민주당 플랜'을 발표했다. 흥미로운 것은 자유주의 보수정당의 챔피언인 한나라당과 청와대도 중도실용 친서민 정책 어젠다를 끄집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미소은행' '보금자리 주택' '등록금 후불제' 등 친서민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87년 헌정체제의 정당지형에서 사회경제 정책이 중도로 수렴화되는 실용주의 정당들의 '춘추전국 시대'가 도래하는 형국이다. 오월동주(吳越同舟)의 '뱃놀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럼에도 현재 사회양극화로 인한 서민과 중산층의 고통스러운 삶이 개선되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되레 악화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우리의 '서민과 중산층' 중도실용 정당들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도가 50%를 넘나들고 있는 것도 국민들의 착시 현상일지 모른다. MB 정부가 지금 내놓은 처방은 과거 전두환 노태우 군부정권 하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 정도로 과연 깊어진 사회양극화의 골이 메워 질 수 있을지 자못 회의적이고 너무 나이브한 발상이다. "위암 환자에게 소화제를 처방하는 수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중도 실용개혁 노선은 성장과 효율성과 경쟁력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기존 경제 질서를 대변하는 것 외에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87년 헌정체제 하에서 굳어진 지역 중심의 보수-중도 독과점 정당체제에서는 삶의 현장에서 몸부림치는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이슈가 정당의 정책경쟁에서 중요 정치적 어젠다로 떠오르지 않는다. 노동자 서민 중산층의 의사와 요구가 정치적으로 대표되는 게 쉽지 않다는 말이다. 외환금융위기 이후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소득불평등, 실업증가, 비정규직 차별, 빈곤 확산, 고용불안, 신용불량 등과 같은 글로벌 시장의 충격에 대응하는 데 정당정치 의회정치가 진지하고 치열한 토론의 장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들은 삶의 현장에서 몸부림치며 툭하면 길거리로 뛰어나가는 '운동정치'가 일상화되고 있지 않는가.

결국 87년 헌정 하의 한나라당과 민주당 중심의 보수-중도 독과점 정당체제는 영호남 지역구도 속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무소불위의 대통령 자리를 놓고 집권이냐, 정권장악 실패냐를 둘러싼 무한 대결정치, 상살(相殺)정치를 되풀이 하면서 의회정치를 실종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태의 책임을 정치인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과연 능력 있고 민주적인 리더십이 등장하면 87년 헌정체제가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 조정에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영웅적인 전설을 뿌린 김대중, 세상을 바꿔보자고 온몸으로 절규했던 노무현 등 두 전 대통령도 87년 헌정체제를 운영해 보았으나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조정 관리하고 사회통합과 사회경제적 양극화 극복에 성공하지 못했다. 아닌 말로 세종대왕께서 부활하여 87년 헌정체제를 운영해 봐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87년 헌정체제의 한계를 마냥 정치적 리더십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게 아닌가. 문제의 뿌리는 87년 헌정 시스템 그 자체에 숨어 있다. 따라서 이제야말로 우리 사회의 갈등조정과 한국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87년 헌정체제를 대체하는 합의제형 헌정체제로의 패러다임 시프트가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갈등을 조정하는 합의제형 헌정 공학

1) '2표 연동형 혼합제'

선거제도는 사회갈등이 정당체제에 반영될 수 있도록 매개해 주는 장치이다. 이 점에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지역주의 이외에 계층 노사 이념 환경 등에서 나타난 여러 갈등과 분열이 정당체제에 투사되게 하는 선거제도가 필요하다. 그 방향은 합의제형 선거제도인 비례대표제 강화이다.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는 지역에 기반을 둔 거대 보수-중도 정당들이 입법권을 독과점하는 현재의 구도를 깨고 다당제 하에서 정책과 가치에 따라 분화되는 보수-중도-진보 정당들이 입법권을 분점 공유하는 의회정치를 구현하는데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비례성을 강화하는 두 선거제도가 검토될 수 있겠다. 우선 민주당이 선호하는 중대선거구제이다. 중대선거구제는 한 선거구에서 2~5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준비례대표제의 성격을 띠고 있어 특정 정당의 지역별 의석 싹쓸이 현상을 완화하고 탈지역주의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하지만 이 제도 하에서는 종친회 동창회 등 사조직을 결집시켜 불과 5% 이하의 득표율로도 당선자가 나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려 보라. 어떻게 그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더 큰 문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각각 영호남에서 의석 싹쓸이를 완화하는 대가로 지역중심의 낡은 보수-중도 독과점 양당체제를 심화시킬 우려가 없지 않다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대안으로 소선거구 다수대표제(50%)와 권역별정당명부 비례대표제(50%)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독일식 2표 연동형 혼합제가 고려될 수 있다(제1편 참조). 이 제도는 정당투표가 각 정당의 의석수를 결정하기 때문에 진보정당의 국회 의석수를 늘려 현행 지역 중심의 보수-중도 독과점 정당체제를 해체하고 정책과 가치에 따른 다당제 하의 균형 잡힌 보수-중도-진보 정당블록 구도를 만들어낼 개연성이 높아진다. 예컨대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를 가졌던 뉴질랜드는 독일식 선거제도를 채택하여 1996년 총선 이후 6개의 주요 정당을 의회에 진출시켜 균형 잡힌 보수-중도-진보 구도의 다당제를 창출하고 있다.

독일식 선거제도 채택을 가정하고 18대 총선에 나타난 정당별 득표율로 의석수를 계산해 보면, 한나라당의 정당 득표율은 37.5%였으므로 112석, 민주노동당의 정당 지지율은 5.7%였으므로 17석을 얻게 된다. 한나라당은 41석이 줄고, 민주노동당은 12석이 늘어난다. 독일식 선거제도를 실시할 경우 유권자들이 선호하는 정당투표가 더욱 강화돼 군소정당에 유리한 선거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게 17~18대 총선결과에 대한 시뮬레이션에서 확인되고 있다.

물론 독일식 2표 연동형 혼합제는 현재의 다당제를 더욱 확대하여 국정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저해하는 등 한국 대통령제와 조응하지 못하는 선거제도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이는 정부형태를 의원내각제로 변경해야 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대통령제와 선거제도 사이에 논리적 필연성은 없다. 선거제도는 반드시 정부구조에 예속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경험적으로 게르만유럽 국가들의 의원내각제는 비례대표제를 선호하지만 영국 의원내각제는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또 동일한 대통령제를 채택하면서도 미국은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를, 코스타리카 우루과이 포르투갈(준대통령제)은 모두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각각 채택하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 대통령제 하에서도 독일식 2표 연동형 혼합제를 채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런 제도적 조합이 한국 대통령제의 승자독식 논리를 완화하는 제도적 장치를 총선에서 강구하는 효과가 발생할 것이다. 즉 독일식 선거제도는 패권정당을 허용하지 않는 다당제를 만들어 놓기 때문에 여러 정당들 간의 정책경쟁 과정에서 협조가 아니면 파국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정당 간의 의정활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상호 대화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균형 잡힌 보수-중도-진보 정당체제

유럽 합의제형 헌정 국가들에서는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가 다양한 사회갈등과 분열을 대표하면서 정책과 가치에 따라 경쟁하는 '다당제 하의 보수-중도-진보 정당블록구도'를 만들어낸다. 며칠 전 독일 총선 결과에서도 이 구도가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즉 보수정당인 자민당의 약진(93석), 중도보수당인 기민당 패배(239석), 중도진보당인 사민당 참패(146석)로 나타났으나 좌파정당(76석)과 녹색당(68석)이 역대 최고의 성적을 기록해 진보 정당블록은 아직도 건재하고 있음을 과시했다.

한국민주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최대 과제 중 하나는 현 지역중심의 정당체제를 사회경제적 이슈를 투영하는 정당체제로 재편성하는 문제이다. 즉 소득불평등 실업 비정규직 빈곤 복지 교육 의료 주택 환경 저출산 고령화 등 보통사람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둘러싼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요구에 따른 갈등과 분열이 대표될 수 있도록 하는 정당체제의 민주화 프로젝트이다. 이건 보수-중도 독과점적 정당체제를 해체하고 균형 잡힌 보수-중도-진보 정당체제를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논의한 독일식 2표 연동형 혼합제를 채택하면 그 가능성의 길이 열린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내부에는 각각 '머리'는 진보적이나 '몸'은 보수적으로, '생각'은 보수적이나 '행동'은 진보적으로 하는 인사들이 상당수 몸담고 있다. 거칠게 말하면 이념적으로 '만물상 정당'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역 정당체제에서는 지역에서 국회의원 당선 가능성에 따라 정당을 선택해야 되는 게 정치인들의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식 정당명부식 선거제도에서는 정당득표율에 따라 정당의 의석수가 결정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을 비켜 갈 수 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책비전과 지향가치 등 색깔에 따라 정당정체성을 보고 보수 인사는 보수정당으로, 중도 인사는 중도정당으로, 진보 인사는 진보정당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색깔'에 따라 교통정리가 되면 자연스럽게 보수-중도-진보 정당체제가 구축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합의제형 헌정의 정당체제를 구축하는 데 있어 중요한 포인트는 한나라당 민주당 등 기존 정당에 몸담고 있는 진보 개혁세력이 과감히 탈출하여 창당하거나 혹은 정당 통폐합을 해서라도 정치권에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는 것이다. 이는 진보 정치세력이 강력한 사회적 기반에 뿌리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새롭게 탄생한 진보정당이 지금까지 정치에 제대로 대표되지 못했던 비정규직 극빈자 실업자 차상위계층 신빈곤층 고령자 장애인 영세자영업자 중소기업 신용불량자 등과 같은 우리 사회의 소외 및 배제세력들은 물론이고 현재 흔들리고 있는 중산층이 정치의 중요 행위자로 참여하게 해 주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87년 정당체제는 형식적으로 다당제이나 실제에 있어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중심으로 지역에 기반을 둔 거대 양당제이다. 한국 정치에서 정권교체를 실현하거나 정부 내각 구성에 참여하는 정당은 언제나 두 개의 거대 정당 중 하나에 한정된다는 점에서 그렇게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거대 양당제가 대통령제와 조합되고 있다. 바로 여기에 87년 헌정체제의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 물론 정치권과 학계 일부에서는 대통령제 하에서 정치안정과 효율성이 주요 가치로 존중되면서 양당제를 선호하고 다당제가 극도의 정치 불안정을 야기하는 '죽음의 키스'를 초래할 있다는 우려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거대 양당제와 대통령제가 조합될 경우 대통령 선거는 사활적인 제로섬 게임으로 전개돼 지역주의와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제3당의 건강한 발전과 육성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제약한다.

더욱이 현재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가치와 이익이 존재하고 이로 인한 갈등과 분열이 동시다발적으로 분출하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보수-중도 거대 양당제는 이러한 다양한 이슈와 이해관계를 대표하고 관리 조정하는 정책프로그램을 제시하는 데 커다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두 거대 정당은 선거에서 득표만을 겨냥해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해서 정당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듣기 좋은' 백화점식 정책을 무차별적으로 나열할 뿐이다. 정당이란 본래 '부분'을 대표하는 것인데도 한국의 두 거대 정당들은 우리 사회에 다양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국민 모두를 대표하는 것처럼 열변한다. '전체주의' 정당이라도 되겠다는 것인지 착각을 일으킨다. 결국 그건 누구도 제대로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민사회와 시장의 다양한 이익과 갈등을 대표하고 정책차별성을 드러낼 수 있는 실질적인 다당제로 전환되는 게 민주주의의 원리와 가치에 부합한다. 결론적으로 다당제 하의 균형 잡힌 보수-중도-진보 정당블록 구도가 '포스트 87년 헌정'의 정당체제 개혁 방향이다.

3) 기대효과

그렇다면 다당제 하의 균형 잡힌 보수-중도-진보 정당체제는 어떤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을까? 우선 지역주의 정치를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노무현 정부의 지역균형발전정책과 인사탕평책이 지역주의 정치를 완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지역 중심의 개발정책은 되레 중앙정부의 예산과 개발이익을 둘러싸고 특정지역에 연고를 둔 정당 간, 지방정부 간에 긴장과 대립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인과론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지역주의 정치는 사회경제적 욕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없는 한국의 낡은 정치적 대표체제, 즉 지역에 기반을 둔 보수-중도 독과점적 정당체제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이 점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단순히 의석분포 상 전국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은 지역주의 정치의 본질을 보지 못한 대증요법이지 원인요법이 아니다. 오히려 그건 보수-중도 독과점적 정당체제를 강화할 우려가 없지 않다.

따라서 지역주의 정치를 완화하는 해법은 현재의 '탈계급적 탈계층적 지역' 중심의 정당체제를, 계급적 계층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탈지역적 계급 계층' 중심의 정당체제로 대체하는 데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지역 내부의 유권자가 자신의 계급 계층 귀속에 따라 정책프로그램을 보고 정당을 선택할 개연성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당제 하의 균형 잡힌 보수-중도-진보 정당체제가 이에 부응할 수 있다.

둘째, 보수-중도-진보 정당 간에 입법권 분점 공유를 가져와 진정한 정책경쟁 구도가 마련될 수 있다. 부연하면 '먹고 사는' 문제가 우리의 선거정치, 정당정치, 의회정치에 주요 담론과 정책 어젠다로 떠오르고 이에 관해 진지하고 심도 있는 토론과 정책경쟁이 이뤄질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정책비전과 가치 중심의 정체성을 갖는 진보정당의 육성은 점점 깊어만 가는 사회경제적 양극화에 따른 계층 노사 갈등, 교육 환경 저출산 고령화 등 새로운 사회적 위험과 갈등을 대표하고 정당 간 정책경쟁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당제 하의 균형 잡힌 보수-중도-진보 정당체제는 파트너십과 정책네트워킹에 기초하는 노사정 거버넌스 시스템의 작동에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진보정당이 노동대중과 사회경제적 소외계층으로 하여금 '길거리 정치' 유혹을 뿌리치게 하도록 해 사회적 대화 및 협상 테이블로 끌어드리는 데 공헌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은 글로벌 시장의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노사정 거버넌스 시스템을 작동시키고 있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요인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진보정당과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보수정당이 균형 있게 편성되어 있는 정당지형이다. 예컨대, 스페인의 노사정 거버넌스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작동한 것은 노사갈등을 대표하는 균형 잡힌 진보-보수 정당체제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스페인 사민당은 집권하는 동안 매우 과격했던 노동운동을 '온건과 절제'의 전략적 행동으로 바꿔 신생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5 합의제 헌정체제의 첫 단추인 선거제도 개혁은 어떻게?

"바보야, 문제는 선거제도야" 그렇다. 선거제도야말로 정당체제와 권력구조의 초석이며 궁극적으로 한 나라의 민주주의 발전 모델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지렛대이다. 이 점에서 합의제형 헌정체제를 구축하여 한국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첫 단추는 독일식 '2표 연동형 혼합' 선거제도라 고 말하지 않을 수 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아래 단추도 잘 못 끼워지는 게 만사 이치가 아닌가.

하지만 만일 독일식 선거제도로의 개혁을 추진한다면 그건 정당 및 의원 개인별 손익 계산이 얽히고설킨 매우 '파란만장한' 어려운 과정이 연출될 게 분명하다. 그들은 선거제도 개편 문제에 대면할 때 선거 이후 자신들의 정치적 지분이 줄지 않기를 바라는 정략성, 아니 어쩌면 정치적 생명줄이 왔다 갔다 하는 사활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할 때 선거제도 개혁을 정당 및 정치인들의 손에만 맡기는 것은 되레 개악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축구 선수가 게임 룰을 만들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일종의 정치적 아웃소싱을 통해서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게 바람직하다. 1993년 뉴질랜드는 독일식 선거제도 변경을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한국도 선거제도 개혁의 중대성을 감안해서 이를 국민투표의 주요 안건으로 회부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해 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학자, 시민단체, 정당 등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초정파적 사회합의형 선거제도개혁위원회를 구성하는 게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향후 시민운동 단체들이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발품을 팔아야 한다. 선거철에 후보자 개개인의 도덕성 검증 및 자격요건을 따지는 것보다 선거제도 개혁에 온몸을 던지라는 말이다. 노동운동도 진정으로 생존권 투쟁을 하려면 임금과 같은 단기적 이익을 챙기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는 것보다 선거제도의 개혁에 관심을 갖고 전력투구하기를 권고 싶다.

필요하다면 2008~09 촛불의 감동과 시민정치운동이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다시금 불타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권에 압박과 충격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울 수 있다는 비장한 각오로 지역에서 풀뿌리 운동을 하는 지역단체들과 시민사회단체, 진보운동 단체들, 그리고 야당과 진보정당까지 포괄하는 선거제도 개혁 연합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면 합의제형 헌정체제 구축과 한국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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