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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체육회의 폭력 예방…'맞을 짓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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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체육회의 폭력 예방…'맞을 짓 하지 마라'?"

[정희준의 '어퍼컷'] 폭력을 버릴 수 없는 체육계

18일 배구 국가대표 박철우 선수 폭행 사건이 터지자 박용성 대한체육회장은 가해자인 이상렬 코치의 형사고발을 주장하며 만약 "배구협회에서 고발하지 않으면 나라도 형사 고발하겠다"는 불퇴전의 각오를 밀어붙인 끝에 결국 관철시켰다.

23일 박 회장은 대한체육회 주최 '스포츠 인권 보호 가이드라인 공청회'에서 "폭력으로 따낸 메달은 차라리 못 따도 상관없다"면서 "내가 있는 한 폭력으로 징계를 받은 지도자는 풀어 주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폭력에 찌든 한국스포츠를 구출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박철우 선수를 폭행한 이상렬 코치를 태릉선수촌장 명의로 형사고발한 것은 전적으로 회장의 뚝심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체육회의 시스템이 작동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 그 과정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박 회장의 추상 같은 지시를 받은 체육회는 배구협회에 이상렬 코치를 형사고발할 것을 요구했는데 배구협회는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결국 태릉선수촌장이 폭행 코치를 고발해야 했다. 배구협회는 사실상 저항한 것이다.

폭력 척결에 저항하는 체육계

비근한 예가 또 있다. 작년 12월 펜싱 국가대표팀의 이석 코치는 김승구 선수를 폭행해 무기한 '자격 정지'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박 회장의 폭력 추방 의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펜싱협회는 폭행 코치에 대한 징계 해제를 체육회에 요구하며 구명 운동을 벌였고 동시에 폭행 코치는 체육회의 징계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하는 천하의 뻔뻔스러움을 보여주었다.

그때 가해자인 이석 코치는 박철우 선수가 당한 것보다 더 심하게 김승구 선수를 폭행했다. 주먹질, 발길질은 물론 재떨이, 원목테이블 등 '연장'까지 휘두르며 폭행해 김승구 선수는 피까지 흘렸다. 그런데 펜싱협회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아시는가. 가해자는 사표를 수리하는 것으로 끝내고 피해자인 김승구 선수를 자격 정지시켜버렸다. 결국 대한체육회가 나서서 가해 코치를 징계해야 했는데 체육회도 폭행 코치를 제명하지 못하고 무기한 자격정지로 마무리했다. 적당한 때에 다시 복귀한단 얘기다. 폭행 코치 이석 씨의 아버지가 펜싱협회의 실권자인 이광기 부회장이란다.

이렇듯 각각의 이해관계로 똘똘 뭉친 산하 50여 개 가맹단체들은 박 회장의 폭력 추방 드라이브에 틈만 나면 시비를 걸고 저항할 것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저항이 있다. 산하 단체나 현장의 체육인이 아닌 바로 대한체육회 내부의 저항이다. 이번에 이 코치에 대한 형사고발은 박 회장이 '진노'한데다 사건이 워낙 커져서 체육회도 박 회장의 지시를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회장님' 지시를 항상 고분고분 열심히 수행할 것이라 예측하는 것은 속단이다.

대한체육회, 정체를 밝혀라

▲ 대한체육회 박용성 회장. ⓒ뉴시스
현재 체육계 최대, 최급의 과제는 두 개다. 바로 학생 선수들의 수업권 보장과 폭력 및 성폭력 추방.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가지 개혁안이 사실은 체육계가 가장 심하게 저항하는 사안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아니라면 상당수) 체육인들은 지금도 이 두 가지가 왜 그렇게 문제가 되는지 이해를 못 한다. 이들은 운동은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고 '그럴 수도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폭행 사고가 터졌을 때 많은 체육인들은 '잘못했다' 보다는 '너무 심하게 때렸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한체육회 내 일부 구성원들 역시 이 두 사안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밖에서 워낙 '심각하다'고 하니까 '그런가?' 하는 정도이고 계속 비난이 쏟아지니까 하는 수 없이 나서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이 두 가지 문제 해결을 위한 개혁을 훼방 놓기도 한다. 이는 체육회가 한국 체육의 미래를 고민하고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각 협회의 이해관계와 현장 체육인들의 요구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빚어진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례를 들어보자. 2~3년 전 학생 선수들의 수업참여를 보장하라는 사회적 요구가 비등해지던 시기, 이러한 체육계의 문제들을 시정하기 위해 발족한 자정운동본부의 본부장이란 사람은 참석하는 토론회, 공청회마다 "학생 선수들은 운동만 하기 원하는데 이들에게 공부하라는 것이야말로 인권 침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다녔다. 그가 하도 여기저기서 이를 주장하고 다녀 많은 이들은 이것이 대한체육회의 공식 입장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그는 체육계에 빈발하는 성폭력에 대해서도 가해자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운동 선수가 공부하면 세계적 흐름에 역행?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는 '착각'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학생 선수들은 운동만 해야한다'는 주장은 어느새 대한체육회의 공식 입장이 되어 있었다. '황당한 저항'도 계속 하니 먹히나 보다. 지난 8월 박용성 회장이 모 일간지에 칼럼을 기고했는데 박 회장은 몇 년 전 그 자정운동본부장이 주장했던 것과 동일한 주장을 했다. 그는 학생 선수들도 공부를 병행하게 하려는 국회의원들의 입법 노력을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 규정하면서 '운동하는 아이들은 운동만 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까지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학생 선수들의 수업 참여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왔건만 박용성 대한체육회장은 이들의 오랜 노력을 하수구에 쏟아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학생 선수들 수업권 보장에 대한 대한체육회의 입장은 명백해졌다. 애들 수업 들여보내기 싫다는 거다. 공부하지 말라는 거다. 이렇게 해서 운동 선수들도 공부하는 세상은 이제 포기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는데…. 그렇다면 체육계 폭력 근절은 제대로 진행될 것인가.

체육계 폭력과 성폭력 추방, 기대할 수 있는가

폭력 근절에 대한 체육회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작년 3월 폭력 추방을 위해 국가인권위원회와 체결했던 협약을 1년도 안 돼 스스로 파기한 데서도 나타난다. 스포츠계의 폭력 및 성폭력 문제가 심각한 수준임을 드러나자 2007년부터 국가인권위원회는 대응 방안 마련에 나섰는데 2008년 체육계 성폭력 사례들이 폭로되자 비난 여론에 밀린 대한체육회는 국가인권위와 '스포츠 분야 인권 향상을 위한 공동 협약'을 맺게 된다. 그러나 몇 달 후 인권위가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해 사회적 파장이 일자 체육회는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기다렸다는 듯 협정서를 휴지통에 처박았다. 인권위에 고마워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체육회는 자기들 망신 줬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협정을 파기한 것이다.

체육회는 이후 독자적으로 폭력 근절 방안 마련에 나섰는데 제대로 된 전문가 집단의 도움 없이 제대로 진행될 리 만무하다. 그 결과가 23일 '스포츠 인권 보호 가이드라인 공청회'에서 내놓은 '안내 책자'들에 담긴 '가이드라인'이다. 나름 오랜 노력 끝에 나온 결과물인 줄은 알겠으나 가이드라인이라 하기에는 좀 민망한 수준이다. 그리고 아무리 들여다봐도 '인권 보호'라기 보다는 '가해자 보호'를 위한 장치로 밖엔 안 보인다.

우선 개괄적 수준에서의 문제점 몇 가지. 첫째, 가이드라인이 태어나게 된 배경, 의미, 목적 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체육인들의 공감대 형성이나 인식의 전환은 애당초 바라지 않았다는 게 된다. 둘째, 정신이 없다. 이렇게 복잡하고 상충되는 내용이 연이어 등장하는 '안내 책자'는 처음 본다. '안내' 받다가 되레 길 잃겠다. 셋째, 공포심 조장에 근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지막에 "폭력은 심각한 범죄 행위로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파괴합니다"라는 문구가 큼직하게 씌어 있다. 그래서인지 넷째, 가이드라인 대부분은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등 온통 '하지 마라'로 채워져 있다. 그러니까 가이드라인의 내용을 축약해 보면 '걸리면 × 돼'라도 보아도 무방하다.

'폭력 예방 가이드라인'인가 '폭력 가이드라인'인가

세부적 내용을 들여다보면 현재 대한체육회의 폭력에 대한 인식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 놓여 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선수 폭력 예방 리플렛'의 '1. 선수 폭력이 무엇인가요?'의 항목 중엔 '아래의 경우는 폭력이 아니에요'라는 설명이 있는데 여기서 대한체육회의 '폭력관'을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로 장난치면서 가볍게 치는 것, 단순한 욕설, 물건을 훔치는 것, 상대방에게 입힌 상처가 매우 가벼워 치료할 필요가 없으며 치료를 받지 않더라도 생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으며 자연히 나을 수 있는 정도인 경우"는 폭력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 앞으로 욕설은 '복잡'하게 하고 때릴 땐 좀 귀찮더라도 '장난'을 치면서, 그리고 병원에 실려가지 않을 정도로만 팬다. 이쯤 되면 '폭력을 위한 지침서' 아니겠나.

또 있다. '2. 선수 폭력, 어떻게 예방할 수 있나요?' 의 '➀폭력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을 보면, '폭력은 범죄'라 하면서도 '☞ 필요할 경우 지도자의 허락을 받고, 지도자가 있는 자리에서 합니다'라고 설명한다. 도대체 폭력을 하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박철우 선수를 폭행해 문제가 된 이상렬 코치도 김호철 감독이 있는 자리에서 폭행했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라는 얘긴가. 그리고 이 어처구니 없는 항목의 참 뜻은 감독이 허락하면 선수가 다른 선수를 구타해도 된다는 말이다.

▲ 세부적 내용을 들여다보면 현재 대한체육회의 폭력에 대한 인식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 놓여 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한체육회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제까지 폭력 및 성폭력의 주체, 즉 가해자는 대부분 지도자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가이드라인은 유난히 선수들에게 요구하는 게 많다. '➁ 폭력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이라는 항목이 전하는 메시지는 사실상 '맞을 짓 하지마라'는 것 아닌가. 그 세부 내용이 그러하다.

'폭력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예의바른 태도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하고 '오해할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하거나 표정을 짓지 말아야 하며, 흉보거나 험담해서는 아니' 된다. '평소에 지나치게 튀는 말이나 행동 또는 복장은 삼가 해야' 하고 '동료, 선후배, 지도자에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신속히 사과'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언행에 대해 다른 사람이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하면 해명'해야 한다.

게다가 폭력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평소 폭력을 자주 행사하는 선수 또는 그럴 가능성이 높은 선수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하고 (지도자는 괜찮고?) 또 '평소 범죄가 자주 일어나거나 일어날 우려가 있는 장소'에는 가지 않아야 한단다. (결국 운동부 근처엔 얼씬도 말라는 이야기 아닌가?) 하여튼 체육계에서는 '폭력을 당하지 않기'가 이렇게 힘들다.

'인권 보호'가 결국 '가해자 보호'였나

이 가이드라인을 보면서 안타까운 점이 여럿 있지만 전문가 집단의 도움 없이, 의견 수렴을 위한 공청회조차 생략하고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졌다는 점은 치명적이었다. 그러다보니 인권과 폭력에 대한 인식조차 부재한 가이드라인, 실질적이고 명확한 행동 지침이 보이지 않는 애매한 가이드라인이 탄생했다. 또 다른 하나는 대한체육회의 역할과 책임과 의무는 보이지 않고 일선 지도자와 선수들의 책임만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특히 폭력 행위 발생시 그 책임을 피해자, 즉 선수들에게 물으려는 듯한 항목들이 유난히 많아 보인다. 체육회는 정녕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인가.

대한체육회가 통렬한 자기 반성과 획기적 인식의 전환 없이 계속해서 여론무마용 방안을 고집하게 되면 체육회는 그 자리를 맴도는 쳇바퀴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제까지 체육회가 내놓은 무수한 폭력 방지책 중 제대로 작동하는 게 하나라도 있던가. 이번 인권보호 가이드라인의 경우만 해도 체육회는 고생은 되더라도, 또 조금 자존심 상하더라도 한번에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을 배제하고 일을 하더니 결국 엉뚱하게 '안전한 폭력을 위한 지침서'가 탄생했다.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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