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님인데요, <조선일보>가 항소를 포기할 것 같네요. 이제 끝난 것 같아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조금 뒤 한 신문에 <동아일보>와의 소송에서도 스님이 이겼다는 뉴스가 떴다. 불과 20여 분 사이에 전해진 두 소식은 지율 스님이 지난 3년간 매달려온 기나긴 작업의 끝을 알려주었다. 스님은 그동안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들에 대하여 언론중재위원회가 명령한 정정 보도를 받아냈고, 이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대한 민사소송에서도 모두 이겼다.
<조선일보>로부터는 'A2면 제목 크기 20포인트의 정정 보도'와 '위자료 10원'을 받아내게 되었고, <동아일보>한테는 700만 원의 명예 훼손 배상금을 받게 됐다. 무엇보다 스님은 "밥 굶고 생떼 쓰면서 1년 이상 국책공사 중단시키고, 나랏돈 2조5000억 원을 말아먹은 요승(妖僧)"이라는 마타도어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 한 연구원의 악의에 찬 엉터리 계산에서 시작된 '2조5000억 원 손해' 논리는 받아쓰기가 특기인 보수 언론들에 400회 이상 기사화되면서 졸지에 상식이 되어버렸다. 불의에 항거하는 일에는 한 끼도 굶어본 적이 없는 이들, 불의는 무조건 참고 불이익에는 벌떼처럼 일어서는 작자들이 스님을 조롱하고 폄훼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스님은 단식으로 인한 고통보다 이런 류의 조롱과 악선동, 그로 인한 사회적 양심의 위축을 훨씬 더 괴로워했고, 3년 전 주변 사람 모두가 말렸지만 이 일을 시작했다. 스님은 3년 내내 이 일에 매달렸고, 변호사의 도움 없이 '나 홀로 소송'으로 끝내 이 소중한 승리를 일구어낸 것이다.
그간 벌어진 일들
▲ 지율 스님. ⓒ프레시안 |
그 시간동안 나는 스님의 말소리와 몸짓, 태도 속에서 간절한 사랑과 희생의 열기를 느꼈다. 조금의 과장 없이 표현하건대, 그것은 자식을 감옥이나 사지(死地)로 내보낸 어머니의 다급하고도 절절한 마음 같은 것이었다. 밀양으로 가는 기차를 놓치고, 어느 수련원으로 옮겨 밤늦은 시간까지 진행된 토론을 지켜보다 잠든 나는 새벽녘에 밀양으로 가는 첫차를 타기 위해 깨었을 때 스님이 그 시간까지도 잠들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스님은 초면인 나에게도 '도와 달라'는 간절한 부탁의 인사를 전했다. 가까운 곳에 살긴 하지만, 그 사안에 관한 한 국외자로 머물 수도 있었던 나는 그 순간 이후로부터 천성산 터널 반대 운동의 작은 부분이 되었다. 이 싸움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은 스님의 고행 속에는 세상에 넘쳐나는 폭력과 맹목들을 '어쩔 수 없다'고 용인하면서, 내심 세상의 타락을 즐기며 살아온 우리들 모두의 죄의 업연이 서려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스님의 투쟁은 일상적인 환경운동의 지평을 넘어서, 파멸로 치달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지율 스님은 마지막 120여 일간의 5차 단식 끝에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리고 2006년 6월 2일, 2년 8개월을 끌어온 이른바 '도롱뇽 소송'은 대법원의 기각 결정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스님은 살아났지만, 천성산은 13.5킬로미터의 종단 터널이 뚫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지율 스님이 국책 공사를 통째로 중단시키려고 생떼를 쓴 걸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스님의 주장은 일관되게,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환경영향평가'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오직 그 한 가지였지만, 그마저도 수없는 파행을 겪어야 했다. 그 파행의 전모를 일일이 밝힐 여유는 없지만, 딱 두 가지만 짚어보자.
경부고속철도 경주-부산 구간 환경영향평가서는 1992년에 작성되었다. 그런데 천성산 원효터널 공사는 2004년 시작되었으므로, 환경영향평가서 작성 이후 7년 이내에 공사를 착공해야 하는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그 사이 천성산 고산습지 여러 개가 습지보존구역으로 새로 지정되었고, 보호 대상 동·식물이 계속 발견되었다.
애초 작성된 환경영향평가서의 부실함이 이렇게 명백해짐으로써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실시하는 것은 극히 당연했다. 그런데 대법원 결정문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환경영향평가서는 1992년 작성됐고, 환경영향평가법이 1993년이 제정된 후 철도시설공단은 환경부로부터 확정된 협의 사항을 1994년 11월에 통보받았지만, 그 시점으로부터 7년이 지나기 전인 2000년 12월 노선 구간 안에 있는 '부산역사 증축공사'를 착공했으므로 7년 이내 착공 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부산 끝편 바닷가에 있는 부산역사와 거기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양산 천성산 터널 공사가 환경적으로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으로 겨우 3개월간의 민관 합동 환경영향평가가 실시되었다. 양측의 엇갈림은 여전했지만, '물 한 방울 새지 않는다, 환경에 아무 영향이 없다'는 철도시설공단의 주장은 이미 뿌리가 뽑혔다. 그리고 이미 공사 현장 근처에는 심각한 물 빠짐이 확인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법원은 이 결과를 하나도 반영하지 않고 애초의 환경영향평가 보고서('물 한 방울 새지 않는다'는 그 유명한 대한지질공학회 보고서)와 환경부 주도의 사흘간의 재조사로 충분하므로 아무 하자가 없다고 판시했다. 이 3개월짜리 환경영향평가를 위한 350여 일의 단식과 41만 명 '도롱뇽의 친구들', 90여 명의 국회의원들과 국무총리의 중재, 그 모든 노력들은 대법원 입장에서는 아무 쓸데없는 짓이었다.
언론과 정치인들의 파상 공세
죽음 직전에서 되살아난 스님을 기다린 것은 언론과 정치인들의 파상공세였다. 그리고 수없는 안티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지율 스님이 언급된 모든 공간들을 찾아다니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들을 했다. 만약, 지율 스님이 내원사 산감이라는 한직이 아니라 종단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승려였다면, 아니 그저 스님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기만 했더라도 그렇게 함부로 공격당하고 매도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법정 스님, 도법 스님, 수경 스님, 모두 스님인데 유독 지율 스님에게만은 '지율'이었다. '스님'이라는 호칭이 아깝다는 듯이. 우리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여성 한 분의 단식으로 수십조 원의 예산이 낭비되었다"고 했고,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유력 정치인 유시민은 "스님이 밥 굶으면 공사를 중단하는 나라에서 제대로 된 리더십은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출가하기 전까지 <조선일보> 애독자였으며, 천성산 일로 산문 바깥으로 나오기 전까지 십수년간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고 있던 스님에게 이런 류의 악선동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스님은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 "누군가처럼 이 세상에 소풍 온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 같다. 스님은 도롱뇽을 조롱하고, 자신에 대한 악랄한 선동으로 넘쳐나는 자료들을 모으고 분류하는 일을 하다 보면 몸이 견딜 수 없이 아파온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빠뜨리지 않고 덧붙이는 말이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누가 싸울 용기를 내겠는가"는 이야기. 스님은 이것 때문에 지난 3년간 싸운 것이다.
지금, 스님은 자전거를 타거나 걸으며 낙동강을 혼자 수없이 오르내리고 있다. 낙동강 700리길 전체를 완주한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수없이 사진을 찍고, 항공사진을 이어 붙여 물길 지도를 만들고, 지인들에게 자료를 보낸다. 4대강 정비 사업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강가에는 어머어마한 포클레인과 트럭들이 모래를 퍼내고 제방을 쌓고 있노라면서, 그 아름다운 풍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며 주저앉아 통곡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물길을 걷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4대강 정비 사업이 시작된다. 스님은 아마 지금처럼 수없이 낙동강 물길을 걸으며 기록하고, 아파하고, 그리고 기도할 것이다.
천성산 싸움은 끝내 패배했지만, 거기에 바쳐진 고귀한 희생마저 함부로 꺾고 조롱한 자들과 맞서 스님이 일구어낸 이 승리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이것을 되새기는 것은, 지금 4대강 정비 사업이라는 전대미문의 거대한 파괴 앞에서 그러나 한없는 무력감으로 뒤척이는 우리에게 큰 용기를 불러 일으켜줄 것이다.
지난 시절, 지율 스님이 천성산 싸움의 도정에서 남긴 한 글귀를 음미하면서, 억겁의 세월을 흘러온 물길을 지키는 새로운 투쟁의 시작을 맞이하자.
불과 20년 전만 해도 우리 국토는 따뜻하고
공기는 투명하고 물은 맑았습니다.
얼마 전 이곳 시청 앞에서 피부병투성이의 쥐 한 마리를 보았는데
바로 그 피부병투성이의 쥐가
미래의 우리 아이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웠습니다.
누구도 아니라고 하지 못하는 시점에 와 있으면서,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슬픈 산하의 모습을
저는 이곳에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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