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경영권 승계, 대법원 판결로도 68.2% 불법
일부 언론은 대법원 다수의견에 의한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사건 무죄확정을 '삼성 경영권 승계'의 합법성 획득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에 의하더라도 에버랜드의 합법성은 6대5로 몹시 취약하다. 54.5%의 합법의견에 45.5%의 불법의견이 붙은 아슬아슬한 합법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영권 승계과정의 또 하나의 무리수, SDS BW(신주인수권부사채) 헐값 발행 사건은 대법원에서 10대1 혹은 91%의 압도적 비율로 유죄가 인정됐다. 실제로 두 배임사건의 법적 평가를 평균할 때 삼성경영권승계는 고작 31.8%의 합법성 혹은 68.2%의 불법성으로 얼룩져 있다. 그렇다면 이를 합법성 획득으로 치장하는 건 명백한 허위광고다.
위의 종합성적표가 말해주듯이 삼성의 경영권승계는 대법원에서도 종합적 불법판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경영권승계는 아무런 차질 없이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룹지배의 황금열쇠, 이재용 남매의 에버랜드 지배지분이 가까스로 합법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에버랜드에 대한 6대5(54.5%) 무죄판결 탓에 대법원은 결과적으로 삼성경영권 승계를 합법화해 준 셈이 됐다. 확실하게 불법유죄로 기운 종합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나름대로 체면을 건졌다는 일부 평가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이 삼성의 높은 벽을 뛰어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재벌의 편법상속 통제를 중점개혁과제로 선정한 김대중 정권, 그러나…"
삼성 무세(無稅) 세습 스캔들에 대한 미온적 수사기소와 실질적 면죄부 부여는 지난 10년 개혁진보정권의 성과와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2003년 검찰이 에버랜드를 일부기소한 점과 2009년 대법원이 SDS를 10대1 유죄 판결하고 에버랜드 유죄의견이 단지 한 표 모자란 건 성과라면 성과다.
그러나 지난 10년 개혁정권의 집권기간 중 검찰이 SDS 저가발행을 여섯 번이나 불기소하며 계속 봐주고 에버랜드 '몸통'을 수사조차 못한 점과 대법원이 경영권승계의 중추인 에버랜드 사안에서 반개혁적 다수의견을 낸 것, 그리고 삼성무세세습스캔들을 계기로 본격적인 재벌특권 해소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점은 명백한 한계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배임죄 처벌공론화는 1997년 봄 이래 꾸준히 이어졌다. 43인의 법학교수들이 공식고발장을 제출한 것도 9년 전인 2000년 6월 29일이었다. 재벌의 편법상속 통제를 재벌개혁 8대과제의 하나로 자리매김한 김대중 정권의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 그리고 경제검찰 수장들은, 하지만 삼성사건을 한사코 외면했다.
특검수사는 검찰의 10년 직무유기에 대한 국민탄핵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정권이 2기 민주정권으로 출범했다. 그 때문인지 검찰은 에버랜드 배임사건을 수사했다. 에버랜드 저가발행은 경영권무세승계 시나리오의 포석 중 하나일 뿐이지만 검찰은 고발이 안 된 나머지 포석들에 대해선 철저히 눈감았다. 그나마 몸통은 조사하지 않았다. 에버랜드 검찰수사는 그 결과 전문경영인들의 단독범이라는 사실왜곡으로 끝났다. 머슴이 주인 몰래 주인 갈아치우는 것 봤느냐는 우스개 소리가 회자됐다.
2003년 12월 공소시효를 하루 앞두고 허태학 사장 등 이른바 깃털을 기소하며 검찰은 곧 이 회장도 조사할 것처럼 기세를 올렸다. 그 후에도 검찰은 2005년의 1심 유죄판결 직후, 그리고 2007년의 2심 유죄판결 직후 각각 이 회장 소환조사계획을 밝혔다. 모두 말뿐이었다. 시민사회가 끈질기게 이 회장 소환조사를 요구했지만 참여정부의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들은 눈을 가리고 귀를 닫았다.
검찰의 오랜 직무유기국면을 타개한 건 삼성비서실 법무팀장 출신 김용철 변호사의 역사적인 양심고백이었다. 김용철 변호사는 검찰의 직무유기가 삼성이 철마다 쥐어준 떡값에 영혼을 판 결과라는 충격적인 사실도 알려줬다. 그의 극적인 고백이 강제한 삼성특검은 국민정부와 참여정부 검찰의 10년 직무유기에 대한 국민탄핵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대법원이 배임유죄를 선고한 이건희 회장을 소환조사 한번 못한 큰 잘못이 있다. 누가 봐도 무세승계와 배임혐의가 분명한 데다 시민사회와 법학교수들이 그만큼 나섰으면 대검중수부에 삼성경영권 무세승계 특별수사본부를 차려서 본격적, 전면적으로 수사했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
돌이켜보면, 참여정부의 검찰은 SK 최태원 회장과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 등 상위 재벌총수들을 똑같은 지배권 강화목적의 배임탈세혐의로 잡아들이면서도 유독 삼성 이 회장만은 끝까지 봐주기로 일관했다. 그 배경과 이유에 대해서는 앞으로 충분한 규명이 필요하다.
"김지형·양창수 대법관이 안타깝다"
검찰논의는 이쯤에서 마치고 이제 대법원 판세의 정치적 의미를 따져보자. 대법원장과 13인의 현직 대법관 중 이명박 대통령은 3인(양창수, 차한성, 신영철)을 임명했을 뿐이다. 나머지 11인은 모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임했다. 특히 김영란, 전수안, 두 여성대법관의 임명과 박시환, 김지형, 두 진보성향 대법관의 임명은 노 대통령의 사법부 개혁의지의 산물이자 상징이었다.
공교롭게도 에버랜드 소수의견을 낸 5인의 대법관은 전원 노무현 정권시절 선임된 분들이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신참 대법관 세 분은 모두 이건희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여기엔 많은 관전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다수의견에 가담한 국내 최고수준의 법학자 양창수 대법관도 포함된다.
제일 아쉬운 다수의견 가담자는 김지형 대법관이다. 그는 고법 부장판사 몇 해 만에 곧바로 대법관으로 수직상승한 경우로 강금실 법무부 장관만큼이나 파격적인 서열파괴 인사의 수혜자였다. 노동문제 재판에서 보인 실력과 진보성 덕에 전격 발탁된 것으로 알려졌다.
내 주변에는 김지형 대법관과 양창수 대법관의 다수의견 합류에 충격 받은 법학자와 변호사가 많다. 아무리 선의로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주변의 우려어린 평가는 다수의견의 법리라는 것이 사법개혁의 상징인물이나 민법학의 권위자가 양식과 명예를 걸고 승인하기에는 너무나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사이비 법리라는 데서 비롯한다.
여기서 상세하게 논할 수는 없지만 그 이유는 이렇다. 에버랜드 다수의견은 '주주배정방식의 저가발행 배임무죄 법리'에 어떠한 전제와 요건, 한계도 달지 않는다. 신주발행가의 저가성이 아무리 현저해도, 신주발행물량이 아무리 많아도, 신주실권비율이 아무리 높아도 배임무죄고 그 결과 실권분의 제3자 인수로 지배주주가 바뀔 정도가 돼도 변함없이 무죄라는 것이다. 다수의견에 따르면, 적정가의 10% 헐값에 기존주식 125% 물량의 신주를 주주배정해서 97%의 실권을 강제한 후 총수자녀에게 넘겨준 에버랜드 저가발행도 그래서 무죄다.
법의 생명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며 각자에게 그의 몫을 찾아주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법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끊임없이 분별한다. 이런 분별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바로 법리의 전제와 요건, 그리고 한계다. 이것이 결여된 무분별한 법리는 결코 정의의 도구가 되지 못한다. 대법원 다수의견은 실권분에 대한 제3자 배정의 전후정황의 다양성을 조금도 분별하지 않고 동일하게 평가하는 무분별법리의 극치다.
또한 당해법리의 적용이 빚어낼 극도의 부정의에 대해서도 아무런 고려가 없는 무책임법리의 극치이기도 하다. 다수의견의 무분별한 법리로 말미암아 에버랜드처럼 특수관계인 주주들로 구성된 비상장 알짜계열사들은 이제부터 주주배정을 가장하여 마음 놓고 총수자녀들에게 헐값에 지배권을 이전할 수 있게 됐다. 이 경우 특수관계인 주주들의 고의실권을 알 길도, 막을 길도 전무하기 때문이다. 제2의 에버랜드들로 가득한 중하위재벌들은 다수의견의 배임특권 조장법리에 환호성을 지르게 돼 있다.
▲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허태학·박노빈 전 에버랜드 사장'에 대한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에서 김영란 대법관이 주문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
삼성 무세승계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입장은 무엇이었나
아무튼 한 표 차 에버랜드 무죄판결은 노무현 정권의 이용훈 대법원이 역사적 진검승부 사안에서 기득권의 손을 들어주는 보수적 성향을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물론 노무현 정권이 후반기에도 대법관 파격인사 기조를 이어갔거나 개혁진보세력이 또 집권해서 대법관자리 셋를 모두 개혁진보인사로 채웠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단지 한 표가 모자랐을 뿐이니 말이다.
재벌총수의 배임특권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입장은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다. 하지만 정권차원에서 삼성경영권 무세세습스캔들을 그다지 심각한 문제로 파악하지 않은 징후는 많다. 에버랜드 1심 변호인, 즉 삼성무세세습 변호인으로 활동하던 이용훈 변호사를 사법부 수장으로 임명한 것이 단적인 예다.
법치주의와 형사정의 차원에서 참여정부의 청와대가 이건희 회장의 소환조사를 마냥 미루는 검찰총장과 법무장관들에게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지, 나아가서 조세권 확립과 경제정의 차원에서 재벌 무세승계를 엄히 다스려야 할 국세청, 공정위 등 경제검찰의 수장들에게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지는 아직까지 어떤 증언도 나온 바 없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재벌정책 및 형사사법 책임자들의 증언이 필요하다
지난 5월 29일의 대법원 판결로 이제 삼성경영권의 무세세습사건은 현재진행형에서 지나간 역사의 일부가 됐다. 지금 시점에서 아무리 다시 기억을 더듬으며 지난 12년을 돌아봐도 삼성사건에 대한 지난 10년 개혁진보정권의 미온적 반응과 타성적 대처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미스터리 투성이다.
주지하다시피 삼성경영권 무세승계스캔들은 1995년의 60억 증여에서 시작해 2009년 5월말의 면죄부 대법판결로 종결됐다. 삼성의 관점에서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무세승계 작전이 한창 진행 중인 1998년 2월, 김대중 개혁정권이 들어선 것이 첫 번째 위기였을 것이다. 두 번째 위기는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서 에버랜드 사건수사에 착수한 걸 꼽지 않을까 싶다. 진짜 위기감을 느낀 건 물론 내부고발자 김용철 변호사의 전격 등장이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1998년 2월에서 2008년 2월까지 10년간 지속된 개혁진보정권의 삼성관련 성적표는 너무나 초라하다. SDS 사건에 대해 10년 개혁정권의 검찰은 무려 여섯 번이나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2008년 특검수사와 2009년 대법판결은 명백한 배임유죄로 판정하며 이를 뒤집었다. 당연히 관련인사들의 설명책임(accountability)이 요구된다.
검찰 역사상 최대 수치 중 하나인 SDS 사건에 대해 양대 정부의 검찰총장, 법무장관과 청와대 민정수석들은 마땅히 국민 앞에 뭔가 해명을 내놓아야 한다. 에버랜드와 SDS 등 고발사건을 넘어 삼성 무세승계스캔들의 전모에 대해 처음부터 본격수사를 회피한 이유와 에버랜드사안에서 이건희 회장 소환조사를 사실상 포기한 이유에 대해서도 같다.
양대 정권의 최고위 정책책임자과 경제검찰 수장들도 삼성경영권사안을 위시하여 연이어 불거진 재벌총수의 배임성 경영권방어 사안들에 대해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어떤 정책처방을 내렸는지, 이를 위해 검찰, 국세청, 공정위, 금감위 등 유관기관들이 어떻게 조사 및 정책의 공조체제를 구축해서 대처했는지 밝혀야 한다.
요컨대, 국민정부와 참여정부의 부패사정 및 재벌정책 최고책임자들은 자신들이 삼성경영권 무세승계사안 및 연이어 불거진 유사사건들에 대해 대통령에게 어떤 내용의 보고와 진언을 했으며, 대통령이 그에 대해 어떤 의견과 뜻을 밝혔는지 상세히 증언해야 한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왜 달리 못했는지 이제는 성찰해서 극복하자
지난 12년 남짓 삼성경영권 무세승계사안을 집중적으로 다뤄온 내게 개혁정권의 주요인사와 검찰의 행태는 참으로 실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삼성사건 앞에서는 개혁정치권의 빛나는 지성들도 두뇌의 작동을 멈추는 걸 적잖이 경험했다. 한낱 백면서생에 지나지 않는 나는 당시 수많은 나랏일로 분주하며 소모적 정치공세에 시달리던 분들의 복잡한 속사정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분들도 정권운영의 분주함도, 대형사건의 중압감도 다 뒤로한 홀가분한 상태에서 차분히 삼성사건의 과거 굴곡을 되돌아보며 무엇이 문제였는지, 왜 달리 못했는지 진지하게 토론하고 성찰할 때가 됐다. 이래야 우리 모두가 개혁정권 10년의 아쉬웠던 실책과 한계를 극복하고 성큼 진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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