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외계인 애인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외계인 애인

[별, 시를 만나다]

<프레시안>은 '2009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 이미 연재 중인 '문화, 우주를 만나다'에 이어 '별, 시를 만나다' 연재를 '2009 세계 천문의 해' 한국조직위원회가 운영하는 웹진 <이야진(IYAZINE)>과 공동으로 연재한다.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 50인이 별, 우주를 소재로 한 신작시 50편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한 편씩 선보인다. 매번 첨부될 시인의 '시작 노트'와 천문학자 이명현 교수(IYA2009 한국조직위원회 문화분과 위원장·연세대 천문대)의 감상은 시 읽는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다.

외계인 애인

나 전설의 플라스틱 재벌은 가끔 손주들을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것이다 네 할미는 헌신적이었지 네 에미는 공부도 잘했지 남대문은 활활 잘 탔지 등등 이야기를 숨기기 위한 이야기를 뜬금없이 하고서, 비로소 낡은 휴대폰을 꺼내 외계에서 찾아왔던 애인의 문자를 읽어 줄 것이다 힘들어하면 어떻게 하겠어 내가 힘내라고 어깨라도 토닥여 줘야지요 매력 있어 이백 살 넘은 노파답지 않은 말투예요 영리한 첫째 손녀는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날 것이다 고등학생 때였으니, 그래 정확히 할아버지보다 이백 살 많았단다 그리고 늘 하던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대목에 공을 들인다 피부가 정말 고왔어 합성수지를 특수하게 재활용한 살갗이라 이백 살 노파라고 믿을 수 없었단다 외계 과학의 승리였지 곧 이야기는 가장 슬픈 대목으로 들어서리라 지구의 바다를 눈에 담고 그녀가 동포를 생각하며 얼마나 흐느꼈는지, 수자원 담당 원로인 그녀가 왜 전쟁 중인 자기 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지, 아이들은 정치 이야기도 꾹 참고 듣는다 그때부터 할아버지는 합성수지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지 이 세상 모든 고무공을 만져 보았단다 간절하게, 그녀의 피부를 되찾고 싶었어 모텔을 전전하며 같이 끌어안고 누웠을 때의 그 합성수지 촉감을 잊을 수 없었단다 아버님 애들한테 그런 얘기를! 또 며느리에게 핀잔을 듣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밤거리 그만 헤매고 집으로 들어가요 그러곤 교보문고 옆에 길다란 광선 기둥을 만들며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를 운전하고 떠나갔지 이 세상 모든 플라스틱을 만져 보았단다 결국 난 합성수지 분야의 일인자가 되었고 군수산업에도 손을 대 인류는 두 번의 전쟁을 플라스틱 뿅망치로 치르면서 가벼운 타박상 환자만 남겼지 그러나 그 피부 감촉을 다시 느껴 보지는 못했단다 지구의 합성수지 기술은 이백 년이 뒤떨어져, 그때까지는 누구도 살 수 없지 전쟁은 끝났을까? 그녀의 별은 해방되었나? 세상을 떠나 이백 년 우주를 배회하면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아예 시작도 말았더라면! ……그러면서 진작 잠든 손주들을 안아 침대에 누이고, 그룹 사옥 꼭대기로 올라가 송전탑에 걸린 은하수에 대고 네 이름을 부른다 세 번 부르니 별 이름 같다



지구 생명체의 근간은 탄소화합물이다.가장 안정적인 분자구조 중 하나이니, 이를 기반으로 한 생명체가 탄생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다.탄소화합물 생명체가 한 시대를 풍미하면, 아마도 또 다른 안정적인 분자구조 중 하나인 실리콘화합물 기반 생명체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그들의 피부는 그 특성을 반영하듯 아주 매끈하고 투명할 것이다.

그들의 손자의 손녀의 손자들은 우주 전설이 된 단백질 살가죽 지구인과 합성수지 재활용 피부 외계인의 사랑 후일담을 이렇게 적어 놓을지도 모르겠다.우주 영혼 보관소의 메모리 스틱 속에 오래도록 함께 잠들어 있던 그들의 영혼은 훗날 실리콘화합물 생명체 시대가 도래하자, 매끈한 실리콘 유리질 몸을 하나 얻어서 아무도 없는 지구로 돌아와 그 속에서 오래도록 함께 살았노라고.



후일담. 이젠 생명체의 신호가 전혀 잡히지 않는 사막이 된 이 별에 들르게 된 것은 추억 때문은 아니라고 되뇌었다 몇 세기 전 나는 이 별에서 미네랄이 가득한 물을 훔쳐 간 적이 있다 죽어 가는 동포들은 생명을 얻었고 전쟁은 승리하였으며 나는 새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그러나 국회는 혼란스러웠고 결국 내 야심은 나와 광신으로 무장한 삼백 명의 측근들을 영원한 우주의 망명객으로 만들어 버렸다 지구인은 거대한 납골당을 유산으로 남겨 놓았다 묘지의 벽에 빼곡히 들어찬 메모리 스틱에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잠들어 있었다 지구인들은 영혼을 보관할 줄 알았지 다시 업로드하는 기술은 모른 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몇천 개의 벽을 조사한 끝에 그 남자의 이름이 적힌 메모리 스틱을 찾았다 우주선에 비치된 조야한 장치로는 그의 영혼을 유사(類似) 이진법 체계로만 겨우 되살릴 수 있었다 붉은 등이 깜박 긍정, 깜박깜박 부정……. 당신은 내가누구인지 압니까? 깜박. 당신은 죽었습니까? 깜박, 잠시 후 깜박깜박. 그는 죽음의 개념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했던 모든 일은 무의미해졌지요? 깜박깜박. 그를 다시 깨워 낸 게 미안했다 나는 그전과 똑같은 모습이에요. 매달 갈아입는 합성수지 피부에 관한 한 취향이 바뀌지 않았지요…… 내 피부를 만져 보고 싶나요? ……신체나 마음이나 다 사라졌는데, 그리움이란 느낌이 아직 있나요? ……깜박. 엄마 이 생명체는 이미 죽었어요, 이러는 건 나쁜 짓이에요! 어느새 아들이 옆에 와 있었다 그만둘 수는 없었다 많이 힘들었어요? 깜박깜박(천만에! 전혀 그렇지 않아!) 그의 생채기를 건드렸다 이 단순한 이진법 체계 안에서도 영혼은 자존심을 표현하고 거짓말을 만들어 낼 수 있기에 나는 세심히 해석해야 했다 깜박깜박. 목이 메었다 당신은 죽고 싶습니까? 깜박. 엄마는 엄마가 원하는 일을 의문문으로 바꾸고 있을 뿐이야! 파도 위에 뜬 노을을 바라보고 싶어요? 노랫소리 들리는 술집에 밤이 깊도록 앉아 있는 일은 어때요? 비 오는 창가는? ……이제 노을 지는 바닷가도, 비 오는 창가도 우주에는 없어요, 그런 별이 많을 줄 알았더니…….

서동욱은…

1969년 서울 출생. 시집 <랭보가 시쓰기를 그만둔 날> 등.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