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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금호동 철거민' 유 이사, 사고 치다"

[권은정의 'Social Job'] 철거 운동에서 신협까지 : 논골신협 유영우 이사

<프레시안>은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와 공동으로 최근 큰 관심을 모으는 '사회적 기업(social entrepreneur)'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더 나은 모습을 찾는 새로운 인터뷰 연재를 마련한다.

전문 인터뷰어 권은정 씨가 직접 한국의 다양한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가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그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 이 연재는 총 20회에 걸쳐 매주 목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이 연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소장 이영환 교수)는 사회적 기업가 인적 자원 개발 교육과 사회적 기업 발전을 위한 연구 활동을 하는 성공회대학교 부설 연구기관이다. (☞사회적기업연구센터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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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영우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상임이사. ⓒ프레시안

철거 운동에서 시작해 신용협동조합을 운영한다고? 어떻게 연결되는 것이지? 금호동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궁금증이 더했다. 이 지역은 그전에 서울의 산동네였다.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붙어살던 지역에 지금은 말쑥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상전벽해. 도시개발에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그 변화는 놀랄 만하다.

더구나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강제된 변화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 유영우 씨를 신협 사무실에서 만났다. 언덕꼭대기 논골사거리에 다정한 듯 보이는 3층 건물이 논골신용협동조합이다. 주민 두엇이 창구에서 예금을 하고 있었다.

논골신협은 1997년 11월에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10여 년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신장세를 보여 왔다. 현재 전체 조합원 가입 수는 2700명, 자산은 140억 원이다. 자산 3억 원으로 시작해서 이제 명실상부한 지역 사회 서민 금융의 파수꾼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유영우 씨는 초창기부터 10년 넘게, 바로 며칠 전까지 이사장으로 일했다. 지금은 이사 직함을 갖고 있는 논골신협과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늘 개량한복을 입고 다닌다는 이 중년 신사는 백발만 아니라면 충분히 젊은이 대접을 받고도 남을 만큼 경쾌해 보인다. 그의 또 다른 직함은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상임이사'다. 이 일 또한 10여 년 넘게 해오고 있다.

▲ "철거 운동에서 신협으로. 유영우 이사가 만들어낸 이 연결점은 우리가 제대로 해낸 운동이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프레시안
약속 날짜를 잡으려고 연락했을 때 그는 당장 시간내기가 어렵다고 했다. 용산 참사 때문에 일정이 바쁘다고, 지방 워크숍에도 가야하고 강연도 해야 한다고 했다. 철거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다 죽어가는 세상이니 유 이사가 바쁜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금호동 산동네 철거민이기도 하니 개발 지역에서 곧 내몰릴 주민들에게 해줘야할 이야기가 많다. 요즘 그는 왕십리 뉴타운 재개발 지역에 나가 철거 주민들과 상담 활동을 한다. 쉬지 않고 철거민을 생산해내고 있는 도시의 살벌한 재개발.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주거권을 지켜내는 일, 유 이사에게 그 일은 처음이고 끝이다.

철거 운동에서 신협으로. 유 이사가 만들어낸 이 연결점은 우리가 제대로 해낸 운동이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그 출발점은 어떠했을까? 유 이사는 철거 운동이 시작된 1993년에 당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때 저는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었지요."

이렇게 저렇게 잘해보려고 했던 사업이 다 망하자 유 이사는 가족을 끌고 금호동 산동네로 이사를 왔다. 그는 먹고살기에 몹시 바빴고 결국 세상은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을 주로 했다. 정치·사회 문제 고민? 그런 건 관심 밖이었다. 초등학생 남매를 둔 아버지로서 어깨도 만만치 않게 무거웠다.

"어느 날 애들 엄마가 공부방에 갔다 오더니 이 동네가 개발을 한다고, 다 나가야 한다고 그러더군요. 제가 그랬지요. 당연히 나가야지, 남의 집 세 살면서 나가라면 나가야하는 거 아니냐고."

그의 아내는 생각이 달랐다. 그냥 나가면 안 된다, 정당한 권리 주장을 해야 한다, 공부방 설명회에 나가서 이야기를 좀 들어보자고 설득했다.

"그때 설명회에 오신 분이 설명을 잘해서인지 이야기를 듣고 보니 뭘 해야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마을 주민들 대책회의가 열리고 엉겁결에 제가 바로 위원장을 맡게 되었어요."

본격적으로 철거 운동에 집중하기 위해 그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뒀다. 그때 시절을 떠올리면 유 이사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것이지요. 소시민에서 투사가 된 것이지요."

▲ 유영우 이사는 1993년 금호·행당·하왕 지역 재개발에 맞서 철거민 운동을 조직해 가이주 단지 입주를 쟁취했다. ⓒ프레시안

당시 금호·행당·하왕 지역 전체에 개발의 바람이 몰아쳤다. 철거 대상 지역 주민들 모두가 힘을 모아 연대 활동을 펼쳤다. 위원장인 유 이사가 주거연합 성동지역 지부장 일도 자연스레 떠맡았다. 철거 운동이 진행되어 가이주 단지 입주를 논의 하는 단계에 다다르자 개발업자들과 주민들 간에 더욱 팽팽한 기운이 돌았다.

가이주 단지란 아파트 입주까지 세입자 주민들이 거주할 수 있는 시설 공간을 말한다. 어디나 할 것 없이 개발 지역에 살던 세입자들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사람들이다. 세입자들은 주거 이전비와 3개월치 생활비를 받아 나가거나 임대아파트 입주 중에 선택해야했다. 입주를 원한다 하더라도 당장 어려운 형편 때문에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고 나가는 이들도 많았다. 임대아파트 입주를 선택한 세입자들에게도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 공사 기간 동안 살 데가 필요한 것이다. 완공까지 7년 길게는 10년도 걸리는데 그 시기 동안 다른 곳에 이사 갔다가 오기란 불가능했다.

인근 지역 전월세 값은 이미 상승해서 멀리 외곽으로 나가야 겨우 살집을 얻을 수 있었다. 다른 데로 이사를 간다는 것은 생활권 이탈을 의미한다. 산동네 주민들은 그동안 살면서 그들만의 살뜰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일자리나 금전 거래가 가능했지만 멀리 이사가 버리면 이마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떨어지지 않고 모여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가이주 단지가 필요했다. 주민들은 열심히 싸웠다. 세입자 가구 250세대가 3년 동안 철거 운동을 해서 마침내 가이주단지로 입주할 수 있었다. 102세대가 입주했다.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공간은 식구 수에 따라 5평이나 7평으로 배정되었다. 문하나 열면 바로 코앞에 이웃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렇게 4년을 지냈으니 어떻게 서로 정들지 않을 수 있었을까.

▲ "주거가 안정되자 철거 운동은 바로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지역 주민 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리 삶을 어떻게 개척할 것인가. 가난한 우리가 힘을 모아서, 남의 도움 받지 않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면서 잘 살 수 있는 그런 운동을 해보자.'" ⓒ프레시안
금호동 지역에 이어 다른 지역에서도 연이어 가이주 단지가 허용되었다. 성공적인 선례 덕분에 힘없는 철거민들이 그나마 약간의 힘을 얻었다. 지금에 와서야 간략하게 정리되는 그 세월이지만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 것인가. 가이주 단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대형 텐트를 4개나 쳐놓고 40일간 농성한 적도 있었다. 협상 과정이 만만했을 리가 없다. 격렬하게 싸우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요 많이 맞기도 하고…. 특히 엄마들이 많이 다쳤지요. 남자들은 싸움이 일어나면 격해져서 크게 부상한다고 해서 철거 싸움 때엔 엄마들이 앞에 주로 나갔는데 많이 다쳤지요.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도 받고…. 저는 그때 지명수배 되어 도망 다니기도 했었지요. 주민 모두가 늘 일상적으로 긴장 상태에 있었어요. 철거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까 항상 대기상태죠. 우리가 순번 정해서 마을순찰 돌고 그랬는데 공사한다고 다 허물어 놓아서 마을이 완전히 폐허 같았지요."

지금은 대학생이 된 유 이사의 딸은 그 시절을 행복하게 회상한단다. 학교에 다녀와서 대책위 사무실 아니면 공부방에 가서 놀았는데 동네 어른들이 모두 엄마처럼 돌봐주었다. 저녁밥도 다 같이 먹고 밤늦어서야 엄마아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온동네 사람들이 한 식구처럼 살았던 시대였다.

주거가 안정되자 철거 운동은 바로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지역 주민 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리 삶을 어떻게 개척할 것인가. 가난한 우리가 힘을 모아서, 남의 도움 받지 않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면서 잘 살 수 있는 그런 운동을 해보자.'

운동의 형식은 협동조합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사실 철거 운동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1994년부터 주민자치 협동체 건설을 위한 기획단을 만들어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민, 활동가 중심으로 신협, 생협, 생산자 협동조합, 사회복지 협동조합 4개 분야로 나누었다. 주민들은 각자 분과로 들어가 공부했다. 1996년에 들어오면서 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맨 처음 출발한 게 신협, 그다음이 생산자협동조합이었고, 생협은 중도 포기했다가 이제 올해 다시 출발한다. 사회복지 쪽은 그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당시 그는 기획단 대표를 맡아 주도적으로 이 운동을 이끌었다. 어떻게 그전에 경험도 없었을 텐데 가능했나?

"협동조합운동은 전통적으로 빈민운동에서 해온 실험이잖아요. 저도 이걸 처음 접했을 때 굉장한 쇼크를 받았지요. 그때 공부방 선생님이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라는 책을 주셨는데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싶었지요. 철거 투쟁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모두 주민운동, 빈민운동 속에서 함께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많이 보고 배웠지요. 현장에 가서 보고 듣고. 우리 동네 주민들과 같이 가서 직접 보게 했지요. 모두가 협동 운동은 당연히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더라고요. 우리 지역이 짧은 시간에 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미리 열심히 공부한 덕이라고 봐요."

▲ 유영우 이사의 철거민 운동은 협동 운동으로 전화했다. 논골신용협동조합은 그 성과다. ⓒ프레시안

유영우 이사는 서울 토박이다. 여럿 누나를 둔 막내아들로 자랐으니 남들 어려운 것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고 그가 고백한다. 그의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

"글쎄, 그게 미스터리라니까요. 하하하…. 근데 확실한 것은 이거죠. 과거에 제가 소시민으로 살 때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나 부조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사회 돌아가는 것도 매스컴이나, 신문에서 말하는 대로 알았고, 그런데 여기 뛰어 들어와 싸움하는 과정에서 구조적인 모순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된 거지요. 경찰이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왜 철거용역깡패가 가난한 주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지, 개발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이 어디로 가는지, 직접 보고 경험하면서 제가 눈을 뜨게 된 것이지요. 우리 사회에 구조적 모순이 엄청 많구나,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우리 아이들한테 까지 이런 걸 넘겨주면 안 되겠다, 하는 막연한 사명감, 그런 게 자연스럽게 생겨나더군요.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서 다시는 못 빠져 나가게 된 거지요. 하하하…".

유 이사는 철거 운동 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참 신기하다고 했다. 부부가 운동하느라 돈벌이를 하나도 못했는데 그들 가족이 끼니를 굶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대문 밖에 나가보면 누가 쌀자루를 갖다놓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살림에 보태라고 돈을 건네주기도 했어요. 다 같이 가난한데도 이웃이 그렇게 해주니 제가 열성을 가지고 안할 수가 없었지요."

철거 운동에서 신협운동으로 넘어가면서 주민들은 진정한 운동의 기쁨과 보람을 맛볼 수 있었을 것 같다. 신협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슬로건이 있다. '1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1인을 위하여!' 이웃들은 모두가 힘을 모으면 얼마나 큰 위력이 생기는지 목격하게 된 것이다. "어떤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금융기관과 달리 조합원으로 가입한 조합원만이 이용하는 기관이지요. 조합원이 출자한 돈으로 또 조합원에게 대출해 주는 것이지요. 때문에 철저하게 지역사회 내에서 참여하는 이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게 되는 것이지요."

논골신협은 그동안 꾸준히 성장해왔다. 누구도 이렇게 쑥쑥 커갈 줄 몰랐을 것이다. 그 성공 비결은?

"신협을 철거민이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아주 가난한 이들이 만들었다는 게 근본 힘이에요. 그때 인근 지역 다 합해서 250세대였는데 각 마을마다 출자금을 거두는 책임자를 정해서 매일 거두었지요. 신협 인가를 받으려면 3억 원은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조합원은 누구라도 될 수 있었으니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가입했지요. 바구니를 들고 다니면 주민들이 몇백 원, 몇천 원씩 넣었지요. 수기통장에 오늘은 누가 얼마 출자했다하고 도장 찍어주고…. 그렇게 95년 말부터 시작해서 인가날 때 까지 쉬지 않고 했지요."

초창기에 바구니를 들고 조합비를 거두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여전히 신협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 철거 싸움 당시의 그 뭉쳐진 힘이 신협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때 다들 어려웠던 IMF 위기당시 논골신협도 약간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인가 받자말자 그 위기가 닥친 거지요. 그때 부실경영 신협은 곧바로 퇴출되고 그랬지요. 그런 소식이 언론에 실리면서 신용도가 떨어져 우리도 참 어려웠어요. 예금주들이 돈을 찾아가고…. 우리 조합원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굳건하게 버티면서 주변에 홍보도 열심히 하고해서 그 위기를 넘겼지요."

▲ 유영우 이사는 신용협동조합 활동이 궁극적으로 지역 주민 통합에 큰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프레시안
유 이사에게 신협은 인생의 보람이면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제가 협동 운동을 배우면서 가진 비전은 결국 각 지역 공동체가 잘되어야 나라의 전반적 부분이 튼튼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힘은 없지만 협동공동체 운동을 통해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민들이 같이 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게 목표입니다."

유 이사는 신협 활동이 궁극적으로 지역 주민 통합에 큰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지역 주민들 신협을 개방하며 같이 하자고 했더니 다들 꺼리더군요. 철거 싸움할 때 우리를 봤으니 좋은 인상이 아니었지요. 만날 이런 저런 항의에 온 동네가 떠나가게 스피커로 투쟁가를 틀어놓고 했으니까요. 우리를 빨갱이, 떼쟁이라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어느날 은행이라고 만들어놓고 있으니, 뭐하나 싶었을 거예요."

지금 건물을 사서 옮겨온 지가 2년 되었다. 그전에는 골목 안에 20평짜리 건물에 세를 살았다. 신뢰도가 더 커지는 것이 분명했다. 인근 주민들, 특히 장사하는 이들이 조합원으로 많이 참여했다. 주민통합을 위해 신협이 애를 쓰자 과격한 이미지에 대한 시각이 변하면서 인근 주민들이 조합원 가입을 시작했다. 야유회, 단오제 행사를 열고 지역에서 모임이 있으면 달려갔다. 신협이 경제공동체로서 인지도와 신뢰를 얻게 되면서 신협으로 모여드는 주민들은 더 많아지고 있다.

유 이사의 가슴에는 철거 운동에서 시작한 협동 운동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더욱 큰 불꽃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운동을 통해 배운 것, 그걸 모르고 살았다면 지금쯤, 인생 헛살았다는 생각했을 겁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결코 후회해 본 적 없었지요."

유영우 이사는 결국 혼자만 잘사는 세상이 아니라 다 같이 잘사는 동네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 "운동을 통해 배운 것, 그걸 모르고 살았다면 지금쯤, 인생 헛살았다는 생각했을 겁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결코 후회해 본 적 없었지요." ⓒ프레시안

세상을 바꾸는 혁신 '사회적 기업'

사회적 기업(social entrepreneur)에 대한 관심이 놀랍게 증폭되고 있다. 불과 수년 전에 빈곤 대책의 일환으로 거론되는가 싶더니 어느새 시민운동의 핵심 화두가 되었다. 지속 가능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일구는 대안에 대한 간절한 열망 때문일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사회적기업육성법(2007)을 제정하는 등 기대감을 한껏 높였고, 복지 정책에 시들한 현 정부에서도 사회적 기업에 대한 기대는 여전하다.

하지만 사회적 기업의 의미에 대한 인식은 다양하고 혼란스럽다. '착한 기업', '윤리적 기업', '대안 기업', '이윤이 아니라 빵을 위한 기업' 등 긍정적인 의미 부여가 많지만, '낮은 질의 주변부 일자리'라는 비판도 무시할 수 없다.

우선 사회적 기업의 개념 자체가 분명치 않다. 사회적기업육성법에서는 '취약 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의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영업 활동을 수행하는 기업'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정의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모든 기업은 크든 작든 나름대로의 사회적 의미와 목적을 가지기 때문이다. 또 현행법은 사회적 기업에 대한 인증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요건에 맞는 기업이나 단체만 사회적 기업으로 배타적으로 인정됨으로써, 사회적 기업의 정신을 공유하는 수많은 조직체들이 배제되고 있다. 특히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지만 영리활동을 하지 않는 수많은 NGO, NPO 등이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기업의 엄밀한 개념보다는 그 기본 정신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사회적 기업의 기본 정신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그 핵심은 사회적 기업가 정신(social entrepreneurship)이고, 이는 곧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실업과 빈곤, 사회적 배제와 소외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야기한 사회적 폐해를 해결하고자 하는 혁신적인 모색이 사회적 기업의 기본 정신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기업은 이러한 사회적 혁신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차원의 경제적 활동을 의미한다. 물론 좁은 의미의 상공업 활동에 국한하지 않는다.

실직자를 위해 고용을 창출하거나 창업을 지원하는 일은 물론, 장애인을 교육하고 불우 청소년의 자존감 회복을 지원하는 등 취약계층에게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 장애인이 중심이 되는 일터,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운영하는 기업, 환경을 보호하고 생태마을을 만드는 기업, 농촌공동체를 회복하는 귀농·귀촌운동, 대안화폐로 지역사회 공동체를 만드는 레츠(Lets) 운동, 소규모의 커뮤니티 비즈니스, 가난한 사람들에게 신용대출하는 협동조합, 주민들의 다양한 욕구에 대응하는 워커즈 컬렉티브(workers' collectives) 등 그 영역은 다양하고 무궁하다. 사회적 기업은 현대 사회가 해결하지 못하는 공백을 채워나가는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모색의 너머에는, 사람들 간의 신뢰에 기반을 둔 대안적이고 협동적인 사회경제 체제의 모델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희망이 놓여있는데, 이는 상품과 이윤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비인간적인 시장경제 체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희망이다. 사회적 기업이 영리활동에만 의존하지 않고 보다 폭넓은 사회적 자원동원을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사회적 기업 운동은 이제까지 우리 사회의 변혁을 위해 애써온 사회운동의 정신과 별개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변혁의 과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고, 이를 시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출발하여, 창의적이고 지속가능하게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회적 기업은 사회운동과 사회복지를 보는 새로운 시각(new perspective)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시민들의 방치된 욕구를 충족하고, 낙후된 지역사회를 재생하며, 보다 높은 삶의 질을 향한 혁신을 창의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꾀하는 것이 사회적 기업가 정신일 것이다. 물론 사회적 기업 운동은 사회적 기업가 혼자의 운동이 아니다.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소유와 운영에서 주체적이고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이를 조직화하는 것은 사회적 기업가의 사명이므로 사회적 기업의 성패가 이들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체현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가와 사회적 기업가 정신을 확인하는 것이 본 기획의 목적이다. 앞으로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타'와 <프레시안>은 20회의 기획 연재를 통해 이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위에서 강조한 대로 여기에서 다루는 사회적 기업은 정부의 협소한 개념 정의에 구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 기업가 정신을 체현하고 있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회의 변혁을 위해 헌신해온 많은 분들을 폭넓게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이영환(성공회대 교수·성공회대 사회적기업연구센타 소장)

▲ 프레시안은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와 공동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가는 사회적 기업가 20인을 발굴해 소개할 예정이다. 지난 2월 17일 서울 옥인동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공동 기획 협약을 하는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왼쪽)와 이영환 사회적기업연구센터 소장(오른쪽).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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