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성적 미달'로 기록에서 사라진 아이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성적 미달'로 기록에서 사라진 아이들

[기자의 눈] 일제고사의 추억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일제고사가 부활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도통 '일제고사'란 것을 본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의고사', '중간·기말고사', '학력평가' 등등 거의 매달, 많게는 격주로 시험을 보던 기자에게 '학력평가'라 불리는 일제고사는 특별히 기억에 남을 일이 없었다. 기자는 80~90년대 초반 초-중-고를 다녔다.

그런데 이번 임실-대구 학력평가 성적 조작 파문과 이어지는 각종 의혹들을 보면서 '일제고사'가 무엇인지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게 됐다.

조작의 유혹, 추억

초등학교 때였다. 도 학력평가라고 시험을 보면 반을 바꿔서 아이들이 직접 채점을 했다. 6학년 1반 답안지는 2반 아이들이, 2반 아이들 답안지는 1반 아이들이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 준 정답을 보고 채점을 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교환 채점을 하다보면 친한 친구의 답안지를 채점하게 되는 일도 생겼는데 부정행위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고백컨대 친구의 틀린 답 몇 개를 고쳐 점수를 올려줬었다. 용감하게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그 친구의 성적이 나보다 안 좋아 나의 등수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은 필수다. 그렇게 적선을 베풀 듯 오답을 정답으로 몇 개 고쳐준 뒤 그 친구에게 적선하듯 뻐겼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엔 몰랐지만 그 친구가 답을 고쳐달라고 요구한 것도 아닌데 괜한 짓을 해서 상처를 준 것 아닌가 싶다.

그러다가 한 번은 나보다 공부를 잘 하는 친구의 답안지를 채점하게 된 적도 있었다. 답안지는 거의 환상적이었다. 만점 답안지였다. 은근히 이 친구의 답안지를 고쳐 몇 개 틀리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그건 차마 할 수 없었다.

이런 기억도 있다. 시험이 시작되자 마자 선생님이 1,2번 문제의 답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 시절에는 왜 답을 가르쳐주는지도 몰랐고, 보통 1,2번 문제는 쉬운 문제가 나오기 때문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하위권 제끼기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런 부정행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선생님들의 '쪼임'의 차원이 달라졌다. 중학교 2학년 담임의 별명은 '공포의 왼손잡이'였다. 매질이 매섭기로 유명한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2학년에 진학하고 본 첫 시험에서 우리 반이 7개 반 중 꼴등을 했다.

담임은 반에서 1~15등까지 불러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15대씩 매질을 했다. 그 멍이 석 달을 갈 정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다음 시험에서 우리 반이 1등을 했다. 담임은 반 평균을 올리기 위해서는 하위권 아이들을 매질하는 것보다 상위권 아이들을 채근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임실의 기적'이 '임실의 치욕'으로 전락했다. 이 파문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학력 미달'이라는 이유로 성적 보고 대상에서 '사라져 버린'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시험을 보고서도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기록에서 사라진 것이다. 매질(관심)에서 제외하는 것보다 더 악질적인 행태다. 이 아이들은 이 사태에서 어떤 충격과 상처를 받았을까.

집단적 망각의 부끄러움

민주당 이미경 사무총장은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어른들은 일제고사에 의해 교육현장에서 어떤 부정행위가 벌어지고 그 폐해가 무엇인지 스스로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기의 아이들에게 이런 비정상적인 제도를 강요할 수가 있느냐"고 한탄했다.

줄 세우기를 시작하는 순간 온갖 수단과 방법들이 동원된다. 게다가 아이들의 성적을 교장, 교감의 인사고과에 반영한다니 조작의 유혹을 더 부추기고 있다. 이를 알면서도 단지 채점 방식의 문제, 성적 보고 방식의 문제만 탓할 수 있을까. 제도의 문제다.

인간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망각'의 기능이다. 특히 인간은 어두웠던 과거는 쉽게 잊는다. 기자도 어린 시절 '부정행위'를 망각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가 집단적 망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