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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 걸으면 길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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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 걸으면 길이 생긴다"

[길에서 책읽기] 강제윤의 <섬을 걷다>

▲ <섬을 걷다>(강제윤 지음, 홍익출판사 펴냄) ⓒ프레시안

개인주의는 근대 서구 자본주의의 발명품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주의를 필수불가결하게 필요로 했다. 이른바 농업 공동체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개인들이 있어야만 노동자가 조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요는 이념을 만든다. 그 이데올로기가 개인주의였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농업 공동체를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억압하는 낡은 족쇄와 감옥으로 선전했고, 농사꾼은 평생 뼈골 빠지게 일만 하는 노예와도 같은 존재로 묘사했다. 중세는 암흑시대였다.

서구 근대화를 지상과제로 설정했던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개인주의는 20세기에 새로 수입된 이데올로기였다. 자본주의자이건 사회주의자이건 조선 시대는 개인의 자유가 족쇄에 갇힌 암흑시대였다. 농민은 양반들의 착취와 억압에 시달려 일생을 불행하게 살아가야만 했던 비참한 노예였다.

물론 이는 사실의 어마어마한 왜곡이다. 서구 중세의 농사꾼이나 조선의 농사꾼이나 지주들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착취와 억압은 때에 따라 그 강도가 달랐으며, 농사꾼은 농업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일정한 세금을 납부하고 나면 지역 안에서는 자유로운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수천 년 동안 농민들이 자유를 잃은 비참한 노예로서만 살았다는 것은 조금만 상식의 눈으로 생각해 보아도 정말 말도 안되는 허구임을 금방 알 수 있을 터인데도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왜곡은 그렇게 무섭다.

조선 시대 마을마다 존재했던 두레는 농사꾼들의 강력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양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노동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지주라고 해서 소작인들을 함부로 바꿀 수는 없었다. 소작인들의 소작권은 영(永)소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된 것이었다. 소작을 바꾸면 두레에서 아예 그 지주의 모내기와 가을걷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작료도 대개 4할 정도였고 궁장토같은 경우는 3할이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토지 조사 사업으로 조선의 농경지를 강탈하면서 제일 먼저 파괴한 것이 다름아닌 이 두레였다. 두레가 파괴되면서 소작료가 7, 8할로 가혹하게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날 재벌들의 엄청난 재산과 그 재산을 만들어준 비정규 노동자들의 처참한 생활과 엇비슷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 36년 내내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으로부터 식량을 약탈해갔다. 일제 치하에서 몇 해의 기근 사태를 제외하고 식량 생산은 조선 인민들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정도였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만주로 일본으로 유랑을 떠난 것은 이처럼 순전히 일제의 광폭한 식량 공출과 노동력 착취, 억압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제국주의가 오늘날 한국의 경제 성장을 가능케 한 은인이라고 떠드는 뉴라이트 매국노들이 있고, 이들이 버젓이 정권을 잡아 그런 친일 매국의 논리를 가르치려 한다. 근대화, 서구화라면 무조건 만만세 하는 성장 중독증이 만들어낸 괴물국가의 자화상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던 해방 직전의 수많은 암흑시대와 지금이 다를 바가 무엇이 있을까.

개인의 자유와 인권은 매우 소중한 가치이다. 공동체의 지속가능한 미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치와 자립, 그리고 우애와 협동을 바탕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주창하는 개인주의는 오히려 이런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이다. 그 결과는 살벌한 경쟁과 소모품이 되어버린 개인들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파괴와 가족 파괴, 급기야는 윤리와 양심 자체의 파괴와 해체이다. 그리고 극단의 개인주의는 곧바로 대규모 환경파괴를 불러일으킨다.

모든 것이 돈이면 다 해결되는 자본주의에서 결국 개인들은 돈의 노예로 전락하고 인류 문명 자체를 파멸로 몰고 가는 자살의 길로 광속 질주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살벌하고도 비정한 사막 사회는 이런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빚어낸 멋진 신세계이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만들어 낸 극단의 멋진 신세계가 파시즘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명박 정권이 저강도 파시즘 정권의 길로 가고 있음을 무력하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용산에서 처참하고도 잔인하게 불길에 휩싸여 죽은 우리의 이웃들은 이제 어느 누구도 이명박 정권의 살인정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섬뜩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기묘하게 결합해서 만들어낸 새로운 산업이 관광 산업이다. 값싼 석유가 만들어낸 놀라운 운송 수단의 개발과 함께 관광 산업은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급성장했다. 급기야 21세기 초부터는 해마다 8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광을 나선다. 10명 가운데 1명이 넘는 숫자이다.

알피니즘이라는 이름의 등산 문화 확산과 오지 탐방 관광 산업은 극한의 자연 환경을 정복하는 산악인, 탐험가, 모험가에 대한 선전과 함께 수많은 산업사회의 개인들을 마치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개척자인양 착각하게 만들면서 돈다발을 챙겼다.

우리나라도 지금 전국의 산하가 관광지로 변해 쓰레기 더미와 소비주의의 악취로 뒤범벅되고 있는 중이다. 길이란 길 주변은 모조리 '가든'과 '파크', 휴게소로 그저 먹고 자고 싸는 자동차 길로 바뀌었다. 길은 이제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소통과 교류의 길이 아니라 단절과 파괴의 길일 뿐이다. 마을을 파편화시키고 섬으로 고립시키는 해체의 길일 뿐이다. 한반도 대운하를 4대강 정비로 바꾼 이명박 정권의 포클레인 굉음 또한 그 극한의 전도된 의식을 보여줄 따름이다.

관광 산업에 편승한 쓰레기 여행 문학도 넘치고 넘친다. 책방에 가면 각종의 여행 정보를 담은 책에서부터 머나먼 미지의 나라와 오지 탐방을 상품으로 내세운 온갖 종류의 그럴 듯한 여행기가 산더미처럼 가득하다. 대부분 아무런 사회의식이나 일말의 양심도 없이 지구 온난화를 부추기는 풍요 속의 자살 행렬 찌라시들이다. 세상에 영혼의 시와 소설을 쓴다는 작자들이 선박 회사들이 공짜로 내준 상선을 타고 나서는 해양 문학이랍시고 쓴 시와 글을 보면 기가 차서 말이 안나온다. 그 선박이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이동시키는 피의 선박이며 지구 온난화를 재촉하는 가장 질나쁜 이산화탄소 배출의 주범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말의 성찰도 없다.

강제윤의 <섬을 걷다>(홍익출판사 펴냄)는 그런 여행기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아주 불편한 답사 여행기이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기묘하게 결합되어 마이카 시대의 도래와 함께 100만 부 이상이 팔렸다는 문화 유산 답사기와는 시작부터 다르다. 강제윤의 섬 걷기는 오늘날의 사막사회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들여다보고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삶의 전부를 다시 성찰하는 일종의 구도 행위이다. 도법 스님이 마을과 마을을 걸었듯이 강제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섬과 섬을, 사람과 사람을 걸었고 지금도 걷고 있다.

모름지기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면 이제 걸어야 한다. 혼자서 또는 여럿이서 비록 뚜렷한 목적이나 의미을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걸어야 한다. 거기 새로운 길이 있다.

외딴 섬으로, 모래알로 흩어진 자유로운 영혼들은 이제 걸어야 한다. 두려워 말라. 걸으면 길이 만들어지고 벗이 보이고 공동체가 보이고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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