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환자가 있으면 집안은 그야말로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갈등과 극단의 경우에는 가족 해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만큼 치매는 무서운 정신병이다. 만약 한 나라의 정권 자체가 치매에 걸린 듯이 보인다면, 정당 자체가 치매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나라와 정권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눈에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MB정권의 언어 장애가 급기야 정신병이라고밖에는 달리 보이지 않는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포크레인도 녹색이고 시멘트도 녹색이고 아스팔트도 녹색이란다. 멀쩡한 강을 파헤치고 산을 뚫고 댐을 만드는 것이 녹색이고 생태란다.
▲ <그린 이코노미> (헤이즐 헨더슨 지음, 정현상 옮김, 이후 펴냄) ⓒ프레시안 |
접대비 한도를 올려 강남 룸살롱을 살리는 것이 서민경제 활성화라는 것은 시민들을 좀 웃겨보려고 작심하고 벌이는 코미디라고 치자. 강남에 성매매 의혹의 유흥주점 건물을 갖고 있으면서 못생긴 마사지걸을 고르는 것이 좋다고 충고하는 MB를 위해 과잉충성하는 '뻘짓'이라고 넘어가자.
그러나 명백한 녹색 학살을 녹색뉴딜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것은 좀 심각하다. 이런 정도는 당연히 전문의의 정신감정을 받아보라고 권해야 마땅하다. 기획재정부를 비롯해 11개 정부 부처가 합동으로 발표한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녹색뉴딜 사업 추진방안>을 보면서 눈을 비비고 다시 글자 하나하나를 뜯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운하 추진을 4대강 정비로 둔갑시킨 영혼없는 공무원들의 지록위마(指鹿爲馬)식 사악한 위장과 은폐술은 이해할 수도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멀쩡한 강을, 그나마 근근히 아직 처녀처럼 총각처럼 남아 있는 마지막 생태계의 녹색을 흉측하고도 무자비하게 자르고 파헤치고 파괴하는 홀로코스트 같은 짓에다 버젓이 녹색이란 용어를 갖다 붙인 것이다. 세상에 이건 주장이나 정책이 아니라 치매라는 정신병 증상임이 틀림없다.
행정부만 그런 게 아니다. 이른바 조중동이라고 불리는 신문사들도 마찬가지로 정신과 전문의들의 진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 가운데서도 새해 첫날부터 '낙동강, 굽이굽이 병든 1300리 물길'이란 제목 아래 송의호·김상진·주정완 기자 등의 특별 취재 형식으로 <중앙일보>가 보인 행태는 치매 의심을 넘어 가히 광우병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안동에 가서 낙동강을 하루만 걸어가 보라. 어떻게 그런 기사가 나올 수 있을지 도저히 상식으로는 상상이 되질 않는다.
"경북도립대 권기창(행정학) 교수는 환경보호를 명목으로 낙동강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보호가 아니라 방치라며 강바닥을 긁어내는 준설을 통해 그릇을 키우면서 나루터나 생태공원 등 다목적으로 강을 활용해야 한다"는 기사를 읽다보면 소름이 끼치기까지 한다. 오죽 다급했으면 전직 청와대 비서관 출신의 목사가 대운하 전문가를 자칭하는 것보다 더 어이없게도 <중앙일보>는 엉뚱하게 행정학 교수를 생태 전공의 하천 전공자인양 타칭해 만들고 있을까 싶었다.
지독한 독성 화학물질 쓰레기에 녹색 플래카드를 뒤덮었다 해서 썩은 쓰레기 냄새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한 마디로 MB의 녹색뉴딜은 일자리도 거의 창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대운하를 하기 위한 온갖 구린내 나는 편법에 녹색 페인트를 덧칠했을 따름이다. 페인트값이 자그마치 무려 50조 원이라니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 이런 기괴한 생태계 파괴의 범죄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조금치도 성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가 그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 <로컬푸드>(브라이언 핼웨일 지음, 김종덕·허남혁·구준모 옮김, 이후 펴냄) ⓒ프레시안 |
오늘날 일자리에 대해서는, 일자리를 갖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정부나 기업이 시끄럽게 떠드는 녹색 뉴딜을 아무리 쳐다보아야 자신에게 일자리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저 독성 화학물질에 머리만 어지러워질 따름이다.
이제 일자리는 자신이 직접 세계관을 180도 바꿀 때라야만 비로소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일자리가 나타난다. 이제 21세기는 국가가 일자리를 만들어주지도 않고 기업이 일자리를 만들어주지도 않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임을 직시해야 한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임시직이나 비정규직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자신의 평생 직업을 가지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일자리의 창출은 이제 지속불가능한 낡은 산업주의의기업에서는 전혀 기대할 수가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통해 노동자를 더욱더 자르고 그 자리를 기계로 대신한다. 효율이란 명목 아래 조금만 인건비가 오르면 가차없이 다른 지역으로 공장을 옮겨버린다. 평생고용이란 이제 없다.
더구나 금융위기로 가려지고 있지만, 조만간 에너지 고갈을 비롯한 천연자원의 고갈은 이제 더 이상 경제성장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아니 에너지-식량 위기는 조만간 우리 사회를 거대한 소용돌이의 혼돈 속으로 내팽개치고 말 것이다.
한마디로 낡은 공장 굴뚝 식의 자본주의 산업화 패러다임은 이제 바로 우리들 눈 앞에서 종말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지금 시급히 지속불가능한 산업 체제에서 지속가능한 산업체제, 지속가능한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사실 지금도 늦었다.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은 무엇보다도 에너지-식량의 자립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로 이점이 발상의 전환 출발점이다.
대학 4년 동안 등록금과 책값 등에 대학생 한 사람이 지출하는 돈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적어도 4000만 원은 넘을 것이다. 이런 거금을 들여 대학을 졸업하고 그 숱한 대학생들이 얻는 일자리는 어떤 것일까. 연봉 2000만 원이 넘는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대졸자들이 몇 퍼센트나 될까. 고시로 통칭되는 전문직과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는 숫자는 또 몇 퍼센트나 될까.
설혹 만인의 만인에 대한 살벌한 경쟁을 뚫고 정규직이 되었다고 해서 평생 정규직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언제 어느 때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명퇴란 이름으로 실직자가 될 지 알 수도 없다. 도대체 이런 상황을 버젓이 잘 알면서 무엇 때문에 돈을 쏟아 부으면서 꼭 대학에 다녀야 하는 것인지 한 번 의심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노예같은 불안정한 삶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제 연봉 1억의 불안정한 노예의 삶을 선택할 지, 연봉 1천의 안정된 자유인의 삶을 선택할 지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린 에코노미>와 <로컬푸드>는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런 발상의 전환 사례를, 우리가 선택하는 우리 스스로의 미래를 제시해 준다. 녹색 농업, 녹색 에너지, 녹색 건축, 녹색 교통, 녹색 조직 등 녹색 일자리야말로 젊은이들의 미래이다.
무엇보다도 녹색 일자리의 핵심은 농업이다. 앞으로 석유가 투입되지 않는 유기농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우리가 불가피하게 가지 않으면 안되는 유일한 길이다. 귀농이야말로, 가족농 소농으로의 존재이전이야말로 젊은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미래 선택이다. 우리나라 농사꾼들은 지금 300만도 되지 않는다. 수백 만의 녹색 일자리가 농촌에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역에서 먹을거리를 자급자족하는 지역먹거리 체제는 또 수많은 일자리를 만든다. 유기농 발효식품과 가공공장, 유기농 매장 등등도 일자리를 만든다. 여기에 더해 각종의 협동조합, 생협, 신협, 공제조합은 젊은이들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의미있는 삶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은 아직도 미개척의 영역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의 열정과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재생에너지가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거기에 난방비와 냉방비가 거의 들지 않는 녹색건축은 기존의 낡은 건축 패러다임을 근본에서부터 바꾸면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일자리를 엄청나게 만들어낸다.
한 마디로 젊은이들의 미래는 녹색이다. 촛불의 미래 일자리는 녹색이다. 그리고 녹색 일자리의 핵심은 단연 농업이다. 보나르도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