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11월 13일입니다. 옅은 잿빛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던 1970년 11월 13일. 그날을 겪었던 사람들은 해마다 11월 13일만 돌아오면 가슴이 찢어지는 산고를 겪습니다. 무고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한 방울의 이슬이 되었던 어느 청년 노동자의 생생한 절규가 아직도 귓전을 후려치기 때문입니다.
전태일은 그저 단순한 항의나 분노의 표현으로 자신의 몸을 불태운 것이 아닙니다. 그는 노동하는 이웃이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라고, 노동자는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사람임을 선언해야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는 평화시장의 나이 어린 노동자들이 시들어 가는 것을 그냥 방관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시들게 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져 자신의 몸과 마음인 평화시장의 어린 노동자들 곁으로 갔습니다. 사랑과 진리의 책을 쓰는 대신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꿈꾸며 횃불을 들었습니다.
전태일의 헌신과 투쟁은 바로 사랑의 극한이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절절한 사랑과 평화의 정신이 있었기에, 사랑의 결실인 수많은 전태일들이 1970년대 내내 가슴을 찢고 태어났습니다. 전태일로 다시 태어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생명체들이 전태일이라는 모태신앙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노동운동에 뛰어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눈 맑고 귀 밝은 깨닫고 실천하는 자 전태일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바로 세우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전국 방방골골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11월 13일은 단순히 어떤 청년 노동자의 항의 분신을 기념하는 날이 아닙니다. 11월 13일은 다름 아닌 사랑과 평화의 날입니다. 사랑을 확인하고 우리가 사람임을 선언하는 날입니다.
전태일 이후 비로소 한국 노동운동은 반공 정신 병동이었던 박정희 독재 체제의 철벽을 뚫고 그 푸르른 잎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빨갱이 운동으로 금기시되었던 노동운동이 비로소 개화할 수 있었습니다.
전태일이 분신의 십자가를 메고 산화한 지 1년 뒤인 1971년 11월 22일 우여곡절 끝에 조합원 516명의 가입원서를 받아 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되었습니다. 이로써 파란만장한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투쟁과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이어서 1972년 5월에는 인천에 있는 동일방직에서 최초의 여성지부장 탄생과 함께 기존의 어용 노조가 민주노조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8월에는 서울의 한국모방(원풍모방) 지부가, 1973년에는 콘트롤데이타지부가, 1974년에는 반도상사 지부가, 1975년에는 YH무역 지부가 신규 민주노조로 속속 결성되었습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오늘날과 같이 수많은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벌이거나 수십만이 모이는 집회를 개최한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민주노조라고 부를 수 있는 노동조합의 숫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한국 노동운동의 원형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 운동의 질과 내용이 대단히 풍부하고 창의력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망 선고 직전의 한국 노동조합운동
그런데 오늘날 38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한국 노동운동은 겉으로는 번듯한 양복을 입고 얼굴은 멀쩡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참으로 삭막하고 처참하기만 합니다. 또다시 1970년 그 시절의 전태일처럼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게 결단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민주노동운동이 여름날의 나뭇잎처럼 푸르기만 해야 하는데, 실상은 암세포가 전신에 퍼져 사망 선고를 받기 직전의 환자로 전락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대의원대회에서는 비정규직에게 노조 문호를 개방하는 규칙 개정안이 예상대로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규칙 개정을 위해서는 대의원 3분의 2 찬성이 필요한데, 찬성표는 절반도 넘지 않았습니다. 영구 임대 아파트 사이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차량통행조차 막거나 아예 임대 아파트가 들어서지 못하도록 시위하는 강남의 일반 아파트 주민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행위였습니다. 이들이 어찌 자신은 점심을 굶으면서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시다들에게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었던 전태일 앞에 설 수 있는지 참으로 민망하기만 합니다.
어쩌다 한국 노동운동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이 시점에서 진실로 겸허하게 근본에서부터 다시 한국 노동운동을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노동운동을 하며, 노동운동의 궁극 목표가 무엇인지 곰곰이 다시 따져보아야 합니다. 임금이 오르기만 하면 노동자의 해방이 실현되는 것인지 되물어야 합니다. 너무나 자주 들어 이제는 아무런 감흥조차 나지 않는 상투어, 노동자가 해방되는 세상이란 도대체 어떤 세상인지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한국 노동운동은 전태일 앞에서 재탄생해야 하며, 불가피하게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늘 근본과 원형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처음처럼'의 비판의식을 갖고 있어야 건강함을 잃지 않게 됩니다. 한국 노동운동의 에너지 재충전은 전태일과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역동성과 활기, 그리고 초발심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농촌에서 올라와 그야말로 '자유로운' 노동자로 홀로 공장에 내팽개쳐졌던 노동자들이 노동 공동체를 형성하는 순간 역사는 바뀐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몇 천 명에 지나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강한 인간관계와 연대로서 뭉치는 것을 넘어서 공동체를 조직하는 순간 철벽처럼 거대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권력과 맞설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학습해야 합니다.
1970년대 민주노동조합은 사람과 사람의 진정한 결합이야말로 그 어떤 총칼과 권력 자원의 힘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새삼 각성하게 해 줍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몸담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 이후 노동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생활 속의 민주주의 운동과 지역자치운동, 여성운동과 소수자 인권운동 등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깊은 강물처럼 저류로서 흐르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공동체 사회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이같은 1970년대 민주노조의 전태일 정신과 그 공동체입니다.
노동운동의 재탄생, 공동체 노동운동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본주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공동체를 해체해야만 가능한 제도였습니다. 노동조합은 이처럼 해체된 공동체 성원들인 모래알같은 노동자들이 다시 새롭게 만든 공동체였습니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조직이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공동체운동의 씨앗이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민주노동운동을 관통하고 있던 가장 주요한 노동운동 이념은 그 근본 바탕이 공동체 이념이었습니다. 노동조합은 새로운 인간관계의 마당이자 새로운 공동체였습니다.
청계 노동자들과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노동조합의 소모임은 그 어떤 거창한 이념 학습의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일상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자신이 하나의 살아 있는 인격체로서 인정을 하고 인정을 받는 기초 공동체였습니다. 그에 바탕을 둔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가장 중요한 공동체로 발돋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1970년대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가장 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같은 공동체 정서입니다. 1987년 이후 울산의 현대 노동자들이 경험한 것도 이같은 노동공동체였습니다. 산업선교회와 가톨릭청년노동자회에 노동자들이 그렇게 몰려들었던 것도 이처럼 소모임이라는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본은 절대로 단순하거나 무력하지 않습니다. 자본은 국가도 무력화시킬 만큼 엄청나고도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리바이어던(Leviathan)으로 변신해 있습니다. 자본은 끊임없이 노동자 조직을, 새로운 공동체의 싹을 무자비하게 잘라버립니다. 지구상의 모든 공동체는 이미 해체되었거나 해체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자본에 대항해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작업은 사실 고통스럽고 지난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1970년대 민주노조의 노동자들은 그런 지난한 일을 처음부터 너무나 큰 기쁨과 각성으로 가득 차서 시작했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노동자는 비로소 사람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었고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동공동체가 퇴색되거나 사라져버린 서구의 노동조합은 그야말로 노동운동의 무덤일 뿐입니다. 노동조합이 새로운 공동체로서 자유로운 인간들의 상호부조 사회로 바꾸는 근거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누리고 또 평등과 사회정의가 확립되는 새로운 사회의 맹아가 되지 못한다면, 사회구조를 배우고 사회를 바꾸기 위한 학교가 되지 못한다면, 그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은 결국 노예의 노동조합과 노예노동자일 뿐입니다. 초기 노동조합의 공동체운동 이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서구의 노동조합은 그저 운동경기 팀처럼 하나의 사업체, 눈앞의 임금과 노동조건만 챙기는 이익단체일 뿐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노동조합도 어느새 그런 노예의 노동조합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1970년대 중앙정보부 제2국은 노동청과 경찰, 행정부서와 사용주까지 배후에서 조정하고 심지어는 고문까지 자행하며 민주노조의 활동을 정권 차원의 문제로 다루고 있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한국노총 위원장과 사무총장뿐만 아니라 각 산별 위원장까지 사실상 하수인으로 삼아 노동자들의 움직임을 일일보고 형식으로 보고받았습니다. 산별노조 위원장급은 중앙정보부로부터 한 달에 3~4000원의 기밀비를 별도로 지급받았습니다(당시 쌀 한 가마는 2000원 정도였습니다). 중정 요원은 한국노총의 각종 회의와 산별노조 회의에도 참석하여 주요 문건과 성명서 등을 사전에 검토하였고 위원장 선거에도 개입하여 중정과 밀착 관계에 있는 하수인들이 당선되게끔 조작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역사를 거꾸로 돌리고 있습니다. 한국노총은 다시 1970년대의 어용 한국노총으로 복귀하고 있습니다.
전태일, 새로운 공동체 노동운동의 오래된 미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전태일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성찰해야 합니다. 한국의 노동운동뿐만이 아니라 민주화운동, 시민사회운동도 어느새 사랑의 정신과 공동체 정신을 잃고 말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역사가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라면 우리는 전태일과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거울을 다시 꺼내 들어야 할 때에 이르렀습니다. 한국 노동조합이 노동운동 조직으로서 거듭나려면 무엇보다도 전태일과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다시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1970년대 민주노조가 그렇게 당연히 실천했던 공동체 운동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노동자들의 새로운 인간관계와 새로운 모임으로서 노동조합이 재정립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협동조합을 비롯해 공제조합 등등 다양한 노동자 조직의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자본은 노동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펼쳤던 협동조합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은 형제의 운동입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한 사람의 노동노예를 자유인으로 변혁시켰던 인간해방의 운동이었습니다. 억압과 착취의 인간관계를 사랑과 평화의 평등한 인간관계로 바꾸는 사회해방의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동체가 해체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애와 협동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던 공동체 운동이었습니다.
1970년대 민주노동조합의 역사를 다시 소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모임에서부터 시작해서 노동 공동체를 스스로 만들어 나갔던 전태일과 1970년대 민주노조의 역사는 우리가 다시 그 씨앗을 뿌려야 할 가장 중요한 역사의 자산입니다.
전태일과 1970년대 민주노동조합이 오늘의 노동운동, 나아가 개인의 삶과 이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에 던지는 절절한 호소문은 무엇이겠습니까.
비정규직의 깊고 깊은 한숨과 절망의 외침이 가슴을 찢는 오늘날 한국 노동운동은 다시 옷깃을 여미고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전태일과 1970년대 민주노조는 한국 노동운동이 앞으로 반드시 지향해야만 하는 공동체운동의 오래된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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