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규모에 달해있기 때문이다. 적자 규모가 지나치게 비대하다는 이야기는 이미 1990년대 말부터 계속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규모는 매년 큰 비율로 팽창했고, 2006년엔 GDP의 6.5%인 8000억 달러를 넘어 1조 달러 대를 넘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2007년 초부터 서브프라임 사태로 신용위기가 심화되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가 세계 금융시장을 휩쓸었다. 세계시장은 미국경제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이는 달러화(혹은 미국 금융상품)에 대한 수요 하락과 평가절하로 이어질 것이라고 학계와 언론계는 예측했다. 이와 함께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도 경상수지 적자규모를 줄이려면 달러화를 절하시킬 필요성이 객관적으로 존재했다.
이에 따라 실제로 8월초까지만 해도 달러화 가치의 대폭 절하는 시간문제로 간주되었고, 성급한 이들은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에 대해 토론하기 바빴다. 그러나 갑작스런 반전!
달러화가 불사조인 이유
8월 두 번째 주, 달러화는 서브프라임 사태의 폐허를 박차고 마치 불사조처럼 비상했다. 불과 일주일 동안, 달러화의 가치는 다른 주요 통화(유로화, 엔화)에 대해 3~4%나 치솟았다. 이에 따라 세계 언론에서는, 지난 7년 동안의 '약한 달러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설명들이 나오고 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기존의 조건들(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규모,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한 신용위기)이 변화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심지어 더욱 악화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가운데, '강한 달러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복잡한 질문이지만, 이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이 의외로 단순할 수 있다.
"미국의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야말로, 지난 10여 년 동안 세계경제질서의 중심축으로, 대다수 산업국가들의 이해가 걸린 사안이다."
즉, 미국뿐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대다수의 산업국가들이 미국 경상수지 적자의 증가 및 비대화로 '재미를 봤고', 그러므로 이 같은 시스템이 갑자기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미국 경상수지 적자의 구성
'경상수지 적자'란, 해당 국민경제에서 생산보다 지출(소비 + 투자) 규모가 더 클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즉,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란,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것에 비해 지나치게 소비하고 투자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미국의 저축률은 수년 전부터 사실상 마이너스 상태, 좋게 봐줘도 0% 선으로 떨어져 있다.
그런데 가계에서도 그러하듯이, '번 돈' 보다 '쓴 돈'이 많으면, 그 차액(적자)은 외부에서 빌려서 메워야 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2006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8570억 달러(맥킨지 연구소 추계)였다. 이는 그만큼의 돈이 미국 내에서가 아니라 해외에서 조달되어 경상수지 적자를 메워줬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나라가 어떤 방법으로 미국에 돈을 퍼준 것일까. 주로 동아시아와 유럽의 경상수지 흑자국과, 2002년 이후 유가 급등에 힘입어 엄청난 규모의 자본을 축적한 산유국들이 미국의 금융상품(국채를 중심으로 하는)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적자 메워주기'를 한 것이다. 일부 통계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경상수지 흑자국들이 국제시장에 흘린 순자본유출액(자본유출-자본유입) 중 70% 정도가 미국으로 들어가고 있다.(사실 엄청난 이야기다.) 또한 이런 '미국 적자 메워주기'에 가장 크게 공헌한 지역이 바로 동아시아(한국-중국-일본)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등 흑자국들은 미국만 좋은 일을 해준 것인가. 예컨대 '재주는 곰(아시아)이 부리고, 이익은 미국인들만 챙겼'단 말인가. 세계적인 자금과 상품의 싸이클을 차분하게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선 동아시아는 값싼 소비재를 미국에 수출해서 미국인들의 과잉소비를 지탱해준다. 그 대신 엄청난 규모의 무역흑자를 얻는다. 그리고 이 천문학적 규모의 무역흑자는 다시 미재무성채권(T-bond) 등 미국 금융상품에 투자되어 이 나라의 경상수지 적자를 보전하는데 사용된다.
제2차 브레튼우즈 체제?
이런 관계는 어떻게 보면, 미국과 동아시아의 '윈-윈 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은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 기조에 따라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높은 투자율을 향유할 수 있다. 동아시아는 이 구도 덕분에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과 대규모의 무역흑자를 챙길 수 있다.
또한 이런 국가간 싸이클을 가능하게 만든 중요한 조건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국가간 자본이동이 지난 10~20년 동안 매우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예전처럼 자본이동이 자유롭지 않다면, 적자를 메울 수 없는 미국경제는 이미 붕괴되거나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미국식으로 표현하자면, 해외 투자자를 유인할 수 있는 이 나라의 발전된 금융산업과 유연한 금융시장이다. 한때 2000여 년 전 로마인들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믿었다면, 21세기의 미국인들은 '세계의 모든 유휴자본(예컨대 순자본유출)은 미국 금융시장으로 통한다'고 믿는다. 예컨대 유가가 추가 인상되어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더 팽창해도, 적자보전엔 어떤 문제도 없다고 미국 금융자본은 생각한다. 유가 인상으로 산유국에 축적되는 수출잉여금 역시 결국엔 미국 금융시장으로 환류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금융시장이 공급과잉, 즉 유동성 과잉의 상태에 놓일 필요가 있었다.
2000년대 이후 세계의 총금융자산(주식, 채권, 은행예금 등) 규모는 매년 10% 이상 급격히 성장해왔다. 맥킨지 연구소에 따르면, 2006년 현재 세계의 총금융자산은, 전년도 대비 17% 상승한 167조 달러로, 지구 GDP의 350%에 달한다. 더욱이 이 금융자산들을 원천으로 하는 파생금융상품의 명목가치는 모두 477조 달러에 이를 정도다.
그리고, 이런 모든 조건들은 미국 정부가 브레튼우즈 체제의 청산(1970년대 중반)과 금융혁신(1980년대), 지역적 금융위기들의 시대(198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를 거치면서 일관되고 과격하게, 세계적 범위에서 추진해온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미국은, 한편에서 세계의 수출상품을 흡수하는 '소비의 풀(pool)', 다른 한편으로 세계의 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국제금융센터)로 자국의 위상을 구성했다. 그리고 이런 '구성'의 내적 핵심엔 '미국 금융(산업 및 시장)'이 존재하고, 외적 네트워크로는 '동아시아-미국 간 상품·금융의 싸이클'이 존재한다.
그래서 피터 가버(Peter Garber) 등 도이치은행의 이코노미스트들은 이런 동아시아-미국 관계를 '제2차 브레튼우즈 체제'라고 명명한 바 있다. (동)아시아는 '무역흑자와 경제성장'을, 미국은 '과소비와 적자 보전'을 챙기는, '암묵적 계약'이 두 지역 간에 체결된 셈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미국 경상수지 적자 규모를 줄이거나 심지어 균형수지로 되돌리는 흐름(이엔 필연적으로 달러화 절하가 포함된다)은, 미국과 다른 나라들 간에 금융·상품 싸이클을 무너뜨리면서, '제2차 브레튼우즈 체제'의 파괴로 귀결될 것이었다.
"이대로 가는 것"이 대안?
8월초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달러가치 절하는 미국의 물가를 인상시켜 소비 규모를 크게 줄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는 소비 부문이 주도하는 미국경제의 장기 침체는 물론 수출시장을 상실한 (동)아시아의 불황과 구조조정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컸다.
더욱이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후 경상수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수출을 촉진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 경우, 미국은 세계시장에서 비교우위를 지키고 있는 하이테크 부문(반도체, 컴퓨터, 의료기기 등)과 서비스 부문(금융, 비즈니스 서비스)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평가절하된 달러는 미국의 수출 경쟁력을 한층 강화할 것이었다. '강력한 수출국가' 미국은, 동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캐나다-멕시코 등의 나프타 국가들에게 공히 치명적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존재이다. 미국이 다른 나라에 대해 서비스 부문의 개방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는 것이다.
결국, '달러가치 절하'로 상징되는, 지구적 상품·금융 싸이클의 수정은 미국뿐 아니라 모든 국가에 일정한 타격을 가할 것이었다. 즉, 경상수지 적자국(미국)과 흑자국(동아시아와 서유럽, 산유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문제점에 따라, 저명한 경영컨설팅 회사인 맥킨지 등이 제기한 대안이 바로 "지금 이대로 가자"였다.
맥킨지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 유휴자본의 70%를 빨아들이는 경상수지 적자국(미국)과 매년 수천억 달러를 금융상품을 구입하는 방법으로 미국에 갖다 바치는 흑자국 간의 '국제적 불균형'은 큰 문제가 아니다. '제2차 브레튼우즈 체제'론에서 봤듯이 '윈-윈 게임'인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이런 구조를 불건전하게 여기는 '인식'들이다. 즉, 세계 각국은 미국 경상수지 적자를 두고 수선을 떨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용인해줘야 한다. 앞으로도 미국에 상품을 계속 수출하고, 이렇게 획득한 무역흑자로는 미국의 금융상품을 지속적으로 구입하면서 경상수지 적자를 메워줘야 한다.
더욱이 맥킨지에 따르면, 현재의 추세대로 갈 때 오는 2012년의 미국 경상수지 적자 규모는 GDP의 9%인 1.6조 달러에 이르게 되겠지만,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같은 해 미국 이외 국가들의 경상수지 흑자가 모두 2.1조 달러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런 흑자들은 국제금융시장을 경유해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발전된 금융시장을 갖고 있는 미국으로 흘러들어와 경상수지 적자를 보전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최근 미국 달러화의 평가절상은 사실상 '제2차 브레튼우즈 체제'의 연장을 예고하는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를 위한 '암묵적' 국제협약이 형성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유럽중앙은행(ECB) 트리세 총재는 8월7일, "유럽경제의 성장세가 3분기에 특히 약화될 것"이라며 이 지역의 금리인상 가능성을 부인했는데, 이는 사실상 달러화의 평가절상을 측면 지원한 것이다.
세계금융센터로서 미국의 지위
결국, 그동안 미국의 지위, 즉 세계 수출상품의 블랙홀이자 세계 잉여자금의 풀(pool)로서 미국의 역할을 당분간 인정하고 유지하자는 이야기다. 이에 따라 미국과 동아시아는 일단, 가까운 미래에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던, 가혹한 국내외 구조조정을 일시적이나마 연기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편, '강한 달러' 시대는, 세계 자금흐름의 축(지구적 금융센터)으로서 미국의 지위가 더욱 강화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다른 국가들이 세계금융센터로서 미국의 지위를 계속 용인해준다는 이야기도 된다. '강한 달러'는 그 자체로 '세계의 돈을 빨아들이는 금융센터는 무너지지 않는다'(일종의 대마불사)는 법칙과 '금융센터 모델'의 유효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이 이후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불황을 피해갈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 FRB는 달러 강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계속된 금리인하에서 금리인상으로 돌아서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는 미국 가계 부문의 소비를 더욱 침체시킬 가능성이 높다. 또한 미국 수출 제조업 부문과 이에 관련된 고용도 지속적인 침체를 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미국은 점점 더 지구적인 자금의 환류와 이에 대한 관리로 먹고사는 국가로서의 체질을 강화하게 될 것이다.
또한 미국 금융센터 모델의 유효성은, 세계적으로 진행되어 온 '지역 금융센터 지위 쟁탈전'을 더욱 격화시킬 것이다. 예컨대 동아시아에서는 이 지역의 금융센터 자리를 두고 상하이와 도쿄, 싱가포르, 홍콩이 경합하는 가운데 타이완과 서울이 상당한 거리를 두고 추격하는 국면이 전개될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금융중심지 정책과 공기업 민영화, 의료, 교육 등 사회적 서비스의 상업화 등을 추진하는 이명박 정부에겐 매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강한 달러'는, 미국경제에 대한 '억지로 조작된 신뢰'에 기반하고 있다. "유로지역 등 다른 국민경제가 미국보다 더욱 침체될 것"이라는 근거 박약한 믿음이 달러를 부양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미국 정부와 금융계가 서브프라임 사태를 연착륙시킬 수 있다면, 그동안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스템은 또 다른 국면에서, 이전과 조금 다른 형태로 계속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사태가 미국경제에 대한 '억지로 조작된 신뢰'를 무너뜨릴 강도로 전개된다면, 그리고 미국이 국내소비 부문을 부양할 수 있는 특별한 대책을 확립하는데 실패한다면, 세계는 지난 몇 년 동안 창출된 수백조 달러 규모의 과잉 유동성을 정리하는, 고강도의 지구적 구조조정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다. 또한 이 경우엔 서브프라임 사태 이전의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벤치마킹해왔던 한국의 미래 역시 매우 불확실한 국면에 접어들게 될 것이 틀림없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