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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과 바람과 비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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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과 바람과 비의 왕국

[덴마크에서 살아보니ㆍ<5>]덴마크의 사계절

3월이면, 한국에서는 개나리, 진달래가 막 피어나기 시작할 때다. 하지만 같은 시기, 덴마크는 깊은 겨울이다. 사람들은 두터운 겨울옷 차림이고 공기는 얼음물 속처럼 차갑다. 게다가 회색구름이 천막이라도 친 듯 낮게 드리운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다. 가히 구름과 바람과 비의 왕국이다.

햇살이 비치면, 일제히 고개를 드는 사람들

비가 내리는데도 아랑곳없이 우산도 쓰지 않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날씨 속에서 살다보니 비를 좀 맞아도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다. 또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목에 여러 겹의 머플러를 둘둘 두르고 있는 것이 멋있어 보인다. 하지만 멋을 부리기 위해 두른 게 아니다. 바람이 거센 덴마크 기후 때문이다.

그래도 봄이라고 시내 카페에서는 가게 바깥에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는다. 짙은 회색 톤으로 금방 비라도 쏟아질 것 같은 날씨지만, 바다에는 요트가 떠있고 카약을 젓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보다 세 배나 잘 산다고 하지만, 만일 화창한 날씨를 재화로 친다면 덴마크는 가난해도 한참 가난한 곳이다.

안개가 끼고 비가 부슬부슬 오다 말다하는 날, 같이 나들이를 하게 된 덴마크인은 그곳의 나쁜 날씨와 보잘 것 없는 풍경을 미안해 하면서 자기들도 날씨 견디기가 힘들어 햇볕을 찾아 여행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다 한 번 '쨍'하고 해가 나는 날이면 온 동네사람이 모두 공원으로 몰려나와서 해바라기를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다 어디 있었을까'하고 신기할 정도다. 그 사람들이 일제히 해가 있는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고요히 햇볕을 쬐는 모습을 보노라면 태양 숭배교 신자들의 엄숙한 의식을 보는듯한 기분이다.

4월이 지나 5월이 되면 가까운 숲에서는 어린 새싹들이 아우성치며 올라온다. 연초록 바다였던 숲이 금세 짙은 녹색의 정글로 변한다. 숲 또한 숨가쁘게 해를 쫓아간다.

아름다운 여름, 햇살은 대지의 연인

"여름에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날씨가 나빠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하던 덴마크인이 자랑한 대로, 여름에도 비가 줄줄 오는 날이 많지만 그 사이 사이 해가 나면 덴마크는 과연 딴 나라처럼 아름다운 곳으로 변신을 한다.

맑은 물로 헹궈서 건진 듯 깨끗한 공기와 투명한 햇빛 아래에서 주위는 찬란하고 눈부시게 아름답다. "해가 날 때 건초를 말려라"라는 영어 속담이 덴마크에서야말로 적격이다. 덴마크에서는 해가 나면 만사를 제치고 해와 놀아야 한다. 아무도 햇볕을 즐기려는 덴마크인을 붙잡을 수 없다.

덴마크의 해는 마치 대지와 연애하는 사이 같다. 춘분부터는 하루 하루 해가 눈에 띄게 길어진다. 달아오르는 연인처럼 해는 꼭두새벽에 달려왔다가 돌아가는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그 열정이 최고조에 달하는 하지 무렵에는 새벽 두시부터 밝기 시작해서 저녁 10시가 되어도 어두워질 줄 모른다. 그러나 하지가 지나면 열정은 슬그머니 식기 시작한다. 해가 머무는 시간이 눈에 보이게 짧아진다. 늦게 왔다 빨리 가버리는 연인. 구름과 바람 속으로 숨어버리는 연인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 덴마크 날씨는 풍력발전에 제격이다. 덴마크는 풍력발전량과 관련 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풍력발전기도 전부 덴마크 산이다. 덴마크는 한국과 비슷한 시기인 1980년대 초, 풍력발전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이 화석연료와 핵발전 등에 눈을 돌린 사이, 덴마크는 세계적인 대안 에너지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햇볕 가게'를 찾는 사람들…어디서나 반짝이는 촛불

"겨울은 얼마나 캄캄하고 길다고요... 지내기 힘들걸요."

아름다운 여름 날에 덴마크인은 겨울을 경고한다. 아닌 게 아니라 8월 중순만 되어도 가을을 예고하는 비가 오고 추분이 지나면 날은 이내 캄캄해지기 시작한다.

잎이 성글어진 숲에서 '어 해가 났나?' 하고 놀라서 보면 노랗게 물든 자작나무 잎을 착각한 것일 뿐 하늘은 음산한 회색이다.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린다. 밖은 아예 보지 쳐다보지 않는 게 낫다. 어둠은 점점 빨라져서 덴마크 인들은 낮에도 책상에 작은 촛불을 켜놓고 일을 한다. 물론 조명용은 아니다. 오랜 전통이 녹아 있는 장식용이다.

덴마크 일상생활에서 초는 떼어놓을 수가 없다. 해가 귀하니 초라도 켜서 그 긴긴 어둠을 이겨내려는 것이다.

그래서 초를 담는 형형색색의 매혹적인 촛대가 어디에나 넘쳐난다. 초를 켜지 않는 식탁이란 생각할 수 없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촛불과 램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사람들은 초와 램프로 장식하려고 일부러 어둠을 만들어 냈나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쁜 초를 켜놓아도 역시 해만은 못하다. 길거리에 'SOL'이라고 쓰인 간판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데 인공햇볕을 쬐어주는 가게다. 회사에서도 겨울에는 햇빛 파장을 내는 전구를 켠다. 우울증과 무기력을 막기 위해서다.

'팬 케이크'같은 대지 위로 떨어지는 '여우눈'

해가 대지와 가장 사이가 멀어진 동지 무렵에는 오후 두시 반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오후 5시면 캄맘한 밤이고 6시면 깊은 한밤중이다.

어둠에도 차이가 있어서 초저녁이 제일 캄캄하고 밤이 깊어갈수록 어둠이 엷어진다. 해가 오전에는 강렬하고 오후에는 점점 약해지듯.

덴마크는 산이 없어서 평평하기만 하다. 덴마크인들은 팬 케이크처럼 평평하다고 말한다. 덴마크에도 겨울에는 눈이 오는데, 눈도 꼭 비처럼 온다. 하늘하늘 눈송이가 날리는 것도 아니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싸래기보다 큰, 녹두알만한 눈 알갱이가 비가 내리듯 죽죽 퍼붓는다. 심지어 해가 나고 있는데도 눈이 내린다. 여우눈이라고 할까.

"언제까지 덴마크의 맑은 공기를 부러워해야 하나"

더운 나라에서 모자와 썬글라스가 필요하듯 덴마크에서는 겨울에 날이 춥지 않은 것 같아도 털모자와 목도리를 꼭 가지고 다녀야 한다. 고작 영하 5도 정도의 기온이지만 이곳의 얼음 같은 공기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시리게 한다.

덴마크와 비교하면 한국은 양지 바르고 해가 잘 드는, 참으로 살기 좋은 땅이다. 그러나 공기가 나쁘다. 덴마크와 비교하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오염에 찌들어있다.

덴마크를 방문한 한국인들은 우선 파란 하늘과 깨끗한 공기에 감탄한다. 나는 속으로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파란 하늘과 맑고 깨끗한 공기가 있었다고 외친다.

하지만 우리는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를 자동차와 개발에 다 내주고 말았다.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가 이제는 외국에나 가야 맛볼 수 있는 비싼 재화가 됐다. 언제 다시 한국에서도 짙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에 감탄하게 될지 궁금하다.

필자 이메일 : kumbikumbi2@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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