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바로세우기'는 유명한 정치지도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전쟁 당시 영문도 모른 채 숨져간 수많은 민초들의 명예를 살리고 원한을 풀어주는 일이야 말로 진정한 역사 바로세우기이다.
그런 노력을 스스로 하고 있는 마을이 있으니,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마을.(☞관련 기사: "우리는 '용서와 화해'로 간다" ) 이들이 스스로 펼친 노력을 국가가 인정해줬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7일 전원위원회를 통해 '영암 구림 첫포위사건'에 대해 "경찰이 불법으로 주민들을 사살한 민간인 희생 사건"이라며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경찰에 죽은 구림마을 희생자들 "좌익세력 아닌 무고한 민간인들"
'영암 구림 첫포위사건'은 1950년 10월 17일 좌익 토벌작전을 벌이던 경찰이 구림마을에 진입해 민간인 62명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했다는 사건으로, 진실화해위는 "당시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인공치하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희생자는 빨치산이나 좌익유격대 활동과 무관한 민간인이었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사건 기록, 경찰관 및 마을 사람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구림마을 비극의 원인에 대해 "경찰의 무리한 작전"이라고 규정했다.
진실화해위는 제적등본 등을 통해 당시 사건의 희생자 수가 44명이라고 확인했다. 유족들의 주장보다는 적은 수치다. 하지만 진실화해위는 "유족들의 증언이나 기존 조사를 종합해보면 희생규모는 44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된다"고 설명했다. 기록에도 남아있지 않고 후손들 모두 마을을 떠나 확인하지 못한 숫자가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구림마을에서 경찰에 의해 이와 같은 대규모 민간인 희생이 이뤄진 배경에 대해 진실화해위가 설명한 대목이 눈에 띈다. 이 마을의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6.25 당시 구림마을이 처했던 정치적, 지정학적 배경을 이해해야만 한다.
'공산당 마을'로 몰려 민간인도 무차별 사살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구림마을은 해방 이후 좌익 세력이 강했던 곳으로 한국전쟁 시기 인공치하에서 좌익세력들의 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공산당 마을'로 인식됐다.
또 지정학적 위치도 '공산당 마을'이라는 이름을 얻는데 한 몫 했다. 전남지역에서 군경의 수복작전이 시작되자 목포, 무안 등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이 금정면 국사봉과 월출산으로 입산하기 위해 월출산 도갑사 입구인 구림마을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모여 든 좌익유격대가 구림 지역의 경찰서, 학교, 관공서 등 경찰병력이 주둔하기 적합한 장소는 대부분 불태웠으며, 영암군 지역에서 우익인사와 가족, 기독교인 등을 살해하는 사건이 많이 발생해 경찰과 우익단체가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
구림 지역에서도 '첫포위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950년 10월 7일 우익인사와 교인들 28명이 몰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다만 진실화해위는 "구체적인 증거와 진술이 없어 이 사건이 구림 첫포위사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배경을 종합해보면 경찰 입장에서는 영암의 서남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 토벌을 위해서는 좌익의 근거지로 인식되던 구림의 수복이 반드시 선결돼야 한다는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전시라도 민간인 무차별 살해는 명백한 위법
그리고 결국 경찰은 무리한 작전을 감행했다. 진실화해위는 "경찰은 주민들의 구체적 좌익혐의 등을 조사하거나 판별하는 절차도 없이 민간인에게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했다"이라며 "본 사건은 경찰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적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주민들을 불법으로 사살한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이라고 결론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비록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경찰 측이 민간인 통제에서 법적 절차를 지키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비무장인 민간인들을 공비토벌작전이라는 명분하에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것은 명백한 위법행위"라고 설명했다.
당시 사건이 일어나던 날 '경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구림의 면 자위대원과 적극적 좌익활동가들은 모두 도망갔으나 '죄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나 '좌도 우도 아닌 중간자적 입장'에 있었던 사람들만 남아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다만 당시 사건의 명령자를 찾아내진 못 했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가해부대는 김준병 경위가 지휘하는 영암 서남지구 공비토벌부대"라며 "그러나 지휘관이었던 김준병 경위가 직접 민간인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당시 토벌부대는 3개 소대 100여 명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정식경찰은 30여 명이었고, 우익단체(대한청년단 등)원이 70여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사과하고 위령사업 지원해야"
진실화해위는 이와 같은 진실규명 결정과 함께 정부에 대해 "희생자와 유족에게 사과하고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는 또 위령제, 위령비 건립 등 각종 위령사업을 할 수 있도록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행정적·재정적 지원과 희생자들의 사망일자와 호적 기재일자가 상이한 경우 유가족의 희망에 따라 관련법규를 올바르게 정정할 것을 권고했다.
희생자들의 실제 사망일자와 기록상 사망일자가 다른 것은 사건 사망자들의 유족들이 가족이 경찰에 의해 사살됐다는 이유만으로 '좌익 가족'으로 몰릴 것이 두려워 사망 날짜를 10월 17일을 피해 관공서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진실화해위는 '재발방지 조치'로 민간인 희생 사건을 정부의 공식 한국전쟁사 기술에 수록하도록 하고, '영암경찰사', '영암군지' 등에도 이 사건 내용을 삽입해 과거를 반성하고 지역 주민들 화합에 기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밖에 "경찰과 공무원을 상대로 평화인권교육을 강화하고, 전시 비무장 민간인 보호와 인권보장을 위한 법과 제도의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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