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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도 희생자도 역사 앞에선 모두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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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도 희생자도 역사 앞에선 모두 피해자"

구림마을, 6.25 희생자 합동위령제…'자발적 화해' 첫 사례

"아따, 이 좋은 것을 이제서야 허네."

최삼순 할머니(75)는 억울하게 숨진 넋을 달래는 씻김굿을 지켜보며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6.25 때 오빠가 마을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최 할머니는 당시 열아홉 꽃다운 나이였고, 오빠는 스물아홉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최 할머니는 "그 때 죽은 오빠를 생각하면 늘 억울하기도 하고 가슴이 허전했는데, 이렇게 마을에서 굿도 하고 합동으로 제사도 지내주니까 이제사 마음이 한결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좌·우익 희생자 합동 위령제…'용서와 화해'의 큰 걸음

18일 오전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마을의 한복판에 위치한 '회사정(會社亭)'에서는 '6.25 전후(前後) 구림지역 희생자 합동위령제 및 위령비 건립을 위한 고유제'가 열렸다. 좌우익에 의한 희생자가 모두 발생한 마을은 전국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이들 양측 희생자들을 '함께', 그것도 외부 기관의 지원 없이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위로한 행사로는 6.25전쟁 이후 첫 사례로 기록될만한 것이었다.

간간이 비가 뿌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날 합동위령제에는 마을 주민들과 출향인사들을 합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유도 모른 채 억울하게 숨져간 혼령들을 위로하고 남은 유가족들의 화해를 다짐했다.

16세기에 처음 건립된 회사정은 일제시대 이 마을 3.1 만세운동의 발상지이자 8.15 축하행진의 출발지로서 마을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주민들이 모여 회의나 행사를 갖던 전통적인 마을의 중심. 마을 주민들은 해묵은 과거를 털고 화합의 미래를 향해 출발하는 장소로 이곳을 선택한 것.
▲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마을의 주민들은 18일 스스로 마련한 6.25 전후 희생자 합동위령제 및 고유제를 큰 관심 속에 지켜봤다. 사진은 위령제의 식전행사로 희생자들의 위패 앞에서 진행된 씻김굿.ⓒ프레시안

이날 위령제가 열린 회사정에는 는 6.25 당시 좌익에 의해 희생된 주민들과 우익에 의해 희생된 주민들 가운데 현재까지 파악된 192명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그 앞에 젯상이 차려졌다. 위령제에 앞서 회사정 주변에는 20여 개의 색색 만장이 내걸려 제사 분위기를 한껏 엄숙하게 만들기도 했다.

한 시간 반 동안 이 마을의 '당골' 등에 의해 진행된 씻김굿에 이어 마을의 원로들이 진행한 합동위령제가 다시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마을 주민들은 위령제의 축문을 통해 "늦었지만 영령들을 위하여 제를 올리오니 저승에서나마 그동안 씻기지 않고 내려 오던 모든 증오와 원한, 분노와 적대, 오해와 편견을 말끔히 씼어버리고 편안히 잠드소서"라고 해원(解寃)을 기원하며 "이제 우리들이 서로 손잡은 따뜻한 얼굴들을 그윽한 미소로 바라보아 주소서"라고 빌었다.

"역사 속에 묻히기 전에 용서와 화해를"

이어 이날 행사를 주관한 '위령비건립추진위원장' 최재상 씨는 개최사를 통해 "일제가 물러나고 나라가 해방되면서 이념적 갈등과 혼란이 찾아왔고 구림도 이를 비껴갈 수 없었다"고 회고한 뒤 "6.25 전쟁을 겪으면서 죄 없는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됐으나 가해자도 희생자도 역사 앞에서는 모두 피해자였다"고 천명했다.

최 위원장은 이어 "6.25 전쟁을 겪은 분들이 돌아가시고 6.25를 경험한 세대가 줄어들면서 6.25 전쟁은 점점 역사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역사 속에 묻히기 전에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용서하며 화해하기 위해 우리 위원회에서는 용서와 화해의 위령비를 세우려 한다"고 밝혔다.

이번 위령제가 지난 4월 이 마을 민간인 희생의 개략적인 과정과 그 희생자들의 명단을 담은 마을지 <비둘기 숲에 깃든 공동체 호남명촌 구림>(리북 펴냄)의 발간에 이어 주민들 스스로 추진하는 위령비 건립사업에 본격 시동을 거는 자리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구림 주민들은 현재 2010년 위령비 건립을 목표로 △250~300명에 이르는 6.25 전후 희생자 명단의 완비 △현대사 마을 인물들의 열전(列傳) 간행 △마을 공동재산 가운데 위령비 및 기념공원 건립부지 마련 △기타 재원 마련을 위한 모금 등의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반세기 염원의 '결실'…위령비 건립의 '큰 걸음'
▲ "늦었습니다. 어르신들." 6.25 전후에 숨진 희생자들 가운데 현재 명단이 확인된 192명의 위패를 한 곳에 모신 가운데 위령제가 열렸다. 이날 합동제사는 마을의 원로들이 진행됐다.ⓒ프레시안

이같은 합동위령제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일은 아니다. 마을의 몇몇 원로들이 10여 년 전부터 '당사자들이 세상을 뜨기 전에 마을의 불행했던 과거사를 객관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정신 아래 위령사업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고, 지난 4월 그 첫 결실로 마을의 역사를 담은 <비둘기 숲에 깃든 공동체 호남명촌 구림>이 간행되기에 이르렀던 것( ☞프레시안 4월5일자 기사 참조).

그렇지 않아도 400년이 넘은 대동계의 존재와 6대 성씨의 견제와 균형이 마을이 강력한 전통을 형성하고 있어 타 지역과 달리 6.25 이후 마을 주민들 간에 거의 갈등상이 노출되지 않았던 것이 이 마을의 특징이다. 여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및 그 가족들이 비교적 '서로 용인'하는 분위기를 형성해 온 것도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 역시 마을 주민들 스스로 기금을 걷고 스스로 조사 집필해 완성해낸 것으로, 위령비 건설은 이미 이 책을 편찬할 당시부터 세워둔 목표였고, 그 '첫 걸음'으로 이날 위령제를 지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날 합동위령제에 위패가 마련된 희생자는 모두 192명. 이는 지난 4월 <비둘기 숲…>에 기재된 사망자 명단 137명과 비교할 때 이미 55명이나 늘어난 것. 벌써 반년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조사 및 확인 작업이 진척된 셈이다.

그러나 그 중에는 '산촌댁'이나 '번들댁' 등과 같이 실명이 확인되지 않은 채 주민들의 기억에만 희미하게 남은 인사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게다가 유족들이 마을을 떠나 연고자가 남아 있지 않은 경우에는 희생자 명단 및 그 사망 경위를 낱낱이 밝혀내는데에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

이들은 마을 주민 및 출향 인사들을 상대로 한 조사작업을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동시에 11월 중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도 조사를 신청할 계획이다.
▲ '우리 형님 이름은 어디에.' 한 유족이 6.25 때 희생된 가족의 이름을 하나하나 위패 속에서 짚어보고 있다.ⓒ프레시안

지금까지 주민들의 기억과 구전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당시 구림지역에는 900여 가구 4000여 명이 살고 있었고, 이 가운데 250~300명이 전쟁의 교전행위와 관계 없이 희생됐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에 대한 신청도 이처럼 조사과정에서의 조력과 국가 차원의 명예회복 및 종합대책에서 누락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조치일 뿐 "개인적으로 국가로부터 배상 또는 보상을 받겠다는 기대는 어느 누구도 갖고 있지 않고 마을에서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이 추진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어느 누구도 개인적 배보상 기대 안해"

한편 구림마을 주민들의 움직임이 <비둘기 숲…> 간행을 계기로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진실·화해위도 이같은 마을 단위의 자발적인 과거사 정리 및 화해 움직임이 우리 사회에서 아직까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중요한 모델을 제공한다고 보고 관계자들을 이날 합동위령제에 직접 파견하기도 했다.

이날 노무현 대통령과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도 조화를 보내는 등 관심을 나타냈다.
<합동위령제 이모저모> "이미 나는 다 용서했다"

○…위령제가 진행된 18일 오전 내내 비가 오락가락하자 마을 주민들은 감회에 젖은 가운데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넋이 눈물을 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식전행사로 씻김굿이 진행되는 동안 삼삼오오 회사정 근처에 자못 엄숙한 표정으로 모여 섰던 주민들 가운데 한 사람이 "돌아가신 분들이야 저 세상에서 이미 다 화해하고 어울려 잘 지내실 텐데…"라고 말을 던지자, 다른 주민이 "그 동안 미처 화해 못한 후손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서 손을 맞잡는 걸 보면서 영령들도 기뻐서 눈물을 흘리는갑제"라고 받았다.

○…씻김굿을 지켜보며 내내 눈물을 흘리던 최삼순 할머니는 위령제가 끝난 뒤 제단 앞으로 나와 굽은 허리를 힘들게 펴며 위패들 속에서 오빠의 이름을 찾았다.

최 할머니는 마침내 오빠의 이름을 찾아낸 뒤 위령제를 주관한 위원회 인사들에게 "고맙네, 고맙네. 내 이제사 저 세상에 가서도 오빠를 볼 낯이 생겼구만"이라고 말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
▲ 합동위령제 직후 '좌익에 의해 희생된 28인'의 묘에서는 별도의 제사가 진행됐다.ⓒ프레시안

○…위령제가 끝난 뒤 마을 초입에 위치한 이른바 '28인 묘'에서는 또 한 차례 별도의 제사가 열렸다.

이곳에 안장된 28인은 좌익 세력에 의해 1950년 10월 7일 마을 안의 한 곳에서 집단학살된 인사들로 대부분 기독교인이나 우익인사의 가족들이었다. 10월 17일 무장경찰들에 의한 마을주민 96명 무차별 학살에 꼭 열흘 앞서 벌어진 참극이었던 셈이다.

그 동안 무장경찰 또는 군인 등 공권력에 의한 희생자들은 적어도 1990년 전후의 시점까지는 한국사회의 분위기 상 한 곳에 매장되거나 '집단적인 기억'으로 언급되기 어려웠던 게 사실. 반면 좌익세력에 의한 희생자들인 이 28인을 위해서는 마을 입구의 가장 눈에 잘 띄는 장소가 합동묘소로 제공되고 기념비도 두 개나 세워졌다.

좌우익 희생자들을 위한 합동위령제를 매년 지내기로 한 위원회 측은 차제에 28인묘의 제사도 직접 주관하는 것이 '보다 나은 모양새'일 수 있겠다고 보고 이들 28인의 유가족들과 협의해 흔쾌히 동의를 얻은 뒤 이날 그 첫 제사를 올린 것이다.

○…이날 합동위령제가 끝난 뒤 위령비건립추진위의 최영걸 부위원장(55)이 소개한 선친 대원 씨(1986년 작고)의 경우는 구림 마을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용서와 화해의 정서'를 보여주는, 아주 시사적인 케이스 가운데 하나다.

대원 씨는 9.28 서울 수복으로부터 20일 가량 지났음에도 월출산 인근에선 아직 좌우익이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던 1950년 10월17일 무장경찰 3개 소대가 좌익 소탕을 명분으로 이 마을로 출동해 마을 주민 96명을 무차별 학살한 날을 잊을 수 없었다. 마을 초입에서 이발소를 경영하던 부친 한섭 씨(영걸 씨의 할아버지)가 바로 그날 영문도 모른 채 불려나가 무장경찰대의 총격에 숨지는 장면을 직접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대원 씨가 수십 년이 지나 띄엄띄엄 가족들이 묻는 말에 답하는 형식으로 전한 그날의 상황은 무장경찰대에 속해 있던 한 마을 사람이 그날 이발소로 들어와 한섭 씨에게 "잠깐 나와보라"고 불러냈고, 이미 마을 안팎에서 총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미심쩍어 하던 한섭 씨가 아들 대원 씨를 향해 손짓 하며 "뒤꼍 땔감나무 속에 숨으라"고 이른 뒤 마지못해 이발소 문을 나서자 곧바로 무장경찰들이 총격을 가해 쓰러졌다는 것이다.

당시 26세이던 대원 씨는 나뭇단 속에 숨은 채 아버지가 길 위에서 피를 흘리며 숨져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고, 그날의 기억은 일생의 한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원 씨가 가족들에게 전한 '그날'의 상황은 여기까지뿐이다. 영걸 씨는 대원 씨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덧붙여 물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상황을 모두 지켜봤으니 할아버지를 불러낸 사람을 알지 않느냐?" 대원 씨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걸 네가 알아서 덕 될 일이 없다. 나는 이미 그 사람 다 용서하고 잊어버렸다. 너희도 그런 문제에 더 이상 신경 쓰지 마라."

대원 씨가 워낙 단호하게 입을 다물어 버리는 바람에 영걸 씨도 더 이상은 이 문제로 아버지를 채근할 수 없었다. 영걸 씨는 이와 관련해 "사실 할아버지를 불러낸 장본인으로 추정되는 분이 전쟁 이후 여전히 마을에 살면서 우리 가족을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전했다. 영걸 씨의 설명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는 "그 분의 사후 행동이나 그 분의 이름을 당신의 기억 속에 묻고 가신 아버지의 뜻을 함께 되새기며 오늘 합동위령제에 임했다"면서 "이제는 각 당사자들이 흐르는 세월 속에 그렇게 내심 다 정리해 놓고서도 스스로 털어내지 못해 뭔가 마음 한구석에 아직도 응어리처럼 남겨두고 있는 한을 마을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털어버릴 수 있는 방법을 지금 찾고 있는 것"이라고 추진위 사업의 성격을 설명했다.

○…위령제가 열린다는 소식에 경기도 포천에서 바쁜 비닐하우스 농사 일 가운데 짬을 내 고향 구림마을을 찾은 최진규 씨(73)는 행사 직후 위패들 가운데 피붙이들의 이름을 짚어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6.25전쟁을 전후한 기간에 한 마을에 살던 자신의 친형 1명과 사촌형 4명, 사촌형수 2명 등 모두 7명이 학살됐으며, 학살의 주체는 좌우익 양쪽 모두라는 것.

최진규 씨는 이렇게 5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중에도 "이런 일이 다시는 없어야지…. 원한은 원한을 부를 뿐이야"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한 최 씨는 "사람인 이상 마음 속에 왜 응어리가 없겠소만,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결국 스스로 무너지는 법"이라고 지적하며 "이미 구림마을의 화해는 90%는 다 이뤄졌고 나머지 10%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날 합동위령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최재상 위령비건립추진위원장(69)이 "6.25전쟁의 가해자도 희생자도 모두 역사 앞에서는 피해자"였다고 강조하면서 "이 6.25전쟁이 망각의 역사 속에 묻히기 전에 이 역사의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용서하며 화해하기 위해 '용서와 화해의 위령비'를 세우겠다"고 선언한 대목.

전쟁 기간 중 전투경찰대에 누님을 잃은 유가족이기도 한 최 위원장은 이 마을에서 농협조합장, 면장, 군의원 등을 두루 역임한 뒤 지금은 40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구림 대동계의 유사(有司)로 활동 중인 마을의 중추인물.

그는 "지금도 음력 9월6일이면 동시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20여 가구 이상 된다"고 소개하면서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진행하고자 하는 위령과 화해의 사업은 어느 한 편의 희생자만을 염두에 두거나 편을 가르는 것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예컨대, 2010년 건립 목표로 사업을 진행중인 위령탑을 두고서도 한때 '좌우익에 의한 희생자 각각의 이름을 새겨넣은 탑 두 개를 마주 보게 세우자'는 등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그렇게 해서는 진정한 화해의 정신을 구현할 수 없다며 모든 희생자의 이름이 함께 어우러지게 하자고 주장한 것도 최 위원장이다.

또 이날 합동위령제에서 3명의 헌관(獻官)으로 마을 대동계를 대표하는 인사와 좌우익에 의한 희생자 유가족을 모두 아울러 선정한 것도 그같은 세심한 배려의 결과로 알려졌다.

▲ 수령 400년 이상의 소나무들에 둘러싸인 구림마을의 전통적인 중심지 '회사정' 전경. 이날 이곳에서 마을 주민들은 어두운 과거를 접고 화해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로 뜻을 모았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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