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사업자들이 미국의 위성방송, 디지털 오디오 방송 등 방송 산업에 진출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미국측 방송 규제 요건? 아니다. 한국 정부가 자국 시장에서 미국 기업들의 경쟁을 얼마나 보장해주는지를 살피는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
반면 미국 사업자들이 한국 방송산업에 진출할 때는? 한국 정부는 미국이 자국 시장에서 한국 사업자들에게 아무리 다른 국가에 비해 불공정한 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이에 대해 '판단할 권리'가 없다.
왜 그럴까? 양국이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추가 규제를 할 수 있는 분야를 열거한 미래유보(부속서 Ⅱ) 협정문의 차이 때문이다.
전국 21개 언론단체로 구성된 한미FTA저지 시청각·미디어분야 공동대책위원회는 4일 서울 프레스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협상 결과에 대한 방송위원회와 정부의 은폐시도가 드러났다"고 주장하면서 이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그 '별'은 왜 미국 쪽에만 있을까?
한미 FTA 협정문 중 커뮤니케이션 분야에는 '최혜국 대우'에 대한 미래유보 사항이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이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대한민국은 상호주의 조치의 적용을 이유로 또는 라디오 스펙트럼의 공유, 시장접근의 보장 또는 편방향 위성전송(DTH) 및 직접방송위성(DBS) 텔레비전 서비스, 디지털 오디오 서비스에 대한 내국민 대우와 관련한 국제 협정을 통하여 다른 국가의 인에게 차등대우를 부여하는 어떠한 조치도 채택하거나 유지할 권리를 보유한다. (한국 측 미래유보 12페이지)
미합중국은 상호주의 조치*의 적용을 이유로 또는 라디오 스펙트럼의 공유, 시장접근의 보장 또는 편방향 위성전송(DTH) 및 직접방송위성(DBS) 텔레비전 서비스, 디지털 오디오 서비스에 대한 내국민 대우에 관련한 국제 협정을 통하여 다른 국가의인에게 차등 대우를 부여하는 어떠한 조치도 채택하거나 유지할 권리를 보유한다. (미국 측 미래유보 1페이지)
이 조항에서 열거된 서비스 분야는 사실상 방송이 전송되는 모든 방식을 포괄하고 있다.
위의 미국과 한국측의 협정문에서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는데 바로 '상호주의 조치'에 대한 각주(*)다. 미국측 미래유보 사항 바로 아래에는 이에 대한 상세한 각주가 덧붙여져 있다.
* 그러한 상호주의 조치를 적용함에 있어, 연방통신위원회는 다른 국가가 미합중국의 서비스 공급자에게 실질적인 경쟁 기회를 부여하는지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연방통신위원회는 특히 그 국가가 자국의 서비스 공급자에게 부여하는 것보다 불리하지 아니한 대우를 미합중국 서비스 공급자에게 부여하는지 여부 그리고 자국의 시장에서 서비스 공급자의 수를 제한하지 아니하는지 여부를 고려한다. (미국 측 미래유보 1페이지)
최혜국 대우: 한 나라가 다른 국가와 통상 조약을 체결 또는 경신하면서 지금까지 타국에 대해 적용한 대우 중 '최고의 대우'를 그 나라에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디오 스펙트럼: 무선통신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주파수 범위. 약 1만Hz부터 300GHz까지의 주파수 대역을 말한다. 대부분의 방송과 통신은 이런 주파수를 나눠 사용한다. 편방향 위성 전송(DTH): Direct to Home의 약자. 작은 접시형 위성 안테나를 이용하여 위성 통신이나 방송 신호를 직접 수신하는 방식. 직접 방송 위성(DBS): Direct Broadcast Satellite의 약자. 일반 공중의 직접 수신을 목적으로 방송을 중계하는 위성. 위성 방송은 공중에 직접 전파가 도달된다. (참고: 네이버 용어사전) |
규제 '권한'은 갖지만 '결정'은 미국에 맡긴다?
이 조항에 대해 공대위는 "한국이 미국 미디어 자본에게 얼마나 '실질적'으로 개방돼 있는지 여부를 FCC가 보고 결정한다는 것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방송위원회나 정보통신부 등 한국 정부가 취하는 규제의 실질적 효과를 미국 정부의 '판단'에 맡긴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한국 정부의 판단 권한은 협정문에 명시돼 있지 않다.
공대위는 같은 내용의 유보사항인데도 이런 '각주'가 한국 측 유보사항에는 빠져 있다는 점을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다. 미국 측 유보사항에는 FCC라는 판단의 주체가 명확히 명시돼 있지만 한국 측은 정보통신부, 방송위원회, 또는 두 기관이 통합될 방송통신위원회 가운데 그 어느 부서의 이름도 이번 협정문에 나와 있지 않다.
또 방송위가 지난 4월 2일 협상이 타결된 뒤 공개한 '협상 결과'에서 이같은 내용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공대위는 "우리는 이런 차이가 다름아닌 한미 FTA 자체의 비대칭성을 생생하게 반증하고 있다고 본다"며 "별표의 내용이 결코 간단치 않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믿으며 이에 대한 방송위와 정부의 해명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그 해명은 일반이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쉬운 언어로, 경위와 의미에 대해 명확하고 진실되게 답변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방송위 "자국 산업 보호 위한 당연한 얘기일 뿐"
이에 대해 방송위 관계자는 4일 <프레시안>과 전화통화에서 "(각주에 적힌 내용은) 미국이 자국 사업자들을 위해서 판단하는 기준이지 우리나라의 규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당연히 얘기를 기록해놓은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미국은 계속 이 분야에 대한 미래유보를 주장했고 우리는 이를 폐지하라고 했다"며 "폐지를 안하니까 우리도 같은 내용의 유보사항을 추가시킨 것"이라고 밝혔다.
이 '당연한 내용'의 각주가 한국측 유보사항에는 없는 점에 대해 그는 "적시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안 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한국 정부 측 노력이 숨어 있다"며 "미국 측도 방송 쿼터 등 우리가 제안한 다른 미래유보 조치들을 받아주고 싶었겠나"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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