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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크레딧' 부르는 드라마 '쩐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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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크레딧' 부르는 드라마 '쩐의 전쟁'

'빚의 늪'에 빠진 한국의 자화상

"카드빚 쓰지 마라."

이런 유서를 남기고 죽은 아버지가 있다면? 실제 상황은 아니다. 지난 16일 첫 전파를 탄 SBS 드라마 '쩐의전쟁'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장면을 현실에서 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채에 손댄 아버지, 풍비박산난 가정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금나라(박신양 분)는 유능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다.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미모의 애인(김정화 분)까지 있다. 그래서인지 표정에 자신감이 넘친다.

이런 그에게 갑자기 불행이 닥쳤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며 경영난을 겪던 그의 아버지(남일우 분)가 사채를 쓰면서부터다.
▲ 드라마 '쩐의전쟁' 주인공 금나라 역을 맡은 탤런트 박신양 씨. 엘리트 금융인이었던 주인공은 사채의 덫에 걸려 몰랐했다. ⓒSBS

한 번 사채에 손을 대자,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아버지는 사채업자를 피해 잠적했고, 어머니(정재순 분)는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사채업자들은 동생(이영은 분)의 결혼식장까지 들이닥쳐 축의금을 쓸어 갔다. 주인공 역시 직장에서 쫒겨 났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입원한 어머니를 내보내겠다는 통보가 왔다. 주인공은 가까스로 돈을 구해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병원비를 낼 수 없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사채업자들에게 병원비를 빼앗겼다. 결국 어머니도 죽었다. 그리고 주인공은 애인과도 헤어졌다.

한순간에 부모와 애인을 모두 빼앗긴 셈이다. 여기까지가 지난 16일 방영된 내용이다. 앞으로 전개될 줄거리는 노숙자로 전락한 주인공이 사채업자로 변신해 세상에 복수한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가 섞여 들어간다.

줄거리의 얼개만 놓고 보면 상투적이다. 하지만 '파리의 연인'이후 3년 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한 탤런트 박신양 씨의 빼어난 연기가 향후 방송에 대해 기대를 품게 한다.

16일 방송된 '쩐의전쟁'은 16.4%(AGB닐슨조사)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수목드라마 가운데 가장 높은 시청률이다. 온라인 게시판에 올라온 시청자들의 소감도 칭찬 일색이다. 각종 연예 뉴스에 달린 댓글도 마찬가지다.

25만원 빌려, 2주 뒤 65만원으로 갚아…연 4160% 이자율

그런데 이런 글들을 찬찬히 읽다 보면, 이 드라마의 높은 인기는 단지 박신양 씨의 연기력이나 성공한 엘리트의 추락과 같은 자극적인 소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의 빚 때문에 삶이 파탄난 주인공의 모습에 공감했다는 반응이 많다. 작은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간 사례가 실제로도 워낙 흔해서다.

지난 8일 금융감독원은 최근 사금융을 이용한 경험이 있거나 현재 이용 중인 57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발표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53%가 1000만 원만 있으면 빚에서 풀려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사채정리 및 자활에 필요한 자금으로 500만 원이 필요하다는 응답자도 32%에 이르렀다.

응답자의 85%가 1000만 원 이하의 빚 때문에 사채업자들의 등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날 발표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들이 부담하는 평균 금리는 연 197%였다. 대부업법 상의 이자율 상한(연 66%)을 넘어서는 고금리다. 등록대부업체의 금리는 연 181%였고, 무등록업체는 연 217%였다. 이런 금리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1000만 원 이하의 빚이 가산을 탕진하는 수준으로 불어나는 것은 순식간이다.

최근 금감원에 접수된 사례 가운데, 서울 강남의 한 대부업체에서 25만 원을 대출받아 2주 뒤 65만 원을 갚아야 했던 경우가 있다. 연 4160%의 이자율이다. 그는 또 다른 대부업체에서 105만 원을 빌려 1주일에 20만원 씩 이자를 내고 있다. 연 990%의 이자율이다.

금감원 관계자에 따르면 등록대부업체의 수만 해도 현재 1만7000개를 넘는다. 이 가운데 중소형 업체들은 편법으로 금리를 올려받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정부 감독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현재 대부업 시장 규모는 40조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행에서 외면당한 서민들, 대부업체와 사채 통한 '빚의 늪'에 빠져 들다

이처럼 급전이 필요한 서민들이 높은 이자를 감수하고 대부업체를 찾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일단 은행 문턱이 높다. 신용등급이 낮고 담보가 없는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릴 길이 없다. 최근 은행들이 가계 대출을 많이 늘렸다고는 하나 주택담보대출이 대부분이다. '집 없는 서민'은 이용할 수 없다.

또 '서민 금융'을 위해 설립된 상호저축은행이나 신용협동조합, 새마을금고 등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이들 금융 회사는 은행을 이용하기 힘든 서민들에게 고금리로 돈을 빌려준 뒤, 높은 이자를 제시하며 부유층을 끌어 모으고 있다. 설립 목적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몸집을 불리고 있는 셈이다. 상호저축은행 지점 가운데 상당수가 서울 강남에 몰려 있다는 사실이 이런 문제를 잘 보여준다.

결국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한 서민들은 신용카드에 의지하고, 다시 대부업체로, 결국 사채까지 쓰게 된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아버지가 "카드 빚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은행 대신 카드 빚을 쓰는 순간, 대부업체와 사채로 이어지는 '빚의 늪'으로 빠져드는 첫 관문을 지나게 된다. 그리고 이미 많은 이들이 이런 '빚의 늪'에 빠져 힘겨워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파멸한 가족이 등장하는 드라마에 시청자들이 공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 빈민들이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갈까"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떠올리게 되는 이름이 있다. 지난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다.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치타공 대학 경제학 교수를 지냈다. 엘리트 코스를 거쳐 좋은 직업을 얻었다는 점에서 드라마 속 주인공 금나라와 닮았다.
▲ 지난해 한국을 찾은 유누스 박사ⓒ뉴시스

1976년 방글라데시에 대기근이 닥치면서 유누스 박사의 삶이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당시 대학 인근 시골 마을 주민들이 겨우 27달러의 돈이 없어서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하고 부유한 집안 자제들을 대상으로 경제학을 가르치던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한 번 고리대금업자에게 의지하면 영원히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8일 금감원 보고서를 접한 한국의 부유층이 "겨우 1000만 원이 없어서 고금리의 사채를 쓰다니…"라며 혀를 차는 풍경과 닮았다.

가난한 이들은 왜 은행이 아닌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갈까. 이유는 간단했다. 담보가 없어서다.

이런 깨달음이 '마이크로 크레딧'(무담보 소액대출)이라는 혁신적인 발상으로 이어졌다. 담보나 보증 없이 저금리로 대출하되, 돈을 빌려간 이가 경제적 자활에 성공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다양한 자활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마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마이크로 크레딧'은 지금까지 전 세계 600만 명에게 경제적 자립의 기반을 제공했다. 유누스 박사가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것도 이런 공로 때문이다.

'마이크로 크레딧', 한국에서도 정착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담보가 없는 서민이 은행 문턱을 넘기 어려운 사정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유누스 박사의 시도와 유사한 사례가 등장했다. '신나는 조합', '사회연대은행', '아름다운세상 기금' 등이다.

유누스 박사가 '마이크로 크레딧'을 위해 창립한 그라민 은행과 제휴한 '신나는 조합' 강명순 이사는 지난해 10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당시까지 '마이크로 크레딧' 형태로 대출한 기금이 17억 원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런 기금을 확대할 수 있는 방안으로 은행의 휴면예금을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한국을 찾은 유누스 박사가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제안한 내용이기도 하다. 유누스 박사와 만난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 마이크로 크레딧 제도 활성화를 위해 휴면예금 활용 등 다각적인 방안을 강구하라"고 관계자들에게 지시했다.

지난 14일 재경부 관계자는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을 위해 수천억 원대의 공익재단을 설립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현재 대부업법에 규정된 이자 상한선(연 66%)을 10% 가량 낮추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앞서 금감원 발표에서도 드러났듯 대부업체들의 현실은 법과 동떨어진 것이어서 이런 개정안이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16일 드라마 '쩐의전쟁'에서 자신만만하던 청년이 사채의 덫에 걸려 몰락한 장면을 접한 시청자들 가운데, "정부 당국자들이 이런 장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라는 궁금증을 품었던 이들이 많았다.

빈민들이 '빚의 늪'에 빠지지 않고 경제적 자립에 성공하도록 돕는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은 과연 한국에서도 실효를 거둘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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