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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누스 "은행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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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누스 "은행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노 대통령 "휴면계좌 활용해 마이크로크레딧 활성화"

"우리가 가난한 것은 은행 때문이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가난의 원인은 워낙 복합적이고 다양한 것이니까.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주장이 제법 그럴싸하게 들릴 수 있다. '신용불량자'들도 그들 중 하나다. IMF 구제금융 사태 직후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은 신용카드를 마구잡이로 발급했다. 그리고 그것은 신용대란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신용불량자'가 된 이들, 그래서 가난해진 이들에 대해 금융기관의 책임은 전혀 없는 것일까?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최근 번성하고 있는 초고금리의 대부업체들은 어떤가. 이런 대부업체를 찾아가는 이들은 주로 서민들이다. 돈이 부족해서 고금리의 대출을 받고, 그것 때문에 더욱 가난해진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금융기관이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주장에 대해 아주 터무니없다고만 말하기 어려워진다.

"대출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보장된 '인권'"

그런데 이와 반대로 금융을 통해 빈민들을 가난에서 건져내려 한 은행가가 있다. 18일 한국을 찾은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예정자 무하마드 유누스다. 그가 설립한 그라민 은행은 경제적 자립 능력이 부족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무담보 소액 대출(마이크로 크레딧)을 통해 방글라데시 빈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제8회 서울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는 19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수상식을 위해 방한했다. 유누스 총재는 이날 수상식뿐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견, 국내 최초로 마이크로 크레딧을 도입한 '신나는 조합' 방문 등의 일정을 진행했다.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유누스 총재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권리는 '인권'에 속한다"라고 강조했다. 담보의 유무와 무관하게 돈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대출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제도를 통해 자립 능력을 키워주는 방식이 아닌 자선 행위를 통해서는 결코 빈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유누스 총재는 은행은 눈앞의 이윤을 추구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가난한 이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는 사회적 공기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왜 은행 대신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갈까?"

이런 생각의 뿌리는 유누스 총재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은행을 세울 결심을 하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밴더빌트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뒤 고국인 방글라데시로 돌아왔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1976년 방글라데시에 대기근이 닥쳤을 때다. 치타공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인근 시골 마을 주민들이 겨우 27달러의 돈이 없어서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만을 거친 뒤 부유한 집안 자제들을 대상으로 경제학을 가르치던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한번 고리대금업자에게 의지하면 영원히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은 왜 은행이 아닌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갈까. 이유는 간단했다. 담보가 없어서다. 현재까지 600만 명에게 자립의 기반을 제공한 무담보 소액대출이라는 혁신적인 제도는 이런 발상에서 시작됐다.

"자립 능력 키워주면 무담보 대출도 충분히 효율적"

유누스 총재는 또 '마이크로 크레딧'이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모델이냐는 의문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흔히 갖는 오해와 달리 무담보 대출도 충분히 건전성과 효율성을 확보할 수 있다며 다양한 자립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게 관건이라고 밝혔다. 담보 없이 돈을 빌려간 빈민들에게 적절한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경제적 자립 능력을 키워주면 안정적인 대출금 회수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유누스 총재는 은행들이 마이크로 크레딧을 위한 자회사를 설립하고, 여기에 걸맞은 전문 인력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유누스 총재는 은행뿐 아니라 기업도 빈곤 퇴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지적했다. 다국적 유제품 회사인 다농과 그라민 은행이 제휴하여 방글라데시의 빈곤층 영양실조 아이들에게 요구르트를 제공하기 위한 사회적 기업체를 만든 사례, 그라민 은행이 유럽 통신업체들과 손잡고 '그라민 폰'이라는 이동통신 업체를 세운 사례 등이 그것이다. 그라민 폰은 방글라데시 빈민 여성들에게 전화 임대 사업의 기회를 제공한다.

유누스 총재는 이런 사례를 '사회적 기업'이라 부르면서 이윤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빈민들의 자활 능력을 높이는데 기여하는 경우라고 설명했다.

"북한 주민 빈곤 해소에도 기여하고 싶어"

유누스 총재는 최악의 빈곤 상황에 처한 북한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핵무기를 보유한 모든 국가는 비난받아야한다고 전제한 그는 "북한 정부는 인기가 없지만 북한 주민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돕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북한 정부가 체제를 개방한다면 "'마이크로 크레딧'사업이 북한에 진출하여 빈곤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오전 유누스 총재는 청와대를 방문하여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마이크로 크레딧'에 대해 "창의적 혁명"이라며 극찬한 뒤, "휴면예금을 활용해 마이크로 크레딧을 활성화할 것"을 약속했다.
노 대통령 "마이크로크레딧 활성화 위해 휴면예금 활용"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나라에서 마이크로크레딧 제도 활성화를 위해 휴면예금 활용 등 다각적인 방안을 강구하라"고 관계자들에게 지시했다.

"정부가 재원조성에 기여하되 운영은 민간에서"

노 대통령은 서울평화상 수상차 방한한 무하마드 유누스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19일 청와대에서 접견한 자리에서 "마이크로크레딧 제도가 잘 되려면 정부도 재원조성에 기여하고 그 운영은 사회적 기업 등 민간단체에서 담당해야 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에 대해 유누스 그라민 뱅크 총재는 "벤처 캐피탈이나 펀드를 조성하고 휴면예금 반환 요구시 돌려주고 그렇지 않은 재원은 적극 활용하면 될 것"이라며 "마이크로크레딧 활성화를 위해 논의하게 된 것이 너무 기쁘고 앞으로 경험을 공유하고 방안을 모색하는 데에 적극 도와줄 것"이라고 화답했다.

또한 노 대통령은 "마이크로크레딧 제도는 창의적 혁명이라 할 수 있으며 경제 원리를 뛰어넘어 사람에 대한 신뢰를 공유하게 하는 발상의 전환"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유누스 "마이크로크레딧은 경제학을 근간으로 평화에 기여"

이날 접견에서 유누스 총재는 "서울평화상이 제게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행운을 가져다 준 것 같다"며 감사를 표하자 노 대통령도 덕담을 건네며 "그런데 왜 노벨경제학상이 아니고 노벨평화상을 줬는지 이상하다"고 말했다.

이에 유누스 총재는 "제가 하고 있는 일은 경제학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평화에 기여하는 일"이라며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에 저희 은행을 언급하며 경제학상을 받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고 화답했다.

이날 접견에는 이종수 사회연대은행 상임이사, 정명기 신나는조합 이사장, 김현미 열린우리당 의원 등 한국판 마이크로크레딧인 사회연대은행 관계자들이 배석했다. (윤태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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