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영 5일 후 해적과 한국 정부 사이의 협상이 타결됐고 열흘 후인 8월 9일, 환영과 축하 속에서 선원들이 귀국했으며 그 이후 '동원호 나포 사건'은 서서히 잊혀져 갔다.
그러나 당사자들에게 '나포 사건'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동원호 선원들과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김영미 프리랜스 PD. 그들은 각자 서로 다른 상대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이 소말리아의 해적들만큼이나 무섭다고도 말한다.
소말리아와 한국, 장소를 달리 하며 벌어지고 있는 싸움들에 대한 이야기가 책으로 묶였다. <바다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북하우스 펴냄)은 동원호 선원이었던 조선족 김홍길 씨의 일기와 김영미 PD의 취재기를 통해 117일간의 나포 기록, 그리고 알려지지 않았던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국 사람이 가서 취재를 해야 했다"
이 책에는 세 명의 화자가 등장한다. 김영미 PD와 동원호 항해사 김진국 씨, 그리고 일기를 통한 김홍길 씨의 이야기다.
2006년 4월 4일 소말리아 인근 해역, 잠자리에 들려던 선원들은 스피드보트를 타고 총을 쏘아대며 달려든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순식간에 배를 장악당했다. 선원들은 미국과 네덜란드 군함의 공포 사격에도 꼼짝않는 해적들을 피해 탈출을 시도하지만 '기다리라'는 회사의 조치를 받고 탈출을 포기한다.
김진국 씨는 "회사에서는 참고 기다리면 곧 풀려난다 했다"며 "그러나 '금세'가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면서 희망은 점차 사라져갔고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만 점점 커졌다"고 밝혔다.
4월 25일, 김영미 PD는 외신을 통해 동원호 모습을 접한 뒤 곧 현지 취재를 결심하게 된다. 그는 정말 남들의 말처럼 '철없는'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처음 외신에 보도된 영상에서 외신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정말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더듬더듬 영어로 말하는 동원호 선장의 모습을 봤을 때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언어가 통하는 한국 사람이 가서 취재를 해야만 했다. 나는 항상 취재라는 것은 그곳의 현실을 알리는 것이 첫째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
나중에 동원호에 대한 방송이 나가고 난 뒤 유명해지고 싶어서 취재를 간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누가 유명해지고 싶다고 스스로 사지에 발을 들여놓겠는가. 소말리아행은 그런 보상에 비해 너무나도 위험한 곳이었다."
글씨 하나 모르면서 총으로 위협하는 해적…정부는 정말 알았을까
분쟁 일보 직전에 있던 소말리아에 도착한 김 PD는 한국 정부가 협상을 위해 접촉 중인 소말리아 과도정부는 소말리아 내에서 유명무실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2004년 UN 결의안에 의해 만들어진 과도정부를 소말리아인들은 미국이 뒷돈을 댄 허수아비 정권이라고 여겼다.
김 PD는 소말리아 내에서 과도정부보다 더 큰 신망을 받고 있는 지도자인 셰이크 하산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 범인들을 토벌하겠다"는 셰이크 하산의 신변 보증 약속을 받아낸 김 PD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나포돼 있는 동원호 선상에 오른다. 7월 12일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선원들은 마약풀로 인해 환각 상태에 빠진 해적들이 오발 사고를 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총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100일이 넘도록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해적이 결코 영리한 집단이 아니었지만 돈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위험한 집단이라고 했다.
"해적들 모두 학교는 가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 가면 당장 체포될 처지인 범죄자들이 이런 말을 하다니. 나는 해적들이 치밀한 범죄 집단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전혀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같은 현지 상황을 알지 못하는 한국 정부와 동원수산 측의 대처에 선원들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김진국 씨는 나포 기간 동안 선원들이 느꼈던 한국의 '협상력'을 이렇게 묘사했다.
"해적들에게 나포된 지 한 달 반쯤 됐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화기를 들자마자 '여보세요'라는 한국어가 들렸다. 전화를 건 남자가 다짜고짜 나에게 물었다. '해적 몇 놈이서 선장을 끌고 갔어요?' 선장이 해적마을로 끌려간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늘 반복되는 일이다 보니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 나중에 알고 보니 전화를 건 사람은 회사 측에서 해적과의 협상 일선에 내세운 에이전트였다."
귀국…그리고 끝나지 않은 싸움
김 PD가 동원호 선상 위 2박3일의 취재를 마친 일주일 뒤인 2006년 7월 25일, MBC <PD수첩>을 통해 동원호 선원들의 처참한 실상이 방송됐다. 경악한 시청자들이 정부의 무능한 외교력을 비판하자 외교통상부와 동원수산 측은 화살을 거꾸로 돌렸다. 김영미 PD가 해적들과 사전 모의를 했다는 것이었다.
논란을 뒤로 한채 방영 5일 후, 협상이 완료됐다. 117일만이었다. 김 PD는 선원들이 입국했던 날의 기쁨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3~4일이 지날 때까지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자 잠만 자면 당시의 상황이 재현되면서 악몽을 꿨다. 계속 잠을 설치고 잘 먹지도 못했다. 일시적인 증상인 줄만 알았는데 상태가 점점 나빠졌다.
인근 종합병원의 정신과 클리닉을 찾았다. 의사에게 해적들에게 납치당했던 얘기와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말하니, 어디론가 나를 데리고 갔다. 철문이 있는 격리수용이 가능한 정신병동이었다. 순간 '내가 이 정도 상태인가' 싶어서 서글픈 마음이 절로 들었다. 나는 '난 정신병자가 아닙니다'라고 소리 치고 그대로 병원을 뛰쳐나왔다."
선원들은 공통적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렸다. 생명을 위협하는 신체적, 정신적 충격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PTSD는 반복되는 악몽과 알코올, 약물 남용, 자해적 행동, 대인관계 장애 등을 유발한다. 사이다병 따는 소리에 총소리인줄 알고 놀라고, 흑인을 보고 기가 질려 도망치고 있는 이들에게 '나포 사건'은 쉽게 끝나지 않는 사건이 된 것이다.
이들은 6개월 이상 PTSD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잠시 병원에 입원했다가 생활고 때문에 스스로 퇴원을 요청하고 배를 타러 떠나야 했다. 정부나 회사로부터 받는 치료비는 거의 없었다.
김진국 씨는 "만약 소말리아에서 납치된 것이 배가 아니라 비행기였다면, 뱃사람이 아니라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아무 조처 없이 내버려두었을까"라며 "사람들은 우리를 자신들과 상관없는 이방인처럼 보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사회의 무관심은 귀국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위험 지역'이기 때문에 취재를 못 갔다고 말하던 언론들과, 역시 '위험 지역'이기 때문에 협상이 더뎠다고 말하던 정부는 선원들이 돌아온 뒤로도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와의 싸움 속에, 그리고 무관심 속에서 선원들은 아직도 고통받고 있다.
외통부 "'일개 프리랜서'의 검증되지 못한 방송 왜 했나"
그와 동시와 김영미 PD는 또 다른 싸움에 맞서고 있다. <PD수첩>이 방영된 뒤 외통부는 분쟁지역 전문기자인 김 PD에게 출국금지 조처를 내렸고 그 이후 MBC에 요청한 반론보도가 거절당하자 MBC를 대상으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1월 14일과 3월 22일 각각 1·2차 공판이 진행됐으며 재판부(서울남부지방법원)는 오는 12일 1심 결과를 선고할 예정이다.
외통부는 "공영방송인 MBC가 '일개 프리랜서'인 김영미 PD의 검증되지 않은 취재내용을 보도하는 것은 MBC의 사회적 책임과 영향력에 비추어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또 "국제 협상을 이해하지 못한 방송이 정부 협상단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고 협상 타결에 장애가 됐다"며 당시 보도가 부적절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MBC 소송에 참고인으로 참석하고 있는 김 PD는 지난 2월 "외통부는 현지와의 빈번히 일일 교신을 하고 동원수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밝히지만 현지에서는 외통부의 조치들을 거의 알 수 없었고 모든 협상을 동원수산에 떠넘기기 바빴던 모습이었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최선을 다 했다" 1심 선고를 하루 앞둔 10일 언론개혁시민연대와 PD연합회, 독립PD협회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언론자유를 침해하고 있는 외교통상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잊혀져 가고 있던 동원호 선원들에 대해 김영미 PD는 '100일 동안이나 선원들이 잡혀 있어야만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라며 "그로 인해 외통부에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모두 거부됐고, 그런 상태에서 취재내용을 근거로 방송을 한 것뿐"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외통부는 '일개' 프리랜서 PD였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지, 앞으로 해외 취재물에 대한 내용 검증을 외통부에서 하겠다는 건지 답하라"며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사명을 다하려는 현장의 PD들에게 외통부가 힘은 못 될 망정 걸림돌이 되진 말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김영미 PD는 단독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 어느 언론도 쉽게 인터뷰를 시도하지 못했던 소말리아 지도자 앞에서 "한국인 석방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고, 동원호를 납치했던 해적 두목에게 "취재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던 김영미 PD는 이날 마이크 앞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겁이 많이 나지만 여기서 내가 지면 다른 사람들도 '저러다간 다치는구나'라며 용기 있는 저널리즘을 포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용기있게 이 자리에 선다"며 "프리랜서이든 아니든 나는 한국 언론으로서, 저널리스트로서 최선을 다 했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 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김영미 PD를 돕기 위해 자진해서 참석한 선원 김진국 씨도 함께 했다. 그 역시 기자회견이 끝날 즈음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바다에서 길을 잃어버렸던 그들은 귀국한 조국의 땅에서조차 힘겹게 길을 찾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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