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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의 '불씨'를 없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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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의 '불씨'를 없애자"

[다시 보는 여수참사⑤·끝]무엇이 그들의 합법화를 가로막나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무(無)를 세계에 도래하게 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존재"라고 규정했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에 도착해서 친구들을 찾지 못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없네." 카페에 가득한 다른 사람들, 거기에 놓인 사물들은 친구를 찾는 관심에 밀려 없는 것으로 사라진다. 이처럼 특정한 관심에 따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을 없는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무화(無化)의 능력은 삶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수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기만적이다.

모든 무화(無化)의 과정에는 폭력과 기만이 따른다

우리 사회에는 이 무화의 능력이 놀랍도록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발휘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불법체류자들이다.

우리 곁에는 40만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법은 이 중 절반에 달하는 20만 명을 불법체류자로 규정한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합법적으로는 '없는' 존재들로 말이다.

우리 사회가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불러들인 지 벌써 20년이 됐다. 애초에 기업이 희망한 것은 '미숙련 저임금 노동자'였다. 높은 임금을 보장해야 하는 숙련된 노동의 기회는 내국인에게만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의 합법적 체류기간을 3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고분고분하지 않다. 어떤 존재들에 대한 우리의 필요가 다했다고 우리가 원하는 순간 그들이 마술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모든 무화의 과정에는 강제적 폭력과 기만이 따르기 마련이다.

'합법화는 절대 안 되지만 극단적 인권유린도 곤란하다'?
▲ 지난 2월 25일 서울역 앞에서 열린 여수참사 공동대책위원회 집회에 참석한 한 이주노동자 ⓒ프레시안

보수언론도 여수참사를 계기로 외국인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불법 자체는 엄중히 단속하고 감시체계를 강화할 것을 강조한다. 이런 사고 때문에 단속과 감시의 강도를 늦추는 온정적 대응 방식은 우리의 법질서를 혼란하게 할 뿐 근본적 문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온정주의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정확한 진단이다. 그러나 '합법화는 절대 안 되지만 극단적인 인권유린도 곤란하다'는 주장이야말로 온정주의의 한계를 가장 잘 드러낸다.

외국인 노동자의 지위를 합법적으로 보장함으로써 무화의 과정 자체를 중단하지 않는 한 인권유린은 피해가기 힘들다. 단속 공무원들이나 관련자들이 토로하듯, 영장을 발부받은 후에 단속하는 것이나 일정기간 감금 후에 자진출국을 유도하는 것으로는 불법체류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적절한 타협의 수준에서 말하는 부드럽고 인간적인 단속과 보호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적극적인 단속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단속과 감금은 현실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도록 매번 폭력적 양상을 띨 것이고, 이 과정에서 여수출입국 관리소의 참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재의 불씨를 없애는 것은 스프링클러나 안전관리가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온정과 연민도 아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체류기간을 현실화하고 직장 및 업종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합법화뿐이다.

'무화'의 논리는 자본의 욕망일 뿐

이런 해법을 정부나 기업이 거부하는 데는 단순명료한 이유가 있다. 합법화는 임금상승을 불러오고 더 많은 이윤창출과 경제성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논리를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한 이주노동자의 존재를 지우는 폭력적 무화의 과정을 중단시킬 수는 없다.

경제적 이익이냐, 그들에 대한 온정적 처우냐? 이것을 두고 고심하는 사이 우리는 이 논리가 또 다른 종류의 무화 과정들을 우리 자신을 향해서 작동시킨다는 것을 놓쳐버린다.

자본의 논리, 화폐의 욕망은 이주노동자들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 역시 매순간 무화한다. 우리가 정해진 자리에서, 허용된 기간 내에 얌전히 존재하기를 거부하는 순간, 확고하다고 믿었던 우리의 합법적 지위는 사라진다. 불법 행위라는 낙인 하에 우리는 노동자로서, 농민으로서, 또는 학생으로서 존재하고 싶은 방식대로 존재할 권리를 금지 당하며, 있고 싶은 장소로부터 추방당한다.

어떻게 하면 이주 노동자들을 우리의 환경으로부터 부드럽게, 조금은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지워버릴 것인가, 적어도 연기에 질식사시키는 끔직한 방식은 피하면서 그들을 이곳에서 내보낼 것인가를 궁리할 때가 아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이런 종류의 무화를 작동시키는 욕망에 대한 회의와 성찰이다.

모든 것을 화폐적 가치로 환산함으로써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들을 불법화하려는 욕망 자체를 무화시켜 버리자. 이주노동자는 있다. 그들이 있음을 합법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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