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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받는 자들의 '불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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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받는 자들의 '불타는 삶'

[다시 보는 여수참사①] 누가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나?

지난달 11일 여수 외국인 보호소에서 발생한 화재 참사는 한국 사회에 큰 충격과 함께 논란을 야기했다.

정부와 일부 언론은 이번 사건을 '불법 체류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방화'로 결론내렸다. 하지만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번 사건이 발생한 구조적 원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주노동자의 인권 자체가 무시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이 이번 사건을 일으킨 근본 원인이라는 것.

특히 사건 발생 직후에는 '비인도적 이주노동자 정책'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를 취하던 정부가 지난달 23일 당시 사고 피해자들 일부를 강제출국시킨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이 재확인됐다. 따라서 시민사회단체들은 여수 참사는 마무리지어져 가는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인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인식에 토대를 두고 제도권 밖 연구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젊은 학자들이 '여수 참사를 통해 본 한국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주제로 5회에 걸쳐 릴레이 기고를 할 계획이다.

'수유+너머' 측은 "이번 기고는 화재 참사로 열 명이나 죽었는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건의 성격을 잘 모르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에 착안한 것"이라며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편집자>

'보호'받는 자들의 '불타는 삶'
▲ 지난달 25일 서울역 앞에서 열린 여수 참사 대책마련 촉구 집회 ⓒ프레시안

지난 2월 26일 중국 조선족인 황해파 씨가 끝내 숨을 거둠으로써 2·11 여수참사 사망자 수가 10명으로 늘어났다. 치료 중인 17명의 부상자와 청주보호소로 이감된 7명, 이감 후 황급히 출국시킨 22명의 기억 속에서 여수 외국인 보호소는 연옥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또 한국에 살고 있는 20만의 '잠재적' 수감자와 40만의 '잠재적' 불법체류자들에게 여수 참사는 그들 자신에게 도래할지도 모르는 연옥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미아보호소도 아니고 유기견보호소도 아닌, 외국인 보호소가 '연옥'이 된 이유는 화염과 독가스 때문만이 아니라, 그곳이 지옥과도 같은 강제출국의 대기실이기 때문이리라.

이들에게 '대한민국'이 약속의 땅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임금과 인격적 모욕, 임금체불과 단속, 강제추방의 공포로 살얼음판 같았던 한국생활보다 강제출국이 싫은 것은 그들이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 이번에 불타 죽은 사람들과 출입국관리소의 관리 대상인 사람들을 지칭할, 이보다 적당한 단어는 없다.

그들은 가난했기에 평균 1000만 원이나 되는 송출브로커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낮선 잉국 땅으로 흘러 들어왔으며, 가난 때문에 산업연수생 제도니 고용허가제니 하는 '노예수입제도' 속에서도 인신의 구속과 임금 체불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의 가난 때문에 출입국관리법에 의해 도망친 '노예 신분'으로 쫓겨다니다 '노예사냥꾼'들에게 잡혀 구금됐고, 철창 안에서 불타 죽어야 했다.

'현대판 노예제'라는 말은 수사(修辭)가 아니다. 노예제는 고대의 전유물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함께 살아 있는 제도다. 신체와 인격을 구속받으며 타인을 위해 노동하는 자를 '노예'라고 부른다. 산업연수생 제도나 고용허가제는 외국의 '노동자'를 수입하는 제도가 아니다. 노동자란 '자유롭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이 제도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노동의 자유가 없다. 기간도 3년으로 정해져 있고, 사업장과 업종도 옮길 수 없으며,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공간인 가족도 동반할 수 없다.

그나마 이 노예노동이라도 하기 위해 노예상인과 다름없는 송출브로커에게 거액의 웃돈까지 주고 온 이 '가난한 사람'들은 <벤허>나 <십계>의 노예들과 다름없는 과중한 노동과 기대에 못 미친 임금, 인격적 모욕과 임금 체불 때문에 다른 사업장으로 옮기고 싶어도 사업주가 허락을 안 해 주면 꼼짝없이 그냥 붙들려 있어야 한다. 행여 무단 이탈하거나 쟁의를 일으키거나 신고 업종이 아닌 다른 업종에서 일을 하게 되면 그는 도망친 노예, 즉 '불법 체류자'로 신고되어 출입국 관리소의 노예 사냥 타깃이 된다.

운이 좋아 좋은 주인을 만났거나, 고분고분 일만 하는 착한 노예였다 해도 3년 안에 브로커 비용으로 진 빚을 갚고 가난에서 해방될 정도로 돈을 벌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이제 막 일도 손에 익고 이국생활에도 적응해 가는데 돌아가야 한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기한을 넘기게 되면 '불법체류자'가 돼 도망 다녀야 한다.

"어감이야 어떻든 우리는 '노예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산업연수생 제도의 고질적 병폐인 송출비리를 없애기 위해 관리책임을 송출국과 한국의 정부·공공기관으로 이전시켰던 고용허가제 역시 지난해 7월 관련부처 회의에서는 고용허가제 대행업무를 악명 높은 '중소기업협동중앙회'에 맡겨버리자는 논의가 나왔다. 고용허가제의 본래 취지를 무시하고, 노예시장을 다시 민영화해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감이야 어떻든 우리는 산업연수생 제도와 고용허가제를 노예제도라 불러야 하며 그 제도 하에서 들어오거나 제도 바깥에서 들어와 노동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노예라 불러야 한다. 그들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60%에 해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역시 '자유노동자'라기보다는 '신분노동자', 즉 노예에 가깝다. 시장의 원리에 의해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해 신분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국가기관에 보호 중인 외국인을 불태워 죽였다는 인권 후진국의 오명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예노동자와 더불어 40만 외국인 노예와 20만 '도망친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는 '노예공화국'의 현실이다.

"그들의 권리는 '생명체의 권리'에 가깝다"

불타 죽은 자들을 '인간'이라 호명하고, 그들이 잃어버린 것을 '인권'에 한정시킬 수는 없다. '인간'의 이름으로 우리는 타인에 대해 최고의 선의를 베풀 수도 있지만 가장 끔찍한 악을 행할 수도 있으며, 인권의 이름으로 우리는 가장 보편적 권리를 옹호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가장 협소한 권리로 제한할 수도 있다.

국민의 권리도, 시민의 권리도, 노동자의 권리도 없는 이 가난한 유목민들이 잃어버린 권리는 차라리 생명체의 권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국에서 생존 환경을 잃어버린 그들은 생명의 본능에 따라 철새처럼 국경을 넘어 한국에 체류했고, 조류인플루엔자 병원체처럼 서식과 이동의 통제를 받았으며, 감염지역의 닭처럼 살처분당했고, 죽고 나서도 방화 '원인 규명'의 역학조사 대상이 되었다.

전지구적 기후변화, 전지구적 고병원성 바이러스, 전지구적 이주노동 등 오늘날 생명체의 지구적인 흐름은 국제차원에서 관리되고 있으며 그 관리 시스템을 주도하는 것은 전지구적 신자유주의와 전지구적 대테러 전쟁이다. 이 과정에서 국경을 관리하는 행정기관은 행정권력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의 군사권력, 국내 질서를 위한 경찰·사법권력과 긴밀히 공조하거나 융합되고 있다. 이번 여수참사에서처럼 출입국관리소는 미아나 유기견처럼 '적(籍)'이 없는 외국인을 보호하는 행정기능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사법적 판단 하에 검문, 수색, 체포, 구금하는 사법·경찰권력까지 행사한다.

그렇게 통합된 주권구성체는 '우리'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마치 AI 병원체를 검역하듯, 마치 테러리스트를 색출하듯, 마치 범죄자를 검거하듯 국경을 넘은 가난한 자들을 검역, 색출, 검거하고 있다. 출입국관리소의 합법적 폭력 덕분에 안전을 유지하고 있다고 느끼는 일부 '대한민국' 누리꾼들은 이번 여수참사에 대해 탈출을 위한 고의적 방화와 행정당국의 철저하지 못한 감시·통제 책임, 외국 '범죄자'들에 대한 사법당국의 미온적인 검거 책임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행정·경찰·사법체계의 통합된 관리만이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다는 듯이.

"불법적인 생명은 없다"

7년째 미국의 연구기관에서 일하며 미국인과 결혼하여 최근에 아이까지 낳은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미국 시민권 얘기가 나왔다.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선망하는 미국시민권을 딸 수 있게 됐지만 망설여진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미국 국적으로는 마음대로 외국 여행을 할 수 없어서라고 한다. 이란이나 이라크는 물론이고 그 좋다는 터키도 갈 수 없다고 한다. 상대국에서 받아들여줘도 미국 정부에서 테러 위험 때문에 자국민의 이슬람권 국가로의 여행을 자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위험한 외국인으로부터 자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애국법' 때문에 생명체의 활동 범위가 줄어드는 것은 미국인 자신이다.

AI를 박멸하기 위해 철새 도래지를 파괴할 수는 없다. 철새 도래지를 파괴한 다음에는 사료 수입을 금지해야 하고 살처분해서 매몰한 지역의 토양과 식수원을 봉쇄해야 하며 가금류의 유통 자체를 금지하고 나중에는 하늘에 그물까지 쳐야 한다.

마찬가지로 '불법체류자'를 단속·추방하기 위해 그들의 생활터전을 파괴하는 짓은 어리석다. 생명을 가진 것들의 흐름은 법과 제도로 봉쇄되지 않는다. 생명은 그만큼 끈질기고 유동적이고 확산적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고용허가제와 단속추방정책은 가난한 자들의 생명활동 자체를 불법화하고 있다. 지극히 협소한 합법적 노예노동의 허용범위를 한 발짝만 벗어나도 그들의 삶은 불법화된다. 그렇게 불법화된 삶은 저임금과 신분구속을 원하는 사업주들에게 훌륭한 잉여노동의 원천이 된다.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가 탐욕스런 사업주들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을 불법화 해주는 것이다.

불법적인 생명은 없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는 낡은 격언을 새삼 되새겨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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