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아다니는 많은 부랑자들은 그들이 구걸로 먹고 살 수 있는 한 일하기를 거부하며 게으름과 타락에 빠지고 때로는 절도와 기타 혐오스러운 짓을 하기도 하므로, 그들을 감옥에 넣는 고통을 주지 않고 단지 연민과 자선금품에 의해서는 그들을 일하게끔 할 수 없다. 따라서 부랑자들은 그들의 생계를 구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강제 노동을 해야 한다. <1349년 영국의 노동자 조례>
불법 체류자들로 인해 일어나는
살인 강간 절도 등 범죄와 사회문제엔
왜 눈감고 입 닫고 있는지?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우선인가?
대한민국의 실정법을 어긴 범법자들의 인권이 우선인가? <2007년 여수 참사에 관한 어느 대한민국 네티즌의 글>
600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닮은 두 법
근대 초기 유럽에는 빈민구제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말 그대로라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어야 할 이 법은 사실 살 곳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을 잡아서 강제 노동을 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노동하길 거부하는 자들을 가혹하게 체벌하고 교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동하지 않고 구걸이나 절도를 일삼는 범법자들에겐 당연한 대우였을까.
당시 유럽은 어마어마한 숫자의 수용소가 지어져야 했을 만큼 부랑자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양모 산업의 발달과 함께 양모 가격이 폭등하자 농지가 죄다 양 목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영주들은 농지를 목장으로 바꾸고 싶어 했으며, 그들로 구성된 국회는 공유지를 사유화하기 위한 엔클로저(울타리)법을 만든다. 수 백 년 동안 농사를 짓고 살던 땅에 어느 날 갑자기 울타리를 치고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한 법의 제정됨에 따라 어떤 생활 근거도 없이 살던 곳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삽시간에 떠돌이 부랑자가 되었다. 그들이 갈 곳은 당시 속속 지어지고 있었던 공장뿐이었다.
부랑자들은 넘쳐나는데도, 노동력은 부족했다. 사람들이 공장에 취직해서 온종일 노동하는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흥 자본가들과 그들로 구성된 국회는 이 모든 '악'조건을 해결할 새로운 입법을 추진한다. 바로 빈민구제법이었다. 떠돌아다니는 유랑민들과 노동력의 부족은 하나의 문제였으며, 하나의 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노동력은 제대로 통제되고 공급되어야 한다. 가능한 싼 값으로.
최초의 빈민구제법은 임금을 고정했으며, 임금상승을 일으키는 노동력의 이동을 금지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허가장 없이 여행할 수 없으며, 그것을 위반하는 자는 보호소에 갇히고, 강제 노역을 하며, 귀를 잘리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다. 놀라워라. 600여 년이 지난 후에 대한민국이 정초한 이주노동법의 근간은 어쩌면 이 '빈민구제법'이 아니었을까? 그토록 먼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두고서 이토록 닮아 있는 두 개의 법이라니….
몇 겹으로 위계를 만들고 체계적으로 착취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안에서, 모든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가난한 사람들은 떠돌 수밖에 없다. 자본은 언제나 그들-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며, 국가는 이를 돕기 위해 법을 제정한다.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하고, 얻어맞고, 욕을 먹고, 강간을 당하고, 임금조차 받지 못해도 영업장을 떠나는 순간 범법자가 되고 마는 이상한 법을.
유럽의 빈민구제법이 구제하려 한 것이 빈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일하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이 음험한 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명확하다. 그 법을 제정한 자들은 노동력을 더욱 더 '유연'하게 사용하기 위해 비정규직법을 제정하고, 자본의 무한자유를 보장하는 FTA까지 체결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과 멕시코의 FTA 체결 후, 거대한 초국적 자본이 멕시코를 장악하는 동안 멕시코 민중들은 국경을 넘다가 죽어간다.
더 많은 가난한 자들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합법적으로 소모하기 위한 법을 제정하는 세계에서 노동자들은 쓰고 버리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외환은행을 합병한 지 단 3년 만에 수 조 원의 이익은 본 론스타는, 33%의 외환은행 노동자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핸드폰 문자를 보냈다. KTX 여승무원들은 일자리를 보장받기 위해 1년 넘게 싸우고 있다.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이야말로 이 야만적인 세계의 최전선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유롭게 일하고 이동하기 위해 싸우는 자들이며, 바로 그 때문에 불법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대체 왜 우리들은 그들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이 '우리'를,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 한다고, 저들은 위험한 범법자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일까.
타자를 만들어야 확보되는 정당성
일찍이 푸코는 사회가 '광기'를 규정하고 분리시킴으로써 어떻게 '정상성'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주었다. 저기 따로 갇혀 있는 저들만이 우리가 정상인임을 보증한다는 것. 어쩌면 우리 또한 불타오르는 '보호소'에 갇힌 불법 체류자들의 존재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는 이 사회 안에서 합법적인 존재라는 믿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이 위태롭게 서 있는 야만적인 차별과 불평등, 나를 가두고 옥죄며 그어진 수많은 분할 선들을 애써 잊으면서 말이다. 취업은 어렵고, 그나마 언제든 폐기처분될 수 있으며, 미래는 끝끝내 불투명할지라도 나는 저들과 달리 합법적인 존재라는 초라한 위안!
독일민족이 유태인이라는 적을 설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우월함을 증명하려 한 것은 그들의 삶이 극심하게 불안했던 1920년대였다. 지금 나의 불안, 우리 삶의 고단함이 마치 저들 때문이라는 증오의 목소리, 타자를 만들어냄으로써만 나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드는 비겁한 삶은 동시에 자신을 위탁할 강한 법과 국가의 권위를 열망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정말로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저임금 장시간의 노동에 혹사당하고, 임금을 떼이고, 불법으로 규정돼 토끼몰이 식 단속의 위협에 쫓기는 삶 속에서도 삶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기득권을 가진 한 줌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져 사람들의 삶과 노동과 이동을 통제하려드는 괴물스러운 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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