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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참사=화재사고'? 원시적 해석을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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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참사=화재사고'? 원시적 해석을 멈춰라"

[다시 보는 여수참사④]문제는 '정치적 경계선'의 확장!

무려 28명의 사상자를 낸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며, 또 배우고자 하는가.

사건의 끔찍함과 참혹함이 우리에게 늘 뼈아픈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사태가 참혹하다고 해도 사건의 핵심에 다가서려는 의지 없이는 사건이 우리에게 건네는 고통스런 말을 들을 수 없다.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9.11사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인들은 사태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를 복수에 대한 의지로 바꿔 전쟁을 치르는 데 소모해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의 평화나 일상적 안전은 테러에 대한 공포로 교체됐고, 전세계인들은 유례없는 불안에 시달리게 됐다.

미신적인 인과관계 파악으로는 본질을 알 수 없다

인과관계에 대한 정확한 파악은 범죄수사드라마인 <CSI>의 활약처럼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누가 방화했는지, 화재경보기 작동은 정상이었는지, 불법외국인노동자에 대한 감시는 소홀하지 않았는지, 유독가스를 내뿜는 우레탄 재질의 매트를 깔지 말았어야 했는지 하는 문제들은 사건의 본질과 무관하다. 이런 사실들을 나열하며 "과거의 대형화재사건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며 질타하는 언론들의 작태는 정말 한심하다. 이들이야말로 참혹한 사건도 늘 평범한 사건으로 바꿔버리는 존재들이 아니었던가. 이들이야말로 끔찍한 사건을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않으려는 의지로 가득 찬 존재가 아니었던가.

아주 먼 과거에 인간들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노를 열심히 젓고 있으면서도 노를 젓는 행위 때문에 동력이 생겨 배가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노를 저으면 노의 정령이 배를 앞으로 밀어주는 것이라고. 그들은 배를 젓는 노와 배의 진행 사이에 정령과 같은 미신적 존재를 끼워 넣어야만 사물의 운동 원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지금 우리는 이런 미신적 사고방식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인가.

외국인노동자와 소통이 되지 않아서라느니, 후진국형 인권의식이 문제라느니 하는 대증요법들은 모두 원인을 왜곡하는 것들에 불과하다. 엄청난 재난에 맞딱뜨린 인간이 그 원인을 파악하지 않고 원인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재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야말로 앞에서 말한 원시인의 미신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미신적 처방들이 문제인 것은 이로 인해 우리의 정치적 사유와 실천의 지평이 엄청나게 왜곡된다는 사실에 있다.

이주노동자들과 소통이 그렇게 어려운가

우선 소통의 문제는 어떤가. 우리는 정말 이주노동자와 소통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차이가 너무 커서 그들을 이해하는 데 수월찮은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그런데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주노동자들의 요구가 아주 간단명료하다는 사실이다. 일한 만큼 임금을 달라는 것이고, 비인간적으로 학대하지 말라는 것이며, 좋은 여건의 일터로 옮길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며, 불법적 인간을 양산하는 고용허가제를 다른 것으로 바꿔달라는 것이다. 아니, 이들의 요구가 뭐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인가. 외국인노동자와 쉽게 소통되지 않는 현실을 지적하며 소통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태도야말로 도리어 이주노동자와의 소통에 장벽을 치는 일이다.

설사 소통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소통은 생산적인 효과를 낳지 못한다. "그래, 너희들의 요구가 무엇이길래 그렇게 시끄럽게 떠드느냐,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 제스처는 차라리 소통을 가로막을 뿐이다. "아쉽게도 너희들의 요구는 우리 경제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다른 요구를 하라"는 대답만이 돌아갈 뿐이기 때문이다. 현실지배적인 세력은 소통하더라도 기존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경계선 하나도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 정치적 경계선을 확장하고 옮기는 일이다.

권리란 언제나 투쟁의 산물이었다
▲ 지난 2002년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열린 이주노동자 집회 ⓒ인권영화제

그렇다면 선진인권의식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도대체 그냥 인권도 아니고 '선진인권의식'은 뭔가? 여론의 호들갑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선진인권은 한마디로 거지에게 베푸는 시혜의식과 같은 것으로 판명된다. 거지가 너무 많으면 선진국들 보기에 부끄러우니 거지에게 뭐라도 베푸는 척해야 마음이 편한 것이다. 그 대신 거지의 요구가 과도할 때는 언제든 화낼 준비가 되어 있는 법. 이들에게 인권은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빵이나 라면, 의약품상자를 전해주는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한국의 3D업종의 붕괴를 막고 있는, 한국경제의 중요한 동력이다. '권리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여성이 남성과 평등하다는 헌법상 원리도 현실 속에서는 거짓말이듯이. 그 대신 권리는 권력만큼 주어지는 법이다. 이주노동자들에게 권리가 주어져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한국경제에서 담당하는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권리가 권력만큼'이라는 말은 그 권리가 미리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권리는 정치적 투쟁의 산물이다. 이주노동자들은 지금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소통이니 선진인권의식이니 하는 말들은 이들의 정치적 투쟁을 무력화시키는 도구들이다. 거짓원인으로 본질을 은폐하는 기술이자 사태를 악화시키는 요소다.

그들의 투쟁은 우리 자신을 위한 정치적 공간의 확장이다

이주노동자라는 존재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권리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정치적 공간은 늘 열려 있다. 그래서 그곳은 가능성의 공간이다. 우리가 우리의 정치적 신분을 단지 투표하는 존재로 사유할 때 정치적 공간은 폐쇄된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우리가 계속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삶이 너무나 열악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 그들을 단순히 동정해서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연민 때문에 싸우지는 않는다. 그 대신 이주노동자라는 존재가 우리의 정치적 사유의 지평을 변화시키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주노동자 덕분에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은 우리 삶을 더 인간적인 세상으로 바꿀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경제적 착취에 대해서 싸워야 하며, 불법적 인간을 양산하는 이주노동자 관련법들과도 싸워야 한다. 이것들이 바로 이번 참사의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주노동자들의 당연한 요구를 과도한 요구나 주제넘은 요구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정치적 공간은 엄청나게 축소되고 만다. 앞으로 우리의 삶이 힘겨워질 때 우리는 어떤 요구도 당당히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대신 우리는 정치인들에게 구걸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정치적 현실이 우리에게 비수를 들이대지 않게 하려면 바로 지금부터 정치적 공간을 우리가 만들어가는 능동성의 공간으로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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