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다!"

[다시 보는 여수참사②] '쇠창살'은 우리 모두 앞에 있다

여수 외국인 '보호소' 화재 참사의 원인은 쇠창살이었다. 보호소의 쇠창살은 이주노동자들이 불을 피해 도망갈 권리,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권리조차 빼앗았다.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조차 보장받지 못했던 셈이다. 그들에게는 불이 나고 유독가스가 덮쳐도 '떠날 수 없는 자리' 와 이를 24시간 감시하는 CCTV가 있었다.

이것은 보호소와 같이 예외적이라 여겨지는 공간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로운 활동을 허락하지 않는 것, 이동을 통제하는 것은 이주노동자를 관리하는 정부의 핵심적 정책 방향이다. 이주노동자와 관련된 정부의 모든 제도에서 사업장 이동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주노동자들은 일반적인 노동자와 달리 자신이 일할 곳, 사업장을 선택할 수 없다. 사업주와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해준 자리에서만 일해야 한다. 사업주의 허락 없이 작업장을 떠나면 그때부터 바로 '불법체류자'가 된다.

'이주'하지 못하는 이주노동자

게다가 상당수의 사업주들은 이주노동자의 여권을 빼앗는다. 이주인권연대에서 낸 '고용허가제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이주노동자의 49.6%가 "자신의 여권을 사업주가 관리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주노동자는 법적으로 외국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단이 여권밖에 없다. 여권 없이는 통장을 개설해 고향의 가족에 송금을 할 수도 없다. 이런 여권을 사업주가 관리하는 것은 이주노동자가 모든 일상적 활동과 이동에서 사업주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업주가 이주노동자를 고용할 때 강제로 통장을 개설하게 하는 일도 있다. 통장에 매달 일정한 양의 금액을 저금하게 하고, 그 통장은 사업주가 관리한다. 노동자가 그 통장의 돈을 찾고 싶다면, 사업주의 말을 들어야 한다. 사업장을 벗어나거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사업주는 은행에 '지급정지요청'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주노동자는 자신이 예금한 돈도 찾을 수 없다. 이주노동자들의 이탈을, 자유로운 이동을 막기 위해 그들 스스로가 번 돈을 볼모로 잡는 셈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일부 대기업마저 이런 일을 행하고 있었다. 대우건설의 델리오 씨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사업주들은 고의로 임금을 몇 달씩 체불해 이주노동자가 돈을 받아내기 위해 해당 사업장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거나, 기숙사라는 명목으로 실질적인 사내 감금을 자행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주노동자의 이동을 통제한다.

그러므로 여수 외국인 '보호소' 화재 참사 사건은 이주노동자가 처한 예외적으로 열악한 상황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당하고 있던 '이동권 박탈'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예견된 사건이다. '이주' 하지 못하고 '이동' 하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라는 역설.

이동을 통제하는 정부와 기업의 '음모'

정부와 업체가 이토록 이주노동자의 이동을 막아서는 이유는 자신들의 직접적인 이득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의 임금은 내국인 노동자에 비해 턱없이 낮다. 이주인권연대의 2005년 조사에 따르면, 고용허가제하의 노동자들 중 "12시간 이상 노동한다"(42.4%)고 답한 이가 가장 많았으며, 임금 수준은 "64만 원에서 70만 원 사이"(38.5%)라고 답한 이가 가장 많았다. 최저임금에 가까운 수치다.

그들이 이렇게 낮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것은,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자신을 선택한 기업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들어온 후에도 그 사업체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면 그런 임금조건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다른 사업체를 알아보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이주노동자들은 말도 안 되게 열악한 조건에라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 정부와 기업이 이주노동자의 이동을 통제해서 시장임금보다 낮게 임금을 '조작'하고 있는 셈.

이에 대한 항의는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사업주와 계약을 1년마다 갱신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면 출국 조치 당한다) 사업주에 대한 대항은 쉽지 않고, 쟁의 행위가 '불법 파업'으로 규정당하면 바로 출국조치를 당한다. 이번 참사가 생긴 '보호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동통제를 벗어나려 했던 이주노동자들이 수감되는 곳이기도 하다. 고용허가제 도입 당시 노동부가 중소기업을 상대로 한 홍보문서인 '지속 성장과 기업을 위한 외국인 고용허가제'(2003)에서는 "이주노동자의 쟁의 활동은 어렵다"고 명시하고 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우리'는 '그들'을 동정하지만, '그들'은 '우리'보다 강한 존재다
▲ 지난 2004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1주년을 맞아 열린 '반전행동' 집회에 참석한 한 이주노동자 ⓒ프레시안

이런 열악한 상황 덕분에 이주노동자들은 쉽게 동정을 받는 듯하다. "이주노동자도 노동자다" 혹은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다"라는 익숙한 외침에는 이런 동정과 연민의 정서가 은연 중 깔려 있다. 하지만 소위 '내국인'이라는 사람들, 흔히 '우리'라는 대명사로 지칭되는 사람들이 과연 이주노동자들을 동정할 만한 처지에 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 역시 이주노동자처럼 강한 이동 통제의 속박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처럼 철창에 갇히고, 직장을 마음대로 못 옮긴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내면의 철창은 실제의 철창만큼 견고하다.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조바심,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모든 이들을 경쟁자이자 적으로 여기는 마음과 같은 내면의 철창들은 '우리'에게 특정한 행동만을 허락한다. 친구와 싸우고 동료와 싸우면서 끊임없이 돈을 벌어들이는 행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에서 '우리'는 이를 적나라하게 목격한다. 여기서 벗어나 다른 가치에 따라 행동하려는 '이동'은 바로 제재 당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부모가, 배우자가 이를 막아선다.

반면 이주노동자는 실제의 철창을 넘어서면서, 내면의 철창마저 넘어서는 힘과 능력을 보여줬다. 이주노동자들은 '비국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여러 사회운동에 참여해 왔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들을 홀대했던 한국 노동운동에도, '장애인 이동권 연대'처럼 언뜻 영역이 달라 보이는 운동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다. 얼마 전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은 "한미 FTA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누구보다도 더 열악한 상황을 감내하면서도, 자신들의 처지나 이익을 넘어 한국 사회에 계속 발언해 온 것이다.

'우리'야말로 '이주노동자'가 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주노동자는 '이동' 하는 존재들이다. 정부나 기업의 탄압에 저항해, 물리적인 철창을 깨고 이동한다. 지난달 25일 집회에도 이주노동자들은 단속의 위험을 무릅쓰고 참여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규정된 정체성을 넘어 새로운 우정을 이루기 위해, 내면의 철창을 넘어 이동한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한 한국 사람들도 모두 연대의 대상이다. 내 삶의 급급함 때문에 바로 옆의 동료에게 손을 내밀기도 힘든 '우리' 삶에 비해, 이주노동자는 훨씬 강한 존재들이다.

물론 이주노동자들이 강하다고 해서 그들을 둘러싼 상황이 해결될 수 있다거나 열악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저 끔찍한 반 인권적 보호소들을 없애는 등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그것은 '우리'가 이주노동자들처럼 강해질 때, 그들의 일을 내 일이 아니라고 애써 무시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이제 고쳐 외쳐야 할 때가 아닐까.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다"라고.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