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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석 재산 털어 지킨 문화재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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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석 재산 털어 지킨 문화재의 거리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 피마골 풍물기행②

***조선극장과 승동교회**

종로2가 피마골 입구 표지판을 옆에 끼고 인사동 방면으로 접어들다 보면 인사문화마당이 나온다. 바로 명월관과 더불어 서울의 3대 요리점 가운데 하나로 손꼽혔던 천향원 자리다. 여기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주차장이 하나 있는데, 우리나라 신극운동의 요람인 조선극장이 있던 자리이다.

<사진> 인사문화마당으로 꾸며진 옛날 천향원 자리

조선극장은 1920-30년대 한국인이 경영하는 극장으로 단성사와 쌍벽을 이루던 곳이었다. 조선극장은 경영주 황원균이 ‘조선인 관람객을 대상으로 조선연극을 상연’할 것을 표방하며, 1922년 11월 개관한 연극, 영화 겸용 극장이었다. 7백여석 규모의 신축 3층 건물에 최신설비를 바탕으로 조선극장은 영화관 최초로 발성영화를 상영하는 등 서양영화 개봉관으로서도 성가를 높였지만, 그보다는 각종 명창대회와 신극단체의 단골무대로서 우리 문화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1923년 9월 토월회가 <카츄샤>(톨스토이의 ‘부활')를 상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우리나라 신극운동의 횃불을 든 장소로 유명하다. 토월회는 1923년초 박승희(박정양의 3남)를 비롯한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 김기진의 하숙집에 모여 조직한 신극운동 단체였다.

토월회는 첫 사업으로 일본풍의 신파극에 젖어 있던 국내 연극계의 쇄신을 위해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신극 공연을 계획하고, 그해 7월 안톤 체홉 원작의 <곰>과 박승희의 창작극 <길식이>를 조선극장 무대에 올렸다. 그러나 제1회 공연은 무대경험이 없는 학생출신 배우들의 서투른 연기로 도중에 막을 내리는 낭패를 보았다.

토월회 회원들은 이 실패를 거울삼아 안석영, 복혜숙 등을 배우로 새로 영입하고 연습을 거듭하여, 1923년 9월 1일 톨스토이 원작의 <카츄샤>와 마이스텔 원작의 <하이델베르크>를 다시 조선극장 무대에 올렸다. 제2회 공연은 사실적인 무대장치와 의상, 일상회화식의 대화, 충실한 작품 고증과 탄탄한 연출을 통해 종래의 신파극과 차별화를 이루고, 흥행면에서도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사진> 주차장으로 변한 우리나라 신극운동의 산실 조선극장 터

이처럼 조선극장은 토월회에서 극예술연구회(1932)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신극운동의 산실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문화의 명소가 지금은 주차장으로 방치되어 있다. 정부에서 아무리 ‘한국방문의 해’니 뭐니 하며 떠든들, 이렇게 소중한 우리의 문화자원이 방치된 속에서 어디서 무엇을 보고 느끼란 말인가? 이제라도 정부나 연극인들이 나서, 한국 연극운동의 산실로서 그 문화적 공간성에 걸맞는 명소로 다시 꾸며지기를 바랄 뿐이다.

예전 조선극장이 있었던 주차장에서 위로 조금 더 올라 가다보면 승동교회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북장로회 선교사 무어(Samuel F. Moore)가 1893년 설립한 곤당골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승동교회는 대가집 소실로 있던 여인네들과 백정, 장인들이 많이 다닌다고 해서 ‘첩장(妾匠)교회’로 불리웠던, 피마골 사람들의 이른바 ‘민중교회’였다.

승동교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백정 출신의 초대 장로 박성춘이다. 그는 1898년 10월 독립협회 관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양반사족만이 아니라 사농공상 모두를 합하여 나라의 기둥으로 삼을 때 나라의 힘이 더욱 공고해 질수 있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의 아들 박서양도 세브란스의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의사로서는 물론 민족운동가로 헌신하였다 하니, 이들 부자의 인생유전이 극적이기만 하다.

<사진> 우리나라 ‘민중교회’의 원조 승동교회. 건물 반지하 1층 ‘승동유치원’이란 표지판이 붙은 곳이 3.1운동 당시 학생단의 거사모의 현장이다.

승동교회는 또한 3.1운동 당시 학생단 거사의 거점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당시 이 교회에는 연희전문의 학생대표인 김원벽이 다니고 있었다. 그러한 관계로 3.1운동 전야인 1919년 2월 28일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이 여기에 모여 학생 동원을 최종점검하고 독립선언서 배포 등의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이어지는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지금의 예배당은 증축한 것이지만 그 때의 건물 골격이 그대로 남아 그 날의 숨결을 전한다. 이렇게 승동교회는 백정이나 첩들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교회로, 3.1운동의 발상지로 한국근대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는 곳이다.

***자본주의 유흥문화의 유입과 인사동의 바 비너스**

승동교회에서 나와 인사동길로 접어들면 얼마 안가 인데코화랑이 나오는데, 일제하 지식인들의 사랑방 계명구락부와 여배우 복혜숙이 운영하던 바 비너스가 있던 곳이다.

피마골 주변에 카페나 바가 등장한 것은 1930년을 전후해서였다. 푸른 조명등과 전기축음기에서 울려 나오는 요란한 재즈음악에 양장 또는 일본옷을 입은 ‘재즈 기생’ ‘모던 기생’(웨이트리스)의 술시중이 곁들여지고, 모던 남녀의 수작과 웃음소리, 담배 연기 자욱한 가운데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카페의 모습은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렇게 ‘모던 보이’들이 즐겨 찾던 카페와는 좀 격이 다르게 모던한 지식인들의 사랑방을 겸해 등장한 것이 다방이고 바였다. 이 가운데 바 비너스는 마담인 복혜숙의 재담과 해학으로 인기를 끌었던 시인, 소설가, 화가, 연극인, 영화인, 기자 등 문인 예술가들과 모던 남녀의 휴게실이었다. <날개>로 유명한 소설가 이상 또한 영화 <금홍아 금홍아>에도 나오듯이, 배천에서 데려온 기생 금홍이와 함께 종로1가 청진동 입구에 ‘제비’라는 다방을 개업하기도 하였다.

<사진> 바 비너스와 계명구락부가 둥지를 트고 있었던 인데코화랑 자리

***‘인사동 전통문화 거리’의 산파 계명구락부와 한남서림**

한편 바 비너스 위층에는 당시 지식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던 계명구락부 또한 둥지를 트고 있었다. 계명구락부는 1918년 박승빈을 비롯한 지식인 33인이 발기하여 창립한 단체로, 기관지 <계명>과 고서 등을 간행하고, 음력설 폐지와 두루마기에 단추달기 등 의식주에 걸친 신생활운동을 전개하던 당대 문화운동의 사랑방이었다. 오늘날 인사동길을 특징짓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인 ‘생활한복’ 운동의 첫 단추를 낀 장소였던 것이다.

계명구락부의 좌장은 보성전문의 교장을 역임한 박승빈이었는데, 그는 조선어학회와 별도로 조선어학연구회를 조직하는 등 한글운동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구락부 한켠에 칸막이를 해놓고 조선어사전 편찬작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사진> 1950년 무렵의 탑골공원 일대. 왼편 도로가 인사동길이고, 오른편이 낙원동길이다.

계명구락부와 더불어 오늘날 ‘인사동 전통문화 거리’의 기초를 일군 일등공신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남서림이다. 인사동길 중간에 위치한 한남서림은 문화재 수집가로 유명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운영하던 고서점이었다.

배우개(梨峴, 현 종로4가) 일대의 돈줄을 쥐락펴락했던 거상의 후예 전형필이 우리 문화재의 수집에 남다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30년 와세다대학 졸업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자 당대 최고의 고미술품 감식가였던 위창 오세창의 문하를 드나들면서부터였다. 1932년 주변의 권유로 한남서림을 인수한 전형필은 오세창이 길러낸 문화재 중개상 이순황에게 경영을 맡기고, 본격적으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인사동에서 북촌에 이르는 지역에는 전통적인 양반가옥이 밀집해 있어, 그곳에서 나오는 고서, 골동, 서화, 병풍들을 중심으로 고서적과 고미술품을 취급하는 상가가 1930년대 인사동길에 들어섰는데, 여기서 거래되는 골동품들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최상급의 우리 서화와 골동품 수집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던 전형필의 한남서림은 우리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막는 파수꾼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진> ‘인사동 전통문화 거리’의 자존심 한남서림. 오늘날 간송미술관의 모체이다.
<사진> 한남서림 자리의 박당표구사와 명신당필방

전형필은 한남서림 등을 통해 수집한 문화재들을 수장하기 위해 1934년 서울 성북동의 별장과 주변 땅 만여 평을 사들여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고, 이어 1938년 개인 박물관으로 보화각을 지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간송미술관이다.

현재 간송미술관에는 전형필이 자신의 10만석 재산을 들여 수집한 고려청자, 청화백자, <훈민정음> 원본,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추사 김정희의 작품 등 국보급 문화재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 상당수가 당시 한남서림을 통해 수집한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한남서림은 오늘날 간송미술관의 모체였던 셈이다.

현재 인사동길 한가운데 한남서림이 있었던 자리에는 표구사와 필방 등이 들어 서 있다. 그러나 이곳이 인사동길을 ‘문화재 해외 반출의 거점’이라는 오명에서 건져내어, 오늘날의 전통문화 거리로 일궈낸 고마운 자리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인사동 사람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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