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뚝배기'로 상징되는 서민 전통의 문화공간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뚝배기'로 상징되는 서민 전통의 문화공간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 피마골 풍물기행 <첫회>

장규식 박사(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가 전통의 서민생활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서울역사산책을 연재한다.

필자는 1963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한국근현대사 전공으로 문학석사와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서울시립대, 서울시민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혜안, 1998), '종로 북촌 문화산책'(서울YMCA, 2000), '일제하 한국기독교민족주의연구'(혜안, 2001)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재골목길'이라는 피마골로부터 시작될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은 매주 토요일 연재되며, 4개월 가량 계속될 예정이다. 편집자

***답사를 시작하며**

우리는 문화유산하면 보통 궁궐이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떠올리고, 고려청자 조선백자같은 골동품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양반 귀족적인 '전통'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으로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를 연상한다. 그런데 과연 '전통'은 양반 지배층만의 전유물인 것일까?

수치상으로만 놓고 봐도 조선시기 양반이 전체 주민 구성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0%가 채 안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90%는? 문제는 당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 대중들의 문화유산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도 시각을 달리해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예컨대 질그릇이 그렇다. 골동품적 가치로 본다면 청자나 백자에 비할 바 아니지만, 우리네 조상들의 삶의 체취가 듬뿍 배어 있는 문화재로 질그릇만한 것이 없다. 사치품인 청자나 백자 없이는 살아도 일상 생활용구인 질그릇 없이는 살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그 질그릇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의 '서민' 전통이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기껏해야 전통사회의 부산물 정도로 취급을 받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에 답사하려 하는 피마골은 질그릇과 뚝배기로 상징되는 '서민 전통'의 문화공간이다. 종로1가에서 종묘까지 큰 길 양편 시전행랑 뒤쪽으로 나있던 골목길 '피마(避馬)골'은 조선시기 서민들이 고관대작들의 큰길 행차를 피해 접어들었던 그들만의 해방공간이었다. 지금은 남쪽 골목길이 도로확장 과정에서 종적을 감추고, 종로3가 단성사 골목에서 종로1가 청진동 해장국골목까지 북쪽으로만 그 자취가 남아있지만, 엄격한 신분제 사회의 쌍생아로서 피마골의 역사는 서울이 조선왕조의 새 도읍으로 조성될 당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 나는 피마골을 6백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재 골목길'이라고 부른다. 피마골을 문화재라고 하는 것은 비단 그 오랜 역사 때문만이 아니다. 말 한마리 다닐만한, 폭 1m 남짓의 좁다랐고 누추한 이 골목길에 녹아있는 서민들의 일상의 애환과 살내음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골목은 지금도 값싸고 푸짐한 음식점과 술집들이 이곳의 공간 아이덴티티인 개방성과 서민 취향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인사동과 대비되는, 서민 전통문화의 거리인 셈이다.

<사진> 1899년 서대문 - 청량리간 전차가 개통될 당시의 종로거리, 오른편으로 보이는 일직선의 골목길이 피마골이다.

***피마병문과 단성사**

지하철 1ㆍ3ㆍ5호선 종로3가역에서 내려 단성사로 가다보면 그 남쪽에 종묘로 통하는 일직선의 골목길이 나온다. 이 골목 끝이 바로 종묘에서 피마골로 들어가는 어귀라고 해서 '피마병문'(避馬屛門)이라 불렸던, 피마골의 공식 입구이다.

일제하 이 곳 피마병문에서는 지게꾼 인력거꾼 미장이 등이 하루의 일거리를 찾아 대기하는 인력시장이 열렸다고 하는데, 서민들의 공간으로서 피마골은 그 시작부터 이렇게 생계를 찾는 발길들로 북적거렸다. 바로 이 피마골 초입에 한국영화사의 산 증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건물이 단성사이다.

<사진> 피마병문에서

단성사는 1907년 6월 지명근ㆍ주수영ㆍ박태일 등이 공동출자하여 종로3가 지금의 위치에 기존 목조 2층건물을 가지고 설립한 극장이다. 개관 당시 단성사는 기생들의 판소리ㆍ민요ㆍ민속무용ㆍ악기연주와 재담ㆍ무속 등을 공연하던 전통연희 전문극장이었다. 그러던 것이 1914년초 서양식 외형에 일본식 내부설비를 갖춘 1천석 규모의 극장건물을 신축 개관하면서부터 신파극을 공연하는 극장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때 상연된 작품 가운데 하나가 그 유명한, 이수일과 심순애의 애절한 사랑을 담은 '장한몽'이다.

단성사는 박승필이 경영을 맡으면서 영화상영관으로 면모를 일신하였다. 박승필은 1918년 12월 건물을 신축하고, 마쓰다케영화사와 미국 유니버설영화사로부터 직배로 필름을 들여와 상영하면서 단성사를 서울 제일의 영화개봉관으로 키워 나갔다.

박승필은 국산영화의 진흥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활동사진 연쇄극(연극 도중 그 줄거리의 일부로 상영하는 영화)으로 찍은 최초의 국산영화 '의리적 구투(義理的 仇鬪)'를 제작하는 데 자본을 대기도 하였다. '의리적 구투'는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되었는데, 오늘날 영화인들이 '영화의 날'로 기념하는 바로 그 날이다.

뿐만 아니라 단성사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이 개봉된 곳이기도 하다. '아리랑'은 그때까지 신파조 아니면 일본영화를 모방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심리적 몽타지의 전위적 수법을 사용하여 민족정신을 일깨운 우리 민족영화의 이정표였다.

<사진> 현재 신축 공사중인 단성사의 모습

이렇게 단성사는 한국영화의 산실로서 영화인들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2년전 단성사의 건물을 헐고 최신식의 복합상영관을 짓는다고 해서 논란이 많았다. 그런데 단성사가 갖는 역사적 가치는 건물보다는 그 장소에 있다. 건물은 1907년 개관 이래 여러 차례 새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아쉽기는 하지만 새로 지어지는 건물의 한 층쯤에 한국영화사 박물관이 꾸며져, 단성사와 함께 한 한국영화 한 세기를 돌아볼 수 있는 문화공간이 마련되기를 바랄 뿐이다.

***명월관과 선술집들**

단성사 맞은편의 현재 신축공사중인, 과거 피카디리극장 제2관과 그 앞에 영화인들의 손도장이 찍혀 있는 마당은 예전 서울 장안에서 제일 가는 요리점(요정) 명월관과 선술집 동양루가 있던 곳이다.

<사진> 선술집 동양루와 요리점 명월관 자리. 앞쪽 마당이 동양루 터이고, 오른쪽에 건물 골조가 올라간 자리가 명월관 터이다.

요리점과 기생은 과거 화류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요리점의 원조는 궁중요리를 담당하였던 안순환이 1904년 무렵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 구사옥 자리에 개업한 명월관이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5일자를 보면, '대한에 제일등 요리점'이라고 해서 다음과 같은 '명월관 확장광고'가 나온다.

"근일 이층 양옥을 광활히 신건축하고, 다락 아래는 온돌방을 은밀리 배치하고, 포진범절을 새로 하와 오시는 귀객이 펀하시도록 주의하였사오며, 각종 음식은 보기에 화려하고 먹기에 정미하게 일신 준비하여 주야로 파오되, 서양주는 잔으로 파오며, 특별 신개량 교자음식은 오시는 때로부터 한 시간이 되면 몇상이라도 곧 가져가시도록 하오니, 내외 귀객은 속속 왕림하시압 ... 明月館 主人 金東植 告白"

그러나 1918년경 화재를 당해 3층 건물 전체와 서화ㆍ악기ㆍ의복ㆍ그릇 등 진기품 모두가 불타버리고, 그 뒤 새로운 명월관이 지금의 피카디리극장 제2관 자리에 들어섰다. 당시 명월관은 천향원․식도원과 함께 서울의 명물로 손꼽히는 일류 요리점이었다. 그래서 서울 구경오는 관광객들은 대개 여기서 한 상 차려놓고 기생의 장구가락에 따라 흘러나오는 수심가 한 자락은 들어야 서울 다녀왔다고 거들먹거릴 수 있었다고 한다.

명월관을 비롯한 피마골 주변의 요리점이 서울의 명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요리도 요리지만, 그보다는 여기서 술 따르고 노래와 춤을 공연하는 화류계의 주인공 기생때문이었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한테 반해서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퉁퉁 털어서 다 줬어. 띵호아 띵호아"하는 노래가사는 당시의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풍속도의 한 장면이다.

기생들은 본래 궁중이나 지방관청에 딸린 식구였으나, 1894년 갑오개혁 때 기생안이 혁파되면서 자유업자로 처지가 바뀐다. 그 뒤 기생들은 기생조합(일제강점후 일본식 권번으로 바뀜)에 가입하여 일정액의 수수료를 내고 요리점에 소개를 받아 나가며 살 길을 찾았는데, 1908년 서울의 관기 출신을 중심으로 조직한 한성기생조합(한성권번)이 그 원조였다. 이후 평양 기생이 중심이 된 다동조합(대동권번)이 그 뒤를 이었고, 1917년 경상ㆍ전라 양도의 기생을 중심으로 설립된 한남권번이 지금의 종로2가 삼성생명빌딩 뒤편 종로외국어학원앞 주차장 자리에 둥지를 텄다. 요리점과 기생은 해방후에도 정치인들의 밀실정치를 의미하는 '요정정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한동안 성업을 하였다.

<사진> 다동기생조합총회 기념사진

요리점과 기생이 과거 서울의 명물로 아무리 이름이 높았다 해도 일반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서민들에게 친숙한 공간으로 종로 뒷골목 피마골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던 것이 바로 선술집이었다.

선술집은 첫째 시간이 절약되고, 둘째 단돈 5전만 있으면 약주나 막걸리 한 잔에 안주 한 꼬치가 해결되며, 셋째 신분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나 같은 장소에 서서 먹는데다가, 넷째 술국이나 목판에 놓인 육포 어포 너비아니 제육 편육 빈대떡같은 안주 가운데 마음대로 골라 바로 굽던지 익혀 먹을 수 있어 크게 각광을 받았다.

그래서 전날에는 하층민들이나 드나들던 것이 1920년대 무렵부터는 말쑥한 신사, 모던 보이축들도 요리점이나 앉은술집 다니듯이 보통으로 다니게 되었다. 선술집에 '민중호텔'이니 뭐니 하는 하이칼라 별호가 붙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선술집 가운데서도 현재 피카디리 극장 앞마당에 있던 동양루라는 2층집은 비교적 규모가 큰 선술집으로 서민들의 사랑을 받던 장소였다. 1930년대 중반 종로1가에서 동대문까지 약 220개 정도의 선술집이 성업하였는데, 이 피마골을 따라 길게 난 선술집들을 횡단하는 술집 순례는 당시 문인들이 호기를 부리며 즐겨하던 풍류의 한자락이기도 하였다.

<사진> 지금은 피마골 음식점 골목의 일부가 된, 초동교회 주변 옛날 색주가 골목

선술집처럼 흔치는 않았지만 그보다 조금 지체가 높은 데가 서너 사람이 방에 들어가 앉아 술상을 차려놓고 먹는 '앉은술집'이었다. 술값은 보통 첫번째 주전자가 80전, 다음부터는 40전이었고, 순배 안주로는 굴이나 생선구이․제육같은 것을 늘어놓고 찌게가 붙었는데, 요리집에 갈 처지가 못되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들었다고 한다. 한편 명월관 본점 뒤편 지금의 초동교회 주변으로는 전등에 술 '주'(酒)자를 써 붙이고 '음식점영업'이라는 간판을 걸어놓은, 얼핏 여염집같이 생긴 으슥한 색주가들이 지나가는 남정네들을 유혹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단성사 옆골목부터 피마골을 따라 주욱 가다보면 옛날 선술집의 전통을 계승하며 즐비하게 서 있는 술집들의 숲에 파묻히게 된다. 특히 탑골공원에서 잠시 끊겼다가 길건너로 이어지는 종로2가 피마골 초입의 주점타운은 얼마전 화재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이곳을 찾아 몰려드는 20대들의 발길로 주말이면 발디딜 틈조차 없다. '학사주점'이란 간판을 내건 술집 점원들이 안에 빈 자리 수에 맞춰 손님을 받아들일 정도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을 듯싶다.

어렵사리 안에 들어서면 나무탁자를 마주하고 빼곡히 들어찬 젊은이들의 군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서너명이 한 자리 차지하고, 푸짐한 안주에 마실만큼 마시고 떠든 다음 나와 계산을 해도 단돈 2만원이면 족할 정도니, '민중호텔'이라는 별칭이 옛날 명성만은 아닌듯싶다.

<사진> 종로2가 피마골 초입의 주점타운

그래서 나는 이곳을 좋아한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 수 있으며, 담배연기 자욱하고 시끌벅적한 가운데 사람 냄새가 피어나는 곳, 비록 겉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1m 남짓한 골목길이 연출하는 정겨운 풍경이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마골은 다른 데와 달리 지금도 살아 숨쉬는 문화재이다. 강남 압구정동의 오렌지족이나 낑깡족과는 또 다른 신세대족이 여기에 있고, 과거 선술집의 전통문화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시대의 변화와 호흡을 같이하며 그대로 재현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