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일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다. 상식적으로는 믿기 힘든 주장이다. 한 탈북자 모임이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나온 주장을 기사화한 것이다.
최근 탈북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하는 경우가 늘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아직 모호하다. 폐쇄적인 북한 사회의 특성 탓에 그들의 주장을 제대로 검증하기 어렵다는 맹점 탓이다.
종이가 귀한 북한에서 유인물을 마구 뿌렸다고?
실제로 탈북자들의 증언은 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반인들은 이런 모순을 발견하기 어렵다. 하지만 북한 전문가들은 다르다. 오랫동안 탈북자들을 인터뷰하며 북한 사회를 연구해 온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최봉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북한에서 반체제 운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탈북자가 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좀 이상한 대목이 있다. 그는 북한에서 반체제 유인물을 뿌리며 도망을 다녔다고 말했다.
남한 사람들이 들으면 별로 이상한 느낌이 안 들 것이다. 하지만 북한 사회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입장에서는 다르다. 우선 북한에서는 선전지를 마구 뿌릴 만큼 종이가 흔치 않다.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놀라는 것 중 하나가 하얀 A4용지를 마구 낭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출력기(프린터), 인쇄기, 복사기, 등사기 등의 사용이 철저히 통제된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앞서의 탈북자의 증언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탈북자들의 증언이 어느 정도의 신뢰도를 가진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북한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탈북자들의 증언은 북한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참고 자료다. 하지만 그것을 무조건 믿는 것도 위험하다"는 것이 북한 전문가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이런 지적에 따르면 전문가의 검증 없이 탈북자들의 증언만으로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인 셈이다.
탈북자도 평범한 시민, 그런데 왜 이혼도 못 하나
이런 위험에 대해 언론이 무감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 사회를 연구하는 한 대학원생은 자신이 만난 탈북자가 "'멘트'만 따려고 접근하는 것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보수 언론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증언만 수집하기 위해 탈북자들에게 접근해 왔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보수 언론과 뉴라이트 진영에게 탈북자 문제는 그저 정부의 대북 유화 정책을 비판하기 위한 소재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렇게 탈북자들을 정치적 수단으로 여긴다면 그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그들의 자존심과 개성을 충분히 배려할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지적은 '탈북자 1만 명 시대'가 코앞에 다가오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요컨대 탈북자들을 북한 체제에 대한 '증언자'가 아닌 한국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
그런데 이런 태도를 취하려 애쓰는 이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다. 지난 22일 국회를 통과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일부 개정 법률안'(개정안)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탈북자들이 그동안 문제제기했던 것들중 상당부분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탈북자 김영순 씨(가명)도 이번 개정안을 반긴 이들 중 하나다. 이번에 신설된 탈북자의 이혼특례 조항 때문이다. 김 씨는 지난 2004년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올해 내내 "한국에 입국할 당시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한국에서 호적을 만들면서 기혼자라고 적어 넣은 게 후회스러워서였다.
김 씨는 북한에서 결혼했다. 하지만 탈북 과정에서 남편이 김 씨를 버렸다. 가까스로 한국에 들어온 김 씨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줄곧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런 김 씨에게 지난해 말 우연히 '새로운 사랑'이 다가왔다. 김 씨는 곧 재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김 씨는 혼인 신고를 할 수 없었다. 북한에서 결혼한 남편과 이혼 수속을 밟지 못 했기 때문이다. 헤어진 남편이 한국에 들어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기 전까지는 김 씨는 영원히 기혼자 신분이다. 그러나 김 씨는 헤어진 남편과 실질적으로 이혼한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생사조차 불분명하다. 만약 살아 있다면 김 씨와 같은 생각일 것이라 믿고 있다.
김 씨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까지는 통일이 되거나 남편이 한국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에 탈북자의 이혼특례 조항이 신설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이 특례조항(제19조 2항)에 따르면 북한에 배우자가 있었던 탈북자는 그 배우자가 현재 남한 지역에 거주하는지 여부가 불분명한 경우 재판 상 이혼청구를 할 수 있다. 북한에 배우자를 두고 온 경우에도 단독으로 이혼 청구가 가능해진 것이다.
북한에서의 경력은 모두 지우고 맨땅에서 새로 시작하라고?
또 다른 탈북자 이철수 씨(가명)도 이번 개정안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번에 신설된 전문분야 자격증 소지 탈북자의 자격인정을 위한 보수교육 및 재교육 실시, 심사위원회 설치에 관한 조항(제14조 제2항 및 제3항) 때문이다. 그는 북한에서 의사였다. 하지만 한국에 온 뒤에는 전혀 다른 일을 하며 지낸다. 북한에서 취득한 의사 면허를 인정받지 못 했기 때문이다. 이 씨가 한국에서 의사 직을 수행하려면 의과대학에 다시 입학해야 한다. 하지만 비싼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씨의 사례는 탈북자 사회에서 낯선 경우가 아니다. 한의사 출신 탈북자 김 모 씨의 경우는 보다 극적이다. 김 씨는 북한에서 8년 간 한의사로 일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세명대 한의학과에 재학 중이다. 이 씨와 마찬가지 이유로 한의사 면허를 인정받지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의대에 편입하기까지도 만만치 않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한국에 온 직후 그는 북한에서의 경력을 인정받기 위해 여러 기관을 돌아다녔다. 우선 찾아간 곳은 통일부. 그곳에서 북한에서의 학력을 인정받았다. 다시 그 서류를 들고 교육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한국에서 한의대 6년을 졸업한 자와 동등한 학력을 인정받았다. 그럼 한의사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다. 한의사 자격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응시 자격이 없다는 통보를 전달받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의사 면허를 관할하는 보건복지부를 찾아갔다. 돌아온 대답은 "북한에서 취득한 면허증을 갖고 오라"는 것.
결국 김 씨는 당장 한의사 업무를 시작하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김 씨는 한의대 편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학교 측으로부터 동일 전공으로 편입하는 것은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교육부에서 한의대 6년 졸업을 인정받은 게 오히려 발목을 잡은 셈이 됐다.
그래서 김 씨는 국회의원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김 씨의 이런 노력은 결국 빛을 봤다. 김 씨는 2004년 10월 탈북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김 씨는 탈북자들이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북한에서의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고 주장했다. 김 씨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국감에 참석한 의원들의 도움으로 김 씨는 세명대 한의대 편입 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의 성과는 김 씨 개인에게만 머무르지 않았다. 2004년 국감 당시 김 씨의 증언은 이번 개정안이 통과되는 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김 씨의 사례는 탈북자 사회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통한다. 탈북자들이 기존의 어두운 이미지를 벗고 한국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북한 출신 공학도들의 자신감 "우리는 기초가 튼튼하다"
탈북자들이 전문적인 영역에 도전하려는 움직임은 의사나 한의사처럼 '면허'가 중요한 분야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탈북자 정철우(가명) 씨는 한 정보통신 벤처기업에 근무한다. 그가 하는 일은 회로 설계. 북한에서 전공한 전자공학 지식을 활용한 것이다. 직장에서 정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유능한 엔지니어다. 정 씨는 "영업이나 기획 업무는 좀 부담스럽다. 하지만 기술 개발 업무에 대해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정 씨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다. 북한에서 교육받은 과학기술자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은 "김책공대나 평양리과대학 출신이라면 카이스트나 포스텍(포항공대) 출신과 겨뤄도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들 대학의 경우 연구 및 교육 시설의 수준은 한국보다 훨씬 뒤쳐져 있다. 그리고 해외 과학기술 정보에 대해서도 어둡다. 하지만 학생들의 수준은 매우 높다. 게다가 첨단 분야의 지식에 뒤쳐진 대신 수학과 물리 등 기초 실력이 탄탄해서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르다.
이런 특징은 컴퓨터공학 분야에서 잘 나타난다. 정 씨는 "한국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새로운 기술적 유행에 대해서는 해박하면서도 C언어처럼 기초적인 지식은 부족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기초와 원리를 중시하는 것은 북한 공학 교육의 대표적인 강점이다. 정 씨는 "북한의 공대생들은 컴퓨터 운영체제에 대한 이해도가 한국 학생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그리고 그것은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바탕이다"라고 이야기했다.
"'탈북자 출신 배우'가 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의사나 엔지니어 등의 직업은 지식과 기술만 있으면 그런대로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음반이나 영화 등 문화산업은 다르다. 지식과 기술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해당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대중의 '코드'를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문화에 낯선 탈북자의 진출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변화의 기미가 나타나고 있다. 배우 겸 가수 김혜영 씨나 뮤지컬 배우 김경복 씨 등에 이어 지난 8월에는 탈북자 출신 여성 보컬 그룹이 음반을 냈다. 한옥정, 허수향 씨 등 5명으로 구성된 '달래음악단'이 그것. '멋쟁이'라는 앨범을 낸 그들은 KBS1 TV <폭소클럽2>에도 출연하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런데 김철용 씨는 "그저 '탈북자 출신 배우'가 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경우다. 2001년 입국한 탈북자인 그는 북한에서 기동예술선전대 활동을 했다. 일종의 관영 순회극단인 셈이다. 그는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이 마냥 좋았다. 북한에서 만담 경연 대회에 나가 상을 타기도 했다. 한국 대학에 입학하면서 경제학과나 경영학과를 주로 택하는 다른 탈북자들과 달리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김 씨는 탈북자라는 꼬리표 없이 순수하게 연기력으로만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일단 말씨부터 문제였다. 북한 억양을 지우는 것이 영 쉽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사소한 문제였다. 배역에 몰입하는 것이 영 쉽지 않았다. 연기를 하려면 관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연출자가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됐다. 관객과 다른 문화적 배경 때문이다.
"감독과 소통할 수 없는 배우에 머물러야 하나." 오래 고민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직접 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 우선 시나리오 습작부터 시작했다. 대중의 '코드'를 읽으려 애썼다.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반이던 지난해, 기회가 왔다. 올해 5월 개봉한 영화 '국경의 남쪽' 조감독으로 참여하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잠시 망설였다.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라서다. 북한이라는 소재에 계속 집착하다보면 탈북자 출신 영화인이라는 정체성에 갇혀버릴까 두려웠다. 그래서 거부할까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하지만 연출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단 탈북자라는 소재에서 시작하여 영역을 넓혀가기로 마음먹었다. 영화 '국경의 남쪽'은 평론가들에게는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그래도 그는 담담하다. 이제 시작이니까. 그는 요즘 새로운 작품을 준비 중이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라는 제목이다. 하명준 감독과 함께 최인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이다.
그는 공포 영화에 관심이 많다. 두려움이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본성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8년 전 북한을 빠져나와 중국과 동남아를 떠돌던 3년 동안 정말 지독한 체험을 했다. '두려움'에 대한 천착은 당시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화 감독이 될 준비를 하는 지금, 그는 자신만만하다. 함께 영화를 만드는 스텝들과 노래방에 가서 '아파트', '최진사 댁 셋째 딸'밖에 부를 게 없지만 문화와 예술의 본질에는 더 깊이 다가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자신감의 근거는 탈북 과정에서의 지독한 체험이다. 인간의 본성에 파고들려는 몸부림이 예술이라면, 극한 상황에서 나타난 인간군상에 대한 체험은 영화 감독을 꿈꾸는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일 것이므로.
자존심 강한 그들 "그저 평범한 시민으로 여겨달라"
취재 중 만난 탈북자들은 대부분 자존심이 강했다. 그리고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언론의 취재에 너무 쉽게 응하는 탈북자들을 조심하라며 충고하기도 했다. 그들은 왜 언론을 꺼릴까. 한 탈북자는 "우리를 그냥 평범한 시민으로 봐 달라"고 이야기했다.
언론의 구미에 맞는 증언을 쏟아내는 취재원이 아니라 동네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시민으로 여겨달라는 것이다. 영화 감독을 지망하는 김철용 씨 역시 "오직 영화로 승부하겠다"는 말을 거듭했다.
"차별은 거부한다. 그러나 단지 탈북자라는 이유만으로 지나친 관심을 받는 것도 싫다." 한국에서 좌충우돌하는 동안, 본래의 자존심을 되찾아가는 많은 탈북자들이 한결같이 전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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