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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은 스스로 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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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우리 몸은 스스로 낫는다

김철의 '몸살림 이야기'〈51〉몸살림의 인체학, 공명 ②

호흡은 편한 대로 하면 된다
  
  호흡 얘기가 나온 김에 호흡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더 알아보도록 하자. 몸살림운동을 공부하는 분 들 중에서 가끔 호흡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물어 온다. 이에 대해 대답은 간단하다.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호흡이니, 원래 생긴 대로 편하게 들이쉬고 편하게 내쉬면 된다. 억지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호흡하려 하지 말고 몸이 편하게 느끼는 대로 들이쉬고 내쉬면 되는 것이다.
  
  작년에 한 수련생이 호흡을 끊어서 해 보니 무협지에 나오는 것처럼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히다가 안개가 되어서 공중으로 피어오르고, 급기야는 주르르 땀이 흘러내리더라는 얘기를 했다. 한 10분쯤 지나니 목이 흥건히 젖을 만큼 머리에서 땀이 나더라는 것이었다. 이런 호흡을 하는 것은 좋은 것이냐고 물어 오는데, 무협지에서나 읽을 수 있는 장면이 자기 몸에서 나오니까 굉장히 신기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때 필자의 답은 위에서 한 얘기와 똑같았다. 호흡은 자연스럽게 들이쉬고 내쉬면 되는 것인데, 무엇 하려고 그런 짓을 하느냐고 되물었다.
  
  또 항문호흡이나 뇌호흡 같은 것은 좋은 것 아니냐고 물어 오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그런 호흡을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몸살림운동에서 그런 호흡을 권하지는 않는다. 하고 싶은 사람은 해도 되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할 필요는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항문은 똥을 배설하기 위한 필요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호흡기관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진화의 과정에서 우리 몸의 각 기관은 몸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어류의 단계에서는 물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피부로 호흡을 했고, 진화의 과정에서 땅으로 올라와 살면서 폐로 호흡을 하게 되면서도 그런 것이 일부 남아 있어 피부도 약간의 호흡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진화의 과정에서 항문은 어디까지나 배변기능을 담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호흡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두뇌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두뇌는 기억하고 분석하고 판단해서 행위를 결정하기 위해서 진화한 것이지, 숨을 쉬기 위해서 진화한 것은 아니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척추동물로 진화한 초기 단계인 어류의 단계에서도 뇌로 숨을 쉬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를 못했다. 과진화의 과정에서 과거의 유물은 몸에 남아 있을 수 있게 되고, 거기에 새로운 진화의 산물이 추가된다. 과거에도 그런 기능이 없었고 진화의 과정에서 추가된 것도 아닌 것이라면, 그런 기능은 있을 수가 없다.
  
  다만 공명이 트여서 깊은 호흡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숨을 깊이 내쉬면 항문뿐만 아니라 사타구니까지도 위로 빨려 올라오게 된다. 조금 연습을 하면 엉치를 빨아올리거나 때리게 할 수도 있다. 또 공명이 트여 있는 사람이 고개를 적당하게 들고 숨을 깊이 들이쉬면 머리의 백회혈을 때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것은 공명이 트여 깊은 호흡이 가능해졌을 때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위적으로 노력을 가하면 횡격막을 움직이는 데 따라 이 외에 여러 가지 호흡의 형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호흡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호흡에서 중요한 것은 공명이 트여서 가슴으로 달싹거리는 흉식호흡을 하지 말고 저 사타구니 밑에까지 미치는 깊은 호흡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물질대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져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억지로 호흡을 하다가는 오히려 몸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한번은 명상 기공을 한다는 분이 필자를 찾아왔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 분의 증세는 간경변이었다. 이 분은 고관절이 심하게 틀어져 있었고 몸의 오른쪽이 많이 휘어 있었다. 오른쪽이 활처럼 휘게 되면 맨 밑에 있는 갈비뼈가 간을 누르게 된다. 그러면 눌린 간은 굳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생긴 간경변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 이 분은 간이 배 밖으로 나와 갈비뼈에 눌려 좀 심하게 굳어 있었다.
  
  이런 분은 고관절을 바로잡고 휘어 있는 몸을 펴야 갈비뼈가 간을 누르지 않게 되어 간이 더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들기름이든 잣이든 호두든 또는 그 무엇이든 식물성 기름을 장기간 복용해야 굳어 있는 간을 풀리게 할 수 있다. 식물성 기름은 동물성 기름을 녹이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굳어 있는 간을 푸는 데는 식물성 기름만큼 좋은 것이 없다.
  
  이 분이 간경변이 된 것은 고관절이 심하게 틀어져 있고 몸이 휘어 있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명상하는 자세를 취하고 억지로 호흡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분이 매일 이런 자세를 억지로 장시간 취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간경변이 많이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기공이 몸을 망가뜨린 한 예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명상 기공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명상은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비게 함으로써 몸의 수련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하기는 하되, 그 전에 먼저 몸을 펴는 일부터 먼저 하라고 권하고 싶을 뿐이다. 먼저 몸을 완전하게 펴고, 그리하여 공명이 완전히 트이고 나서 하면, 명상도 더 잘될 뿐 아니라 몸이 망가지는 일도 전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무애 스님께서는 우리 한민족의 경험주의적인 전통을 이어받아 영국의 경험주의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경험을 통한 공부를 강조하셨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세상에 신비한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전에도 한번 썼지만 무엇인가 신비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몸살림운동은 이러한 스님의 말씀에 따라 신비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하고 확실한 사실에 바른 지식이 있다고 본다. 문제는 평범하고 확실한 사실을 무시하고 이상한 데로 나아가면서 이상한 논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또는 다음에 보는 것처럼 과학인 것처럼 사람들을 오도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수족냉증은 공명이 막혀 있기 때문
  
  여름이고 겨울이고 가리지 않고 손과 발이 차갑다고 느끼는 것을 수족냉증(手足冷症)이라고 한다. 그렇게 느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손과 발의 온도가 정상적인 사람에 비해 낮다. 이런 사람은 나는 왜 이렇게 손과 발이 찰까 하는 의문을 갖기는 하지만, 큰 병으로 여겨지지는 않으므로 대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간다. 다만 기분이 조금 나쁠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과거 서양의학에서는 냉증 자체를 아예 질환으로 보지도 않았다. <머크 매뉴얼>의 '찾아보기'에는 수족냉증이나 냉증이라는 항목 자체가 아예 없다. 다만 '레이노 질환과 현상'이라고 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해 놓고 있을 뿐이다. 이 질환으로 인해서 국소 냉감을 느낄 수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대개 수지부 및 선단부(예, 코, 혀)에 발생하는 세동맥의 경련으로 간헐성의 창백과 청색증을 지닌다. 레이노 질환은(Raynaud's disease)은 60~90%가 젊은 여성에서 보고되는데,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레이노 현상은 결체조직 질환, 폐쇄성 동맥질환, 신경손상에 의한 질환, 약물중독, 점액수종, 원발성 폐고혈압, 외상 등의 원인에 의한 이차적인 반응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약간의 설명을 해 놓고는, 다음에 '병리 및 병태생리'에서 "레이노 질환의 병리 기전은 밝혀져 있지 않으나, 대개의 연구는 프로스타글란딘 대사(prostaglandin metabolism), 미세 순환, 내막세포의 역할에 역점을 두고 있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증상 및 징후', '진단', '치료'의 순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병리 기전'(병의 원인, 발생, 경과 및 그 변화 등에 관한 이론. 병의 원리)은 밝혀져 있지 않으나, 경미한 경우에는 냉기(冷氣)를 피하는 것으로 치료가 가능하고, 담배를 끊어야 하며, 이완기법을 사용하기도 하며, 약물을 투여하면 종종 효과를 보기도 한다고 하면서 치료는 가능하기도 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지만 이렇게 하면 치료가 될 수도 있다는 현대의학의 고답적인 방식이 여기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는 누차 지적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이 증세에 대해 '네이버 오픈백과'에 서술돼 있는 다음 내용('냉증' 항목에 있다)을 보면서 그 방법론적인 문제점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한번 짚어 보기로 하자.
  
신체의 다른 부분은 차게 느끼지 않는데 손·발·허리 등 일부 특정 부위만이 냉감(冷感) 내지는 추위에 가까운 감각이 지속되는 증세.
  여름에도 나타난다. 발생 원인에 있어 자율신경기능의 실조(失調)가 혈관운동 신경장애를 가져오고, 차게 느끼는 부위의 모세관이 연축(攣縮)함으로써 혈행을 방해하고, 그 결과 차게 느낀다. 남성보다 여성이 2배쯤 많으며, 특히 40세 이상의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데서 난소 기능의 실조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치료로서는 적당한 운동과 충분한 영양섭취가 효과적이며, 보온(保溫)에 유의하고 목욕이나 건포마찰, 또는 취침 전 소량의 음주 등도 좋다. 심할 경우에는 레이노 증후군이나 교원병(膠原病) 등이 원인일 수도 있으므로 진찰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른 부분은 놓아두고 "남성보다 여성이 2배쯤 많으며, 특히 40세 이상의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데서 난소 기능의 실조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 한번 보도록 하자. 이는 그 앞에 나와 있는 얘기는 별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엉터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2배쯤 많고 40세 이상의 여성에게 많이 나타난다고 한 것은 거의 맞는 말이다. 거의 맞는다고 한 것은 두 배쯤 많은 것이 아니라 두 배를 훨씬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나타나는 현상을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많이 사실에 근접하게 써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다음 구절이다. "난소 기능의 실조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항목에서는 이런 학자도 있다고 해 놓음으로써 이것이 원인이라고 단정해 놓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를 문제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은 이런 학자의 방법론이 현대의학의 기본적인 방법론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한 실례로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의학은 병의 원인을 통계학적으로 규명하고(사실은 원인을 규명한다기보다는 공통된 현상을 찾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치료도 통계학적인 접근법을 사용해서 약물을 투입하거나 수술을 한다. 과연 이런 통계학적인 접근법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현대의학에서 특별히 방법론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것은 없다. 그냥 특별한 고민 없이 전부터 그렇게 해 왔으니까 전통 내지는 타성에 따라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 세계에 걸쳐 수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이 일에 종사하고 있고, 적어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전문적인 연구에 종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된 문제제기조차 하지 않고 있을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는 전에도 한번 얘기했지만, 첫 단추를 잘못 꿰어 계속 그 다음 단추도 잘못 꿰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한번 검토해 보기로 하자.
  
  자연의 세계를 통계학적 방법으로 보게 된 것은 1927년 하이젠베르크가 소립자의 운동원리를 불확정성원리로 정식화시키고 나서였다. 고전역학에서는 전자(電子)의 위치와 운동량은 전자가 어떤 상태에 있든 항상 동시에 측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자를 입자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확정된 값을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전자에는 입자적 성격(입자성)과 파동적 성격(파동성)이 서로 제약을 받으면서도 함께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전자의 한 현상을 설명할 때 어떤 범위에서는 입자적 측면에서 보고, 어떤 범위에서는 파동적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때문에 전자의 여러 가지 물리적인 양을 측정한 결과는 반드시 확정된 값을 갖는 것은 아니게 되고, 서로 다른 여러 가지 값이 각각 정해진 확률을 가지고 얻어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시적 세계에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확실하게 결정되지 않게 되고 확률적으로만 성립하게 된다.
  
  여기로부터 자연은 확률적인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됐다. 그러나 그렇게 확률적으로 보아야 하는 자연은 전자와 같은 미시(微示)의 세계에 관한 것이었다. 완전히 입자의 성격만을 나타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의 세계는 불확정한 것이 아니라 확정적이다. 소립자(素粒子)가 아니라 입자(粒子)의 세계를 확률적인 방법으로 본다면 이는 언어도단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컨대 일정한 공간에 갇혀 있는 공기에 일정한 압력을 가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공기의 부피는 일정하지 않고 확률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면, 이는 우스갯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일정한 온도에서 기체의 압력과 그 부피는 서로 반비례한다는, 지금 이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의 법칙을 파괴하고 입자의 세계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몸은 분명히 입자의 세계에 속해 있다.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자의 성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입자의 세계 중에서도 생명이 없는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세계에 속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몸에 나타나는 현상에 불확정성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현대의학이다. 적용할 수 있다면 어떠한 근거에서 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현대의학에 없다. 아무런 답변도 없이 불확정성의 원리가 최고의 과학 원리라고 해서 현대의학은 인간의 몸에 나타나는 현상을 확률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은 이런 소리 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게 됐지만, 한때는 사람이 사는 사회에 대해서도 불확정성의 원리가 적용된다고 해서 '불확실성의 시대'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 대던 때도 있었다. 사회에 불확정성의 원리가 적용되려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근거가 없으니 한때 얄팍한 지식인들이 유행을 타고 떠들어 대다가 지금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현대의학은 왜 불확정성의 원리가 소립자가 아닌, 따라서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띠는 것이 아닌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아무런 답변도 없이 그냥 적용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한 <의학연구 방법론>(2004. 초판 6쇄, 신영수·안윤옥 편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15-16쪽).
  
갈릴레이와 뉴턴에 의하여 부활된 결정론은 양자역학의 출현으로 다시 와해되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모든 운동의 법칙은 무원칙 또는 무작위성(behave at random), 즉 확률법칙에 따른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인과성도 확률적 연관으로 인식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통계적인 상관성에서 인과관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확률적 연관성으로 인과성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의 문제점은 단순한 상관관계(mere correlation)와 진정한 인과관계(truly causal relationship)를 어떻게 구분하느냐 하는 점이다.

  결국 인과성은 보편적으로 확률적 인과관계로 보는 것이 맞는 것인데, 다만 여기에 남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상관관계와 진정한 상관관계를 어떻게 구분하느냐 하는 데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해법으로 어렵지 않게 풀어 버리고 만다(같은 책, 16쪽).
  
요컨대 과학에서 추구하는 인과성은 인류의 사회생활을 증진, 발전시킬 수 있는 조작적 지식(knowledge of causal manipulanda)과 확률적 지식(probabilistic knowledge of which we are capable)이면 충분하며, 과거의 경이적인 발견이라고 인정되는 과학지식들 모두는 이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조작가능성의 개념도입은 앞서 확률적 인과성에서 문제가 되었던 단순한 상관관계를 구분해 내는 해답을 주고 있다. 인위적인 조작을 통하여 통계적 연관이 인과적 관계인지 아닌지를 현상적으로 판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위적인 조작을 통해 통계적 연관이 인과적 관계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게 된다고 하고 있다. 이 얘기에도 실용주의적 진리관의 중대한 오류가 숨어 있지만, 이 부분을 다룰 필요까지도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문제는 인과성을 확률적 인과관계로 보고 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세계를 확률적 인과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다음의 이 얘기는 검토할 필요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갈릴레이와 뉴턴에 의하여 부활된 결정론은 양자역학의 출현으로 다시 와해되었다"고 했는데, 과연 그러한가?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어 자세하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이 얘기 자체는 서양철학사나 과학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잘못된 주장인가를 금방 알 수 있다. 양자역학의 출현으로 인해 갈릴레이와 뉴턴이 와해된 것이 아니라 이들의 세계관이 한정돼서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양자역학의 탄생은 갈릴레이의 천체설과 뉴턴의 역학원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원리로는 보지 못하던 세계까지 보도록 시야를 트이게 해 준 것이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자. 지금 자동차는 뉴턴의 역학원리에 따르지 않고 양자역학의 원리에 따라 달려가고 있는 것인가. 자동차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그 위치와 운동량을 확률적으로밖에 측정할 수 없는 것인가. 그래서 휘발유 1리터에 10km를 달릴 수 있는 승용차에 1리터의 휘발유를 넣으면 5km를 달릴 수 있는 확률은 몇 퍼센트이고 15km를 달릴 수 있는 확률은 몇 퍼센트가 되는 것인가. 그리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달리고 있는 자동차가 대전에서 발견될 확률도 몇 퍼센트 있고 대구에서 발견될 확률도 몇 퍼센트 있는 것인가. 여기에도 프랑크 상수가 도입돼야 하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입자성을 띤 세계에 적용되던 갈릴레이나 뉴턴의 원리는 소립자의 세계로 들어가면 적용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띠는 소립자의 세계에 적용되던 원리를 이 거시의 세계에 그대로 적용시키려고 한다면 이 또한 우스운 일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모든 운동의 법칙은 무원칙 또는 무작위성, 즉 확률법칙에 따른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인과성도 확률적 연관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하는데, 여기에 와서는 아예 자연과학이 어지간히도 고생하고 있구나 하는 탄식 외에는 할 것이 없게 된다. 어떻게 모든 운동의 법칙이 무원칙 또는 무작위성의 원리에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렇게 되면 우리는 모든 운동의 법칙이 제멋대로 확률적으로 적용되는 카오스(혼돈)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야말로 불확실한 세계에 살고 있는 셈이 된다.
  
  현대의학은 자신을 다른 소위 대체의학과 구별해서 '자연과학적 의학'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자연과학을 이렇게 심하게 훼손시키고 나서도 '자연과학적인 의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자신의 취약한 방법론은 들보만큼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깔깔깔 웃어 대면서 죄인이라고 단죄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현대의학의 현실이다.
  
  이렇게 되면 내 몸은 뉴턴이 얘기한 역학 법칙이 적용되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립자로서 입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파동으로 나타나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게 된다. 나는 입자로도 살고 파동으로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입자로서 현재 내가 있는 위치에서 다른 사람에게 발견될 확률은 몇 퍼센트가 된다. 다른 사람이 볼 때 나는 또 파동으로 변신해서 사라졌다가 다시 입자로 변해서 나타나고, 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도깨비 또는 마술사가 되고 만다.
  
  현대의학은 이렇게도 빈약한 방법론적 기초 위에 서 있다. 모래 위의 누각(沙上樓閣)은 그래도 좋게 표현해 주는 것이고,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공중에 떠 있는 누각(空中樓閣)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으니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아예 원인을 찾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병을 정의하고 증상을 얘기하고 진단 방법을 얘기하고, 그러고 나서 치료의 방법을 얘기한다. 왜 그런 치료를 해야 하는지 이유는 없다. 단순하게 그렇게 하면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듭 하는 얘기이지만 진정으로 사람들의 건강한 삶과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기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딛고 있는 발이 어디에 있는지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단단한 땅 위에 발을 딛고 있는지,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의 발을 내려다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단단한 당에 발을 붙일 수 있도록 방법론적 기초부터 다시 세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난소 기능의 실조(조화를 잃음)가 냉증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는 아마 이렇게 보았을 것이다. 냉증은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2배 정도 많이 나타나고, 특히 40대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데, 이런 증세가 나타나는 여자들의 경우 난소 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 아예 난소를 배출하지 못하거나 정기적으로 배출하지 못한다는 것이 많이 발견된다. 고(故)로 난소 기능이 떨어지는 것이 냉증의 원인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는 논리학 공부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좋겠다는 말 외에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런 사람이 쓴 논문이 소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의학 잡지에 버젓이 실린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냉증이 40대 여성에게 특히 많이 관찰된다고 해서 난소 기능의 실조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성년 남자 또는 미성년 남자, 미성년 여자에게 나타나는 냉증은 또 어떻게 설명하려고 하는 것인가? 각자는 또 각자대로 원인이 있다고 하려고 하는 것인가?
  
  또 난소 기능에 큰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여자에게 냉증이 나타난다면 이는 또 어떻게 설명하려고 하는가? 결국 이런 원인은 몇 퍼센트, 저런 원인은 몇 퍼센트 하는 식으로 확률게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도 원인이라는 말을 쓰기만 한다면 현대의학에서는 보기 드물게 원인을 밝히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되기는 할 것이다. 그것만으로 기특하다고 평가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에도 여러 번 강조한 바 있지만 사람은 하나다. 생명체로서 한 사람의 몸이 전체로서 하나일 뿐만 아니라, 성년이든 미성년이든 여자든 남자든 모두 똑같은 몸을 가진 생명체이기 때문에 하나이다. 다만 여자는 잉태와 출산을 위해 남자와 다른 기관을 가지고 있고, 미성년자는 아직 성적(性的) 기관이 덜 발달해 있을 뿐이다. 이로 인한 차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남자든 여자든, 성년이든 미성년이든 하나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라고 볼 때 원인도 찾을 수 있다. 전부 쪼가리를 내서 보게 되면 원인도 찾지 못할 뿐더러 안개 속에서 헤매게 된다. 이 약을 쓰면 어떻고 저 약을 쓰면 어떻고 또 배합을 해서 쓰면 어떻고 하면서 헤매게 되는 것이다. 약을 기본으로 생각하게 되면 헤매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한의학이든 현대의학이든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몸의 종류를 네 가지로 갈라서 보는 것도 약을 쓰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八象이다 十六象이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몸 안에 있는 기관을 다섯 가지(五行)로 갈라서 보는 것도 약을 쓰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기본은 약이 아니라 우리 몸은 스스로 낫는 것이다. 몸을 수십 개로 쪼개서 소위 전문화시켜서 보는 것도 약을 쓰기 위해서 그러는 것인데, 기본은 약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다. 몸을 믿지 않고 약을 믿고, 그래서 돈을 받고 약을 팔아서 건강을 판매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
  
  수족냉증은 단순하게 공명이 막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그 원리는 너무나 간단하다. 공명이 완전히 틔어 있으면 허파가 최대한 펴져 있는 상태에서 산소를 흡수하기 때문에 우리 몸에서 필요로 하는 산소를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 몸에서 산소를 필요로 하는 부위에 충분한 산소가 도달할 수 있다. 그러면 또 몸의 각 부위는 충분히 산소를 이용해서 당을 태워 열을 낼 수 있다. 수족, 즉 사지(四肢)는 심장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데, 그곳까지 갈 만큼 산소가 충분하면 그곳이 차가워질 이유가 없다.
  
  이렇게 보면 반대로 공명이 막혀 있어 가슴 위로만 달싹거리는 흉식호흡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는 쉽게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허파 꽈리의 면적은 좁아지고, 그러면 산소는 불충분하게 흡수되고, 그러면 심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손과 발에 피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앞에서 거의 다 써 버렸기 때문에 써먹을 산소가 부족해지게 된다. 그래서 열을 내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수족냉증이라는 증세가 나타나는 구조이다.
  
  그렇다면 그 해결책도 간단하게 나온다. 몸을 펴서 공명을 틔우면 된다. 기운이 떨어졌을 때에도 보약을 먹을 것이 아니라 공명을 틔워야 한다고 했는데, 손과 발이 차가울 때에도 무슨 열을 내는 음식이나 약을 먹을 것이 아니라 공명을 틔워 주어야 한다. 약은 보약이든 열을 내는 음식이든 별 효과가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몸이 굽어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약을 먹는다고 해서 굽었던 몸이 펴지겠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굽은 몸은 약을 먹거나 수술을 한다고 해서 절대로 펴지지 않는다. 먹을 때 잠시 효과가 있는 듯하기도 하지만, 이는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다.
  
  기본은 몸을 펴는 것이다. 몸만 펴면 약 안 먹어도 힘이 펄펄 나고 필요한 열도 몸에서 알아서 잘도 낸다. 필자가 '약과 치료'라는 비정상적인 신화(神話)의 시대에서 '스스로 낫는' 정상적인 시대로 바꾸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은 몸만 제대로 펴면 몸의 문제는 거의 다 해결이 되기 때문이다. 거꾸로 약과 치료는 인간을 그것에 의존하게 함으로써 인간을 약화시킬 뿐이다. 그냥 몸만 펴도록 하자. 몸에 대해서 걱정할 일이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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