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의장을 비롯해 열린우리당 의원 및 당직자 140여 명이 25일 납작 엎드렸다. "모두가 못난 저희 열린우리당의 잘못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했다. "우리의 아집을 버리지 않으면 국민 여러분께서 우리를 버리신다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자중자애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대국민호소문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그동안 양극화 해소와 정치개혁 완수를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뛰어 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리 길지 않은 대국민호소문에 "싹쓸이"라는 단어를 4번이나 사용했다.
열린우리당의 논리를 따라가면 '싹쓸이' 이후의 상황은 묵시록 수준이다. "이대로 가면 지방권력 균형은커녕 전보다 더 심한 독점체제가 굳어질 것 같다. 지방자치 싹쓸이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썩게 하고 민주헌정질서의 와해를 가져올 우려가 있다. (…) 우리 사회가 지난 반세기 동안 생명을 걸고 지켜온 민주정치 체제가 벼랑 끝에 몰려있다"고 주장했다.
정동영 의장의 얘기는 더 위협적이었다. 그는 "이대로 가면 서울에서 제주까지 한나라당이 싹쓸이를 할 전망"이라며 "이는 단지 민주평화세력의 위기일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심대한 위기"라고 주장했다.
정 의장은 비상회의 뒤 서울지역 지원 유세에선 "한나라당이 독점하면 민주주의에 위기가 온다. 어떻게 세운 민주주의냐. 한나라당의 전신 신한국당, 그 전신 민자당, 그 전신 5공 민정당, 민정당의 전신 공화당까지, 이들이 민주주의를 세웠나. 여러분의 피로 이룬 민주주의가 한나라당 싹쓸이로 무너지게 된다"고 했다. 그는 "한나라당은 정경유착 세력이고 냉전세력이고 광주학살의 후예들"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반성의 내용은 없고 상대방 손가락질만
한 당의 권력 독점, 그것도 특별히 잘한 일 없이 비리와 추행을 일삼은 당이 '반사이익'으로 지방권력을 독점하게 되는 일은 분명히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은 "광주학살의 후예들"도 "정경유착 세력"도 아닌 자칭 "민주개혁세력"이라는 열린우리당이 초래한 것이다.
따라서 소속의원을 142명이나 거느린 집권여당이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을 맞아 진심어린 호소를 하려면 적어도 제대로 된 반성부터 하는 게 순서였다. 지금까지 이러이러한 일을 잘못했으니 선거 뒤에는 이렇게 바꾸겠다는 얘기 정도는 나와야 정상이었다.
여당의 대국민호소문 보고 개혁 열망을 배신한 이라크파병, 국가보안법 등 개혁법안 좌초 등의 '무능'과 전략적 유연성 합의 및 평택 미군기지 이전 추진 등 '졸속'이 선거 뒤에 달라질 것 같다고 느낄 국민이 몇이나 될까.
과반을 몰아줬던 4.15 총선 당시 내세운 분양원가 공개 약속조차 못 지키고 부동산값 폭등을 사실상 방치한 정부여당이, 숱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법을 강행 통과시키려는 정부여당이, 재벌 규제와 관련된 금융산업구조조정법 등은 국회 서랍 속에 넣어둔 열린우리당이 갑자기 '서민의 당'이 될 것 같다고 느낄 '서민'이 몇이나 될까. 양극화 해소에 올인 한 듯이 말하면서도 한미 FTA를 졸속으로 밀어붙이려는 정부여당의 행태가 바뀔 것 같다고 느낄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하나하나 따지기에 업보가 너무 많다면 적어도 권력 운용에 대한 기조와 노선의 변화라도 엿볼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일언반구 없이 우리당은 또다시 상대방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견제론'으로 포장한 대국민 협박을 했다.
이는 비상회의 자리에서 나온 중진들의 당부마저도 곧바로 휘발시킨 꼴이다. 임채정 의원은 "설사 선거에서 진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지느냐는 모습이 중요하다"고 정정당당한 승부를 당부했다. 조세형 고문도 "과거 공화당도 싹쓸이한 적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고 지켜야할 만한 가치를 가진 정당이냐 아니냐는 것"이라고 당부했다.
열린우리당의 읍소가 "구걸"이니 "깡통"이니 하는 비아냥을 사는 것은 이같은 당연한 지적에 반응 없는 둔감함을 또다시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무엇'을 잘못했는지가 빠져 있는 반성은 둘 중 하나라는 걸 새삼 드러냈다. 그게 무언지 모르거나, 아니면 숨기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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