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이라크 다음으로 손 볼 대상이 이란이라는 점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최근 국정연설에서도 부시 대통령은 북한핵문제는 협상으로 풀겠다고 하면서도 이란에 대해서는 협상의 '협'자도 꺼내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란이 미국의 군사공격의 목표가 될 것임을 은연중에 시사한 것이다.
그런 미국이 이란과 직접대화를 한다고 한다. 갑자기 이란이 예뻐져서가 아니다. 이라크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이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란의 당면문제인 이란핵문제는 빼고 미국의 관심사인 이라크 상황에 관해서만 이란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체니, 럼스펠드 등 강경파들은 의제가 무엇이 됐건 이란과의 대화를 한사코 반대하고 있다. 미래의 공격대상과 지금 협상을 시작했다간 공격의 명분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행정부의 기류는 이란과의 직접대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라크사태를 어떻게든 풀어보려는 절망적 몸부림으로 볼 수 있겠다. 첫번째 침공국가인 이라크의 상황 안정을 위해 다음번 공격 대상인 이란과 대화를 한다면 중동지역의 상황은 도대체 어떻게 풀려가게 될까? 제3세계 전문통신 매체인 〈인터 프레스 서비스(IPS)〉는 최근 분석기사를 통해 "미국내 강경파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위기와 이란위기가 하나의 위기로 수렴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이란 26년만의 직접대화?**
지난 16일 알리 라리자니 이란 핵협상대표가 "미국이 이라크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의해옴에 따라 조만간 협상대표를 임명해 대화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한 데 이어 21일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미국과 이란 관리들간 직접 협상을 처음으로 승인했다"고 밝혔다.
하메네이는 국영 TV 연설을 통해 이라크 문제와 관련한 미국과의 대화 승인을 밝힘으로써 이란과 미국이 1980년 4월 관계를 단절한 이후 26년만에 마주 앉게 됐다.
백악관은 22일 이란의 협상 승인은 "당면 현안인 핵문제에서 벗어나려는 술책"이라며 평가 절하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양국간의 대화의 통로는 열어놓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해 이란과의 협상에 대한 부시 행정부 내의 미묘한 기류를 보여줬다.
***이라크 사태 해결을 위해 이란과 대화 원했던 미국**
이라크 문제를 이란과 대화를 통해 풀어야겠다는 발상은 사실 미국에서 먼저 나온 것이다.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는 유혈사태와 전쟁 발발 3년이 되도록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는 이라크 정부 구성 작업 등 이라크로 인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의 시아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란을 통해 문제를 풀어보겠다는 방안을 고민한 것이다.
미국은 지난해 말부터 잘메이 칼릴자드 이라크 주재 미 대사를 통해 이같은 메시지를 이란에 던져왔지만 이란은 그동안 이 제안을 거절해왔다. 미국의 '러브콜'은 그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런던의 〈선데이타임스〉는 지난 12일 이란 정보당국 고위층의 말을 인용해 이라크 문제에 대한 미국의 대화 제안은 2월 말경 다시 나왔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이 대화로 핵문제 해결 실마리 기대**
이란이 21일 그동안 거절해왔던 미국의 제안을 수용한 데는 양국의 협상을 통해 이라크 문제 뿐 아니라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진 핵 문제의 실마리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부시 행정부는 이란의 핵 문제에 대한 압박을 계속 증가시켜왔으며 핵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난관에 봉착한 미국을 도와주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한 이란은 이 대화를 워싱턴과의 다양한 외교적 문제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리자니 이란 핵협상 대표는 미국과의 대화에서 핵문제 및 기타 다양한 문제들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살짝 피력하기도 했다. 그는 "만약 미국이 이 지역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를 중단한다면, 그리고 만약 그들이 과거 행동을 재검토한다면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대화하기는 싫지만 그래도 대화를 해야 하는" 부시의 난감함**
조지 부시 대통령의 '난감함'은 이 지점에 있다. 부시 대통령이 지난 10일 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다시 한 번 언급했던 이란과 마주 앉아 이라크 안정화를 위해 협상을 벌인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란의 '파워'를 또 무시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대화하기는 싫지만 그래도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때문인지 이란과의 대화를 두고 부시 행정부 내의 갈등도 엿보인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으로 대표되는 '협상파'와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으로 대표되는 '강경파' 사이의 미묘한 갈등이 그것이다.
라이스 장관은 이란과의 대화가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에 대화를 제안한 칼릴자드 대사도 '협상파'의 일원이다. 이들은 이란을 고립시키고 위협하는 정책을 뒤집는 모험을 벌이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라크의 종파간 대립 상황이 손 쓸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이 상황을 해결하는 데 이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식했기 때문이다.
***美 강경파, "이란과의 대화는 쓸모없는 짓"**
그러나 '강경파'는 이런 움직임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백악관 국가안보 고문관인 스테판 헤들레이는 이 협상이 단지 "미국의 압력을 전환하고 싶어하는 이란의 도구로 사용될 뿐"이라고 폄훼했다. 헤들레이는 이란과 미국은 늘 '성명'을 통해 대화하고 있다며 이란과의 대화를 쓸모없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전직 미국 관리도 제3세계 전문 통신매체인 〈인터프레스서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란의 대화 수용은 단지 "묘기"에 불과하다며 미국이 대화에 참여하는 것은 "이라크의 유혈사태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그 의미를 축소했다.
신문은 체니 부통령과 럼즈펠드 국방장관도 이란과의 대화의 중요성을 낮게 보는 헤들레이와 익명의 한 관리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들 강경파는 오직 이란의 정권교체에 관심이 있을 뿐, 이라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럼즈펠드 장관은 더욱이 이란이 이라크 폭력사태를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해왔다. 그는 지난 7일 이란이 "혁명수비대를 이라크 영내로 보냈다"고 주장하며 이라크 저항세력을 이란이 돕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처럼 행정부와 관련된 인사들은 대이란 정책에서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란을 외교적으로 고립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이라크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이란의 영향력을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뉘고 있는 것이다.
***美 "핵문제는 논외다" 못 박았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은 이란과 협상은 하더라도 핵 문제는 논외라고 못 박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이 이란에 대화를 제의한 것은 이라크 상황의 안정화를 논의하기 위한 것일 뿐 핵문제는 유럽연합(EU) 3개국이 주도하는 협상과 국제기구에서 다뤄질 것임을 분명히했다.
숀 매코맥 국무부 대변인도 22일 "이란 정부가 지금처럼 특별한 시기에 미 정부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라며 "정말로 기묘한 시기에 협상을 제안하고 있으나 국제사회로부터의 압력을 완화시키기 위한 이란 정부의 노력과 관련해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비록 부시 행정부가 핵문제와 이라크 문제를 분리해서 다루겠다는 전략을 세웠다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제3세계 전문 통신〈인터 프레스 서비스〉는 이라크의 위기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 이러한 미국의 분리 전략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국 이라크 문제를 둘러싼 이란과 미국의 협상은 미국과 이란 사이의 많은 정치적인 문제들을 포함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더욱이 이란이 이라크와 관련한 협상에 더욱 깊숙이 관여하게 될수록 '이란의 역할'의 유용성은 미국에게 더 넓게 인식될 것이어서 부시 대통령의 난처한 고민은 상당 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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